템빨 62권 - 02화
설마 의도한 조화일까?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백색 가옥들이 마치 구름을 연상시켰다.
바다로 시선을 돌려봤다.
수평선을 찾기 어렵다. 투명한 바다가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네요.”
코크로 섬의 경치를 보고 감탄하는 메르세데스의 목소리가 다소 들떴다. 작은 도로에 늘어선 야자수가 그녀를 환영하듯 잎사귀를 흔들었다.
“나도 좋아하는 곳이야.”
그리드도 코크로 섬의 경관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관광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기를 잘했군.’
본래 코크로 섬은 템빨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였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관광수익이 아깝지만 어쩌겠는가.
자연을 훼손하거나 광산에 몰래 숨어 들어서 자원을 탈취하는 놈들이 있는가하면 헬가오를 완전 부활시키려는 놈들도 있었으니 주민들의 안전과 섬의 존폐가 걱정이었다.
제아무리 템빨국이라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코크로 섬의 치안을 완벽하게 관리하기엔 무리가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편히 지내고 싶다고 했으니까.’
코크로 섬의 주민들은 매일 수천 명씩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외지인들 탓에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그런데도 몇 년이나 인내하며 관광 사업에 매진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해줬으니 치하해 마땅했다.
‘오래간만에 온 김에 선물이나 하나씩 주고 가야겠군. 팬티 한 장씩 돌려야겠어.’
기뻐하겠지?
방어력이 무려 20에다가 스탯도 3개나 오르는 팬티니까.
흐뭇하게 미소 짓는 그리드의 바느질 속도가 빨라졌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백사장을 걸으며 팬티를 만드는 그의 모습은 썩 괴상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정신세계를 의심할 정도로 특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그리드가 무엇을 하든 마냥 좋았다. 그리드와 단 둘이 함께 걷고 있단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쏴아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메르세데스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린다.
앞머리를 정돈하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선물을 건네주었다.
“받아. 너한테 필요할 거 같아서 만든 거야.”
새하얀 머리끈이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하지만 바늘조차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수천 개나 뚫려있다. 너무 얇아 끊어지기 십상인 호룬실을 아홉 줄씩 꼬아 하나로 만들고, 그걸 또 코바늘로 일일이 떠서 만든 레이스였다.
고급 4레벨의 경지에 오른 그리스의 솜씨로도 어렵게 만든 작품이다. 매일 한두 시간씩 꾸준히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총 제작 기간이 두 달이나 걸렸다.
그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머리끈이었다.
물론 자세히 봤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리고 메르세데스는 세상 그 누구보다 좋은 눈을 지닌 사람이다.
머리끈에 담긴 그리드의 노력과 정성을 엿본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소중히....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간직하지 말고 막 써. 싸울 때 쓰라고 만든 거니까.”
악명 높은 호룬실.
워낙 얇아 흐릿하고 쉽게 끊어진다. 오죽하면 거미줄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있겠는가.
호룬실은 반드시 여러 가닥을 하나로 꼬아 내구성을 높여야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었다. 제아무리 재단 기술이 높아도 손재주가 낮은 사람은 호룬실을 꼬는 과정에 다 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네 줄 이상을 하나로 꼬면 천의 재료로 써도 좋을만큼 내구성이 생겼고, 여덟 줄 이상을 하나로 꼬면 갑옷의 재료로 써도 좋을 정도로 탄탄해졌으며, 그리드는 아홉 줄을 하나로 꼬는데 성공했다.
메르세데스에게 선물해준 머리끈은 보기보다 튼튼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호룬실 덕분에 발생한 옵션 효과로 모든 속도 상승 버프가 귀속돼 있었다.
“그럼 매일 묶고 다닐게요.”
살며시 미소지은 메르세데스가 머리카락을 정돈해서 뒤로 올려 묶었다.
세룰리안 블루의 머리카락과 흰 머리끈이 예쁜 조화를 이뤘으니 과연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하얗게 염색하길 잘했네.’
원래는 검게 물들인 머리끈이었다.
하지만 하얗게 샜던 메르세데스의 머리카락이 본래 색을 되찾은 것을 보고 급히 염색을 다시 한 건데 보람이 있었다.
“잘 어울린다.”
“.....”
메르세데스의 흰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오늘은 그녀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일평생 기사로 살아왔던 그녀는 검과 방패가 아닌 선물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으니까.
***
“밀밭을 싹 다 밀어버린 건가.”
코크로 섬은 경작지의 절대 면적이 턱없이 부족하다.
안 그래도 작은 섬인데다 면적의 절반 이상을 산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
코크로 섬의 주민들이 자력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본토의 상인들에게 광물을 팔고 그 돈으로 식량을 매입해야할 정도였다.
한데 이젠 그 얼마 안 되는 경작지마저 싹 다 밀어버렸다.
숲을 조성하기 위한 면적을 확보해야했기 때문.
‘식량을 잘 지원해주라고 라빗에게 신신당부해야겠어.’
씽에서 공수해온 황금호두 묘목을 정성껏 심고 가꾸던 피아로가 그리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땀 흘려 일할 때의 피아로는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난다.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피아로의 옷에 묻은 흙을 손수 털어준 그리드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혼자 일하기 힘들지 않아?”
피아로는 이번 임무에 단 한 명의 농부도 대동하지 않았다.
오직 혼자서 밭을 밀고 묘목을 심는 중이었다.
완벽한 숲을 만들기 위해서다.
황금호두 나무는 그 어떤 식물보다 예민했다. 황금호두 나무를 문제없이 잘 심고, 가꾸기 위해선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도맡아야한다고 피아로는 판단했다.
이런 외지에서 홀로 몇 달이나 고생해야할 텐데 너무 외롭고 고되진 않을까....
그리드가 걱정하는 그때였다.
“여보~~! 새참 드시고 하세요!!”
멀리서 누군가가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자 베니야루였다.
“....외롭지는 않겠군.”
부인과 함께 왔었구나.
안심하며 미소 짓는 그리드였다.
***
“이번 헬가오 레이드는 쉬라고?”
템빨단엔 총 다섯 개의 레이드 팀이 있다.
템빨단의 원년 멤버들이 주축이 된 팀으로, 대륙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보스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재화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네, 그리드 전하께서 코크로 섬을 방문하신 김에 직접 헬가오를 잡겠다고 하시네요.”
“누구누구를 대동했는데?”
“메르세데스 경이요.”
“메르세데스 한 명?”
“네.”
“조금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제1팀 팀장 폰이 걱정했다.
코크로 섬 던전의 최종 보스, 헬가오.
그리드에게 최초로 공략당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리스폰되는 녀석은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전대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잃고 대부분의 힘을 봉인당한 상태라곤 하지만 명색이 제9위 대악마가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봉인된 힘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설정이다.
과거에는 4개의 화석을 가지고 등장했던 녀석이 이제는 6개의 화석을 가지고 등장했는데 화석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녀석의 레벨은 무려 150씩 상승했다.
현재의 헬가오는 레이드 팀 중에서도 전력이 가장 뛰어난 제1팀조차 많은 희생을 치러야할 정도로 강하다.
“화석을 캐고 잡으려는 건가?”
헬가오의 등장과 함께 생성되는 화석은 헬가오의 힘의 근원이자 약점이었다. 화석을 채취할 때마다 헬가오의 능력치가 대폭 하락했다.
저렙 시절의 그리드와 극검이 헬가오를 레이드할 수 있었던 이유는 2개의 화석을 채취했기 때문.
하지만 1팀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화석을 채취할 때마다 헬가오는 단지 약해질 뿐만 아니라 아이템 드롭률까지 하락했다.
화석을 캐고 잡아서야 레이드하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지금이라도 지원을 가는 게 좋겠어.”
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다.
반신조차 박살냈던 그리드를 직접 목도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강자다.
하지만 헬가오는 네임드 보스다. NPC인 양반과 달리 압도적인 생명력과 지속력을 자랑했다. 이건 상성의 문제다. 현재의 헬가오를 플레이어와 NPC 둘이서 상대한다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대로 떠나려하는 폰에게 라우엘이 질문했다.
“폰 님, 혹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메르세데스 경께서 새로운 기사도를 쓰셨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 그 소식을 듣고 다들 얼마나 기뻐했다고.”
기사도는 전설의 기사의 고유 특성이다.
하나의 기사도를 쓸 때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고 새로운 스킬이나 특성이 개화하는, 한 마디로 치트급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해.”
강력해진 헬가오에겐 ‘5명의 대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스킬이 존재한다. 방어력을 무시하는 트루 데미지에다가 무조건 치명타가 발생하는 매우 강력한 스킬로 토반조차 운 없으면 한 방에 죽었다.
지정 대상은 랜덤이지만, 필중기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단 둘이 헬가오를 레이드하려면 그 기술을 반드시 맞아야한다는 뜻.
“머릿수를 채워줘야 돼. 그래야 레이드가 가능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시기도 나빠.”
폰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헬가오는 인계에 한 번 등장할 때마다 대량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봉인된 힘의 일부를 되찾는 것으로 추측됐다. 그리고 힘을 일정량 되찾을 때마다 새로운 화석을 추가하고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근데 하필 이번이나 다음 등장 시기가 새로운 화석이 추가될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7개의 화석을 달고 나타나는 수가 있어. 그럼 레벨이 150이나 더 오른다고.”
레벨과 능력치 상승만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고 패턴도 다양해진다.
‘그렇게 되면 1팀 전부가 지원 가도 승산이 적다.’
물론 화석을 채취할 수만 있다면 그리드와 메르세데스 둘이서도 레이드에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더 강력해진 헬가오 앞에서 화석을 채취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게다가 화석을 채취하고 잡으면 가치가 떨어진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폰을 라우엘이 불러 세웠다.
“그냥 지켜보시죠.”
폰이 눈살을 찌푸렸다.
“뻔히 위험할 걸 알면서 그냥 지켜보라고?”
“전하께서는 레이드 팀의 보고서를 꾸준히 읽어오셨습니다. 설마 헬가오가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실까요? 그런데도 자신 있게 나서신 겁니다.”
“7번째 화석은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보고서에도 단지 추측성으로 적었을 뿐이니까.”
“메르세데스 경께서 새로운 기사도를 썼다고 했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니까.”
“그런데도 지금의 그리드 전하와 대련하면 자신이 질 거라고 하더군요.”
“....뭐?”
“폰 님이 기억하는 전하와 지금의 전하는 달라요. 짧은 시간 동안 전하께서는 한층 더 진일보하셨으니까. 전하의 판단을 믿고 기다려보세요.”
같은 시각, 코크로 섬 던전.
“실화냐....”
황금호두나무 숲을 살펴본 뒤.
제법 강해졌다는 헬가오의 상태를 체험해볼 겸 메르세데스와 단 둘이 던전을 찾은 그리드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7개의 화석이 번쩍이며 등장한 헬가오의 기세가 무시무시했기 때문.
과장 좀 보태서 13위 대악마 벨레드와 큰 차이가 없어보였다.
‘육신이 없는 헬가오는 지옥을 떠도는 마물의 육신을 강탈해서 지상에 강림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본신도 아닌 마물의 육체 따위를 빌린 것으로 이 정도 기세를 발휘하다니?
한 자릿수 대악마라는 건 정말로 차원이 다른 생물이 아닌가 싶다.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 정도.
‘앞으로 당분간 레이드하면서 뽑아먹다가 8번째 화석이 추가될 쯤엔 세희를 부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영구적으로 소멸시켜야 옳다.
이것은 지금의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판단하며 무기를 꺼내 쥔 그리드가 새삼 크라우젤을 떠올렸다.
‘당대의 검성 님은 어디서 뭐하시나.’
정말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남들은 아직 가보지 못한 오지에서 수련을 쌓고 있을 터.
전대 검성과의 격차를 어디까지 좁혀놨을까?
기대하는 그리드는 꿈에도 몰랐다.
크라우젤이 아직 갓조차 벗지 못한 양반들에게 쥐어터지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