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32화 (1,222/1,794)

템빨 62권 - 19화

크리스의 부활 포인트는 프론티어로 설정되어 있다.

카오스 산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뭐? 그 정도였다고?”

부활 즉시 카오스 산맥으로 달려온 그가 커다란 좌절감을 맛봤다.

아그너스가 제드노스와 라엘라, 페이커와 카츠의 기습적인 협공을 받고도 도리어 전황을 역전시켰다는 소식을 전달 받은 까닭.

한 발 늦게 도착한 반트너와 폰이 없었다면.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아그너스를 놓쳤을 거라는 제드노스의 고백은 가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하고 싸운 직후인데도 그만한 힘이 남아있었다니.’

꽈드득....

절로 이가 갈린다.

바알의 계약자.

다른 직업군과 달리 플레이어의 성향을 가리지 않고 적대하는 절대악....

‘역할상 당연히 최강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옛날부터 잇따르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심지어 비교적 최근에 전설이 된 녀석인데.....’

바알의 계약자는 차근차근 등급을 성장시켜야하는 클래스다. 처음부터 전설로 시작하는 다른 클래스와 달리 레벨 페널티를 적게 먹었다는 정보는 물론 입수했다.

하지만 아무리 적게 먹었어도 300레벨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해서 생각해 봐도 아그너스의 레벨은 300 후반조차 못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그너스의 성격을 고려하면 300레벨 중반조차 안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크리스의 레벨은 400이 진즉에 넘었다.

비록 노말 클래스 전직자라곤 하지만 모든 스탯이 4차 각성한 상태이며 신규 패시브 스킬까지 다수 습득했다.

크리스가 체감하기로 399레벨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3배 이상의 격차가 존재했다.

임철호 회장이 공언했던 대로 노말 클래스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등하는 추세였고, 크리스는 약 5차 전직 시기부터 노말클래스와 히든 클래스의 격차가 확실하게 좁혀질 거라고 예상해왔다.

히든 클래스가 노말 클래스의 상위 개념이 아닌, 히든 클래스와 노말 클래스의 장단점이 서로 부각되는 황금 밸런스의 시대가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더욱 더 노말 클래스에 애착을 느껴온 것이다.

크리스가 지난 세월 동안 발견한 8개의 에픽 클래스와 3개의 유니크 클래스를 전직하지 않고 반려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이 ‘대검’과 관련 없는 직업이었기 때문이지만 그 다음으로 큰 이유는 노말 클래스에 희망을 품어서였다.

노말 클래스로 그리드, 크라우젤 같은 최강의 실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면 얼마나 큰 명성을 얻겠는가.

크리스가 그리는 미래는 찬란하고 당당했다. 그래서 지겹기 짝이 없는 사냥에만 오래토록 집중해올 수 있었다.

한데 오늘.

크리스의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기껏 그렸던 미래가 시궁창에 처박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알의 계약자.

모든 등급을 아우르는 최강의 직업이 한 사람의 꿈을 송두리째 빼앗....

“큭큭큭! 푸하하하하핫!!”

....지 않았다.

크리스는 오히려 시원한 표정으로 대소를 터뜨렸다.

레전드리 클래스?

그는 여전히 열망하지 않는다.

시궁창에 빠진 미래를 다시 끄집어 올린 그가 열정을 불태웠다.

‘더욱 더. 지금보다 더욱 더 강해져라, 아그너스.’

네가 나보다 한 발 앞서 그리드와 나란히 서는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면.

‘그때 내가 네놈을 끌어내릴 테니까.’

사실 크리스는 그리드에게 어떤 경쟁심을 품기가 힘들었다.

그리드에게 느끼는 호감이 워낙 큰 까닭에 경쟁상대로 인식되기보다는 우상으로 다가왔고 이는 크리스의 열정에 무의식적인 제동을 걸어왔다.

아그너스라는 확고한 적,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는 건 크리스에게도 좋은 일인 셈이다.

노말 클래스로 최강의 클래스를 사냥하는 미래를 그리게 된 크리스의 열정이 여태껏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한 집념으로 발전했다.

“....사냥하러 가야겠군.”

프론티어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아그너스가 보여줬던 전투력을 논의하며 대처법을 강구하는 동료들을 뒤로한 크리스가 홀로 다시 산맥을 올랐다.

그가 있는 한 아그너스는 함부로 카오스 산맥을 찾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가 죽을 때마다 아그너스 또한 죽음을 각오해야할 테니.

***

<무무드의 영혼 해방>

★히든 전직 퀘스트★

과거,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의 수제자였던 무무드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재인박명이라.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그는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죽음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병마를 드러내지 않았고, 연구에 몰두하여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론’의 체계를 확립시켰습니다.

마법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생을 타고났을지언정,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니 무무드는 크게 기뻤고 충만감을 만끽하였습니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스승 브라함에게 업적을 갈취당한 그는 큰 충격과 원한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뼈아픈 배신감에 휩싸여 분노를 불태운 그는 브라함에게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브라함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마법공식을 새로이 만들고 세이렌으로 찾아가 강력한 오브까지 손에 넣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복수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짧은 생.

원한에 집착하기보다는 잠시라도 행복을 구가하고 싶었기에.

세이렌에서 만난 수인족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고통을 받고 맙니다.

<바알의 계약자>에게 백골이 된 시신을 빼앗기고, 그 시신에 이승을 떠났던 영혼이 귀속되어 의지와는 다른 살육을 벌이는 인형이 되어버렸습니다.

무무드가 아꼈던 세이렌을 구원하고, 무무드의 원한어린 사연을 알게 된 당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무무드의 영혼을 새롭게 얻은 힘으로 해방시켜주십시오.퀘스트 클리어 조건:바알의 계약자 ‘아그너스’가 손에 넣은 무무드의 리치를 파괴하고 영혼을 해방.

퀘스트 성공 보상:성장형 레전드리 클래스 <무무드의 후계자>획득. <무무드식 마법> 전부 개방.

언제쯤 얻은 퀘스트였을까.

‘세이렌에서 얻은 마법서가 준 퀘스트였으니까 대략....’

몇 년 전인지 쉽게 가늠이 안 된다.

시간을 한참 동안 거슬러 올라가야할 정도로 오래 전에 얻은 퀘스트였다.

사실상 포기했던 퀘스트이기도 하다.

리치와 데스나이트를 자유자재로 소환, 역소환할 수 있는 아그너스를 상대로 싸우면서 아그너스가 가장 아끼는 무기인 무무드를 파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

설령 그리드의 도움을 받아 아그너스를 실력적으로 압도한다고 해도 아그너스가 마음만 먹으면 유페미나는 평생 이 퀘스트를 깰 수 없었다.

그리드가 도와주겠다고 몇 번을 말해봤자 유페미나가 마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일에 그리드를 끌어들여서 그리드에게 민폐를 끼치기가 정말로 싫었다. 그래서 더욱 더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아그너스의 과거를 알게 되고, 연민을 느껴 일이 더 꼬이고 말았지만....

‘....결과적으론 잘 된 거네.’

눈앞에서 반짝이는 맑고 푸른 영혼을 빤히 바라보는 유페미나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번졌다.

결국 혼자이길 선택한 아그너스의 마지막 뒷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가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은혜를 갚아야만 인연을 끊을 수 있다는 발상으로 무무드의 영혼을 넘겨줄 줄이야....

매번 만날 때마다 성격도, 태도도 바뀌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사실 미쳐서가 아니라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순수함을 간직한 인물이라서가 아니었을까?

‘....아니, 아니야.’

아그너스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해선 안 좋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아그너스는 템빨단의 적이다.

하물며 그것은 아그너스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템빨단원인 유페미나는 아그너스에게 품은 감정이 어떻든 간에 그를 처단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유페미나 스스로가 그 의무에 망설이지도 않았다.

수십 분 전 카오스 산맥에서, 이미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아그너스에게 주박을 걸었었다.

만약 그녀의 주박이 아니었다면 반트너와 폰이 아무리 절묘하게 기습했더라도 그렇게 쉽사리 아그너스를 쓰러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유페미나는 누가 뭐래도 템빨단이었다.

한때 방황했던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그리드를 또 다시 실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론 그리드씨에게 은혜를 갚을 일만 남았어.’

그리드는 유페미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왔다. 그녀의 실력이야말로 최고라고 늘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리드의 그런 믿음은 유페미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하루에 복제할 수 있는 스킬 개수에 한계가 있고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직업군에겐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복제술사의 한계는 명확했기 때문.

그나마 뒤늦게 배운 무무드식 마법들 덕분에 상위급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었지만 최상급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상대로는 활약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유페미나는 그 명성에 비해 오랫동안 정체돼 있었다.

하지만 앞으론 바뀔 것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무무드.”

날카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프론티어.

높디높은 성벽 위에 올라선 유페미나가 무무드의 영혼을 잿빛 하늘 위로 떠나보냈다.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서 부인과 함께 안식하시길 바랄게요.”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무무드.

하지만 그의 최후는 행복했을 것이다.

세이렌에서 만난 사랑하는 여인과 마지막 여생을 함께했으니까.

따스하게 미소 짓던 유페미나가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무무드의 영혼이 승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누구의 소유도 아니게 된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하늘에 멈춰서 있었다.

유페미나가 그 이유를 눈치 채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브라함!”

무무드의 스승.

제자의 재능을 질투하고 시기한 끝에 제자의 업적을 가로챈 악당.

사실 그는 무무드를 리치로 만든 장본인이다.

브라함&무무드 퀘스트가 발생했을 때 밝혀진 진실이었다.

그렇다.

<바알의 계약자>에게 백골이 된 시신을 빼앗기고, 그 시신에 이승을 떠났던 영혼이 귀속되어 의지와는 다른 살육을 자행하는 인형이 되어버렸습니다.

유페미나가 아주 먼 옛날에 얻었던 이 퀘스트에 기록 된 정보는 단지 세간에 알려진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쉽게 말해 낡은 정보였다.

아그너스는 무무드의 리치를 만든 적이 없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무무드의 리치를 탈취해서 살육병기로 삼았을 뿐이다.

‘브라함이 어째서 이곳에?’

유페미나는 브라함과 무무드가 만나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무무드가 브라함에게 품은 증오의 크기가 태산보다 거대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두 사람이 재회하는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왕도로 돌아가기 전에 무무드의 영혼을 해방시키려했던 것이다.

한데 하필 이 타이밍에 브라함이 나타날 줄이야.

브라함은 당황하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직 무무드의 영혼만을 주시한 채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두 사람의 옷깃이 스치는 순간,

“....!”

유페미나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아주 작은 목소리긴 했지만, 브라함이 분명히 ‘고맙다’고 말했으니까.

[브라....함....]

원치 않게 리치로 부활하여 또 원치 않는 살육을 반복해왔던 무무드.

실로 수백 년을 고통 받아온 그가 여전히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천재의 범주마저 초월하는 정신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존재였다면 진즉에 미쳐서 자기 자신을 잃고 말았으리라.

스르륵....

브라함의 몸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자신을 대번에 알아보고 증오와 살의를 내뿜는 무무드의 영혼을 마주보고 선 그의 눈빛은 프론티어의 하늘처럼 흐렸다.

“제자여.”

[브라함!!]

“미안하구나.”

[....!]

“나는.... 나는 너의 명예를 빼앗은 일을 늘 후회했었다. 그 후회를 되돌리고자 너를 리치로 부활시켰다. 너를 내 곁에 두고 너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살아갈 생각이었다.”

[.....]

“....이젠 그것이 나의 고약한 이기심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드와 만난 덕분에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잘못을 깨달았고, 더 큰 후회를 얻었다.

“용서해달란 말은 못하겠구나. 다만.... 다만 언젠가 다시 전생할 너를 내가 찾게 된다면 그때는 내 너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

고요하게 빛날 뿐이던 무무드의 영혼이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증오와 분노, 허무와 슬픔이 교차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영혼은 말없이 흩어져 사라졌고, 유페미나는 퀘스트의 법칙에 따라서 무무드의 지식을 계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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