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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47화 (1,237/1,794)

템빨 63권 - 13화

온갖 색채로 물든 하늘 아래 황금색 구름이 흐른다.

어째선지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스윽.

조용히 눈을 뜬 드라시온이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거칠고 딱딱한 거죽을 적신 액체는 분명한 눈물이었다.

“.....”

드라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꿈속에서 본 세상은 온데간데없이 온통 암흑으로 물든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허무하고 두려웠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뇌리에 낯설지만 그리운 음성이 메아리쳤다.

“욕정으로 물든 그대의 추한 눈빛을 더 이상 마주보고 싶지 않습니다.”

“으.... 으으윽....”

기껏 기억을 되찾았건만 왜 기억 속에 없는 풍경과 음성이 떠오르며 그리워지는 걸까.

가슴은 왜 이토록 시리고 아플까.

이 지독한 고독은 뭐지?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하던 드라시온이 비프론즈 시절에 만났던 어떤 인간을 떠올렸다.

“네놈, 이상한 곳에서 전생했군.”

마치 나의 전생을 아는 듯했던 백발의 인간.

나를 바라보는 놈의 눈빛엔 조소와 동정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놈이 말했던 전생의 나는 지금의 내가 맞는 건가?’

터무니없는 의문이 떠올라 드라시온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해일처럼 밀려온 혼란이 그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을 더욱 크게 키웠다.

꿈틀.

뭔가,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만 같은 초조함이 생긴다.

어서 빨리 세상을 저주로 물들여 남들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혼란과 고통을 주고 싶다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그건 순수한 본능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본능.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짙은 어둠으로 물든 무저갱.

무저갱엔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와 지상으로 오르는 출구가 공존했지만 드라시온은 오직 출구만을 바라보았다.

악마임에도, 이미 지상에서 고통 받은 경험이 있음에도, 그리드라는 변수가 지상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는 세계는 지옥이 아닌 지상인 것이다.

왜일까.

드라시온 본인도 자신의 이 비정상적인 집착을 이해하지 못했다.

펄럭-!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 드라시온이 날개를 활짝 펼치자 검은 깃털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그대로 날아오르려는 그의 발목을 지하로부터 솟구친 어떤 손이 붙잡아 멈춰 세웠다.

깜짝 놀란 드라시온이 아래를 내려 보자 시뻘건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나?”

질문하는 눈동자의 주인은 드라시온마저 긴장시킬 정도의 마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드라시온이 꿈속에서 보았던 황금빛 구름들을 검게 물들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농도 짙은 마기였다.

“바알....”

제1위 대악마.

악신 야탄을 대신해 지옥을 지배하는 거악의 정체는 드라시온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옛 동료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왔지.”

“동료?”

대악마는 동료라는 표현을 쉽게 쓰지 않는다.

서로 경쟁하거나 복종하는 관계일 뿐이다.

드라시온은 전자에 속했다.

과거의 그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대악마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경쟁했다. 바알에게도 일관된 태도를 보였었다.

한데 바알은 서슴없이 동료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마치 너 따위는 처음부터 경쟁자도 아니었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드라시온 앞에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바알이 핑그르르 눈알을 굴렸다. 팽이처럼 회전하며 가속하는 그 눈동자는 어둠에 가려진 무저갱의 모든 걸 살피는 듯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샅샅이.

퍼엉!

퍼퍼펑!!

바알이 손가락을 퉁기자 어둠 곳곳에서 폭발음이 연쇄됐다.

무저갱에 서식하고 있는 생명체들이 죽어 소멸하는 소리였다.

이제 이곳에 살아있는 존재는 바알과 드라시온 단 둘뿐이었다.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지.”

“?”

“너는 이번 전쟁에서 죽을 것이다. 고작 11위 대악마의 힘으로 지금의 지상을 정복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든.”

“.....”

기껏 한다는 말이 저주와 조롱이었나.

바알의 재수 없는 성격은 여전하다 싶어 실소한 드라시온이 바알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번만큼은 죽음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

의미심장한 말.

드라시온이 다시 고개를 돌려봤을 때, 바알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흑마법사 랭킹 1위 로제.

야탄의 종인 그녀는 대악마 아모락트에게 신탁을 받는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주의 대악마가 부활할지니 잘 감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어째서 협조가 아닌 감시인지, 임무의 내용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로제는 늘 그랬듯이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미리 무저갱으로 사역마를 보내 저주의 대악마가 부활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다.

지존 그리드가 무력하게 패퇴하는 광경을 보며 희열했고, 기껏 그리드를 패퇴시켜놓고 섣불리 지상에 오르지 못하는 드라시온의 모습을 보고 답답함을 느끼면서 임무에 집중했다.

바로 그때 제1위 대악마 바알이 나타난 것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대악마의 정점은 존재감부터가 굉장했다.

유니크 등급의 사역마 <황혼의 박쥐>가 겁에 질려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정도다.

로제는 황혼의 박쥐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바람을 들어주진 않았다.

황혼의 박쥐가 바알을 조금 더 확실하게 관찰하게끔 통제했다.

결과는 뼈아팠다.

모습을 드러낸 바알이 몇 번 눈을 굴린다 싶더니 황혼의 박쥐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역마 ‘황혼의 박쥐’가 소멸하였습니다.]

“설마 눈치 챘을 줄이야.”

사역마는 주인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활동하며 주인에게 시야를 공유해주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대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페널티를 갖는다. 죽어도 쿨타임이 지나면 다시 소환할 수 있는 펫과 달리 한 번 죽으면 끝이었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사역마를 잃은 로제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은 셈이다.

후회하며 얼굴을 감싸 쥐는 그녀에게 아모락트가 새로운 신탁을 내렸다.

-친애하는 아이야, 지금 당장 사하란 제국으로 출발하거라.

저주의 대악마가 드디어 지상에 오르려하고 있었다.

사하란 제국은 곧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아모락트께서는 내게 드라시온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우라는 것일 테지.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인 로제가 희망을 품었다.

‘이번엔 기필코 이길 수 있을 거야.’

여태껏 로제는 수많은 대악마와 같은 편에서 싸웠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대악마가 생각보다 약했기 때문에?

아니다.

단지 인류가 강했을 뿐이다.

각기 다른, 혹은 닮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그리드를 중심으로 모여 힘을 합칠 때마다 상정했던 것 이상의 전투력이 발휘됐고 대악마들은 늘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었다.

로제는 드라시온의 <둠>을 보았다.

플레이어가 적은 생명력으로도 보스를 레이드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인 ‘회복’과 ‘재생’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치명적인 권능.

그 위대한 힘이 있는 이상 인간은 결코 드라시온을 레이드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로제의 입 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지상에 대악마의 영토가 세워지는 순간 치솟을 야탄교의 권위와 자신이 얻게 될 보상을 상상해보자 황홀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본래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이지.’

역대 수많은 MMORPG에는 늘 최강의 세력이 존재했다.

수많은 랭커들이 집결해 만든 길드, 혹은 강한 길드들이 하나로 뭉친 연합이 게임을 지배하고 군림했었다.

하지만 영원히 군림한 세력은 로제가 알기로 몇 없다.

너무 강한 세력은 그에 대적하는 세력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야탄교의 시대가 시작되는 거야.’

드라시온이 사하란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영토에 야탄교가 자리 잡는 순간 기존까지 템빨국과 적대했거나 템빨국을 경계해온 세력들이 야탄교와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

대악마를 등에 업은, Satisfy 역사상 최강의 세력이 탄생할 거라는 뜻.

“네, 알겠....”

희열에 찬 로제가 힘차게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가서 인간들을 도와 드라시온을 멸하라.

아모락트의 말이 이어졌다.

로제가 머릿속에 그린 찬란한 미래를 산산조각 내는 말이었다.

“....네? 인간들과 같은 편에서 싸우라고요?”

귀를 의심한 로제가 반문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모락트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니었다.

[새로운 신탁이 발생하였습니다.]

<저주의 대악마를 멸하라>

등급:SSS++

야탄신의 대행자 아모락트께서는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의 소멸을 바라십니다.

그녀의 뜻을 받들어 인류와 함께 드라시온을 소멸시키십시오.

신탁 클리어 보상:레벨 2 상승. 종족이 악마로 변경.

‘대악마들의 관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네.’

대악마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는 사실은 로제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다른 대악마를 죽이기 위해 인간과 협력하는 경우까지 생길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알겠습니다.”

과연 템빨단이 나의 도움을 받아들일까?

돕겠다고 찾아갔다가 등에 칼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로제와 템빨단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로제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단순 마족도 아닌 악마로의 종족 변경.

이번 보상이 너무 컸다.

로제 입장에선 반드시 완수하고 싶은 신탁이었다.

***

드라시온과의 전쟁을 각오한 황제 바사라는 우선 백성들을 피신시켰다.

텅텅 빈 타이탄엔 기사들과 병사들의 행군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정도 전력이면 바알도 잡겠는데?”

무저갱으로 향하는 길.

긴장으로부터 비롯한 적막을 깨뜨리고자 반트너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우리 템빨국과 제국이 하나로 뭉쳤는데 고작 11위 대악마 따위가 무슨 수로 감당하겠어?”

두려움에 떨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전대 제국의 기둥 피아로와 당대 제국의 기둥 카일.

전대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와 당대 솔로 넘버 나이트들.

템빨왕 그리드와 제국의 공작들.

지금 자신들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지 상기하자 없던 용기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길 수 있다.

최강 제국과 템빨국이 함께라면 대악마가 전부 몰려와도 싸워서 물리칠 수 있다.

사기를 올리는 제국의 병사들과 달리 그리드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둠이 너무 거슬린다.

모두에게 둠의 위력을 경고하긴 했지만 과연 제대로 대처가 될지 의문이다.

긴장하는 사이 어느새 무저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저갱을 향하는 새카만 입구가 저 멀리 보였다.

제국의 군대는 공작들이, 템빨국의 군대는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가 지휘했다.

거대한 무저갱의 입구를 멀찍이서 둘러싸는 형태로 진영을 갖춘 병사들이 전원 활을 손에 쥐었고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이 병사들의 앞에 섰다.

드라시온이 등장하는 순간 병사들은 활을 쏴 데미지를 조금이라도 누적시키고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은 드라시온의 광역기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것이었다.

“후.”

심호흡한 그리드와 템빨국의 정예들, 그리고 제국의 정예들이 입구 가까이에 포지션을 잡았다.

“그대도 마법사라면 우리 곁으로 자리를 잡으시오.”

“닥쳐라.”

제국의 대마법사들이 브라함의 포지션을 지적했지만 브라함은 콧방귀 뀔 뿐이었다.

잠시 후.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이 출현합니다!]

지축이 흔들리면서 드라시온이 등장했다.

일제히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이 놈을 덮쳤고 놈의 시선이 끌리는 동안 도약한 템빨단원들이 궁극기를 전개했다.

정확히는 전개하려고 했다.

“그라비티.”

쿵!

하늘 위 드라시온을 향해 쇄도하던 템빨단원들의 몸이 중력의 영향을 감당 못하고 지상에 떨어졌다.

브라함의 소행이었다.

“뭐하는 짓....”

따지려고 들던 반트너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자신들과 함께 도약했던 솔로 넘버나이트들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베여 반으로 잘려나가고 있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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