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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49화 (1,239/1,794)

템빨 63권 - 15화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삼인을 삼제 즉, 세 명의 제왕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신의 무력만으로 능히 나라를 부수고, 세워 제위에 오를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

만약 사하란 제국이 삼제의 표적이 됐다면 사하란 제국의 신세는 바람 앞의 등불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카일은 추측했을 정도다.

“의도가 불순하구나.”

삼제 중 하나인 이정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꺼운 천으로 두 눈과 콧대를 꽁꽁 싸맨 그의 민낯을 목격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가 민낯을 드러내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모조리 죽었으니까.

“카일이여. 무신의 총애를 받는 무인이여. 강철처럼 단단하게 단련한 그 손으로 인간들의 목을 조르고, 뽑아 무신께 바쳐야할 그대가 어째서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

카일이 무신의 추종자가 된 건 고작해야 3, 4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무신을 향한 카일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무신의 유적지에서 여러 비급을 익히고 잠재력을 인정받아 무신의 총애를 받은 그는 잃었던 팔을 되찾는 기적을 체험했기에.

하지만 믿음과 충성이라는 허울에 현혹되어 눈 먼 장님이 된 것은 아니다.

카일은 기본적으로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을 해치라는 무신의 뜻을 의심했다.

꿀꺽.

이정의 기세에 위축돼 마른 침을 삼킨 카일이 힘겹게 질문했다.

“혹시 이번 신탁은 잘못 된 게 아니오? 무릇 인간이란 신을 숭배하고 강하게 만드는 존재잖소. 무신께서 인간을 도와 대악마를 토벌하진 못할지언정 인간을 해치라는 이유를 내 도통 모르겠소.”

“신의 뜻을 어찌 헤아릴까.”

이정은 즉답했지만 적절한 답변이 되진 않았다. 이정 또한 신의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신의 뜻을 옳다고 믿으며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카일과 달리 무신을 맹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맹신이란, 어리석은 자들이 쉽게 범하는 죄악 중 하나였다.

“....”

카일의 눈에 거대한 산처럼 보였던 이정이 한없이 작아졌다.

이정의 어리석음을 엿본 순간 그에게 품었던 경외가 깡그리 사라진 여파였다.

“....멍청한 놈이었군.”

쥬앙데르크의 도움을 받아 재능을 개화하고 꾸준히 성장해온 카일의 자존감은 무척 높았다. 잠시나마 스스로를 최고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

그런 카일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무조건 카일보다 강하고, 영리하며, 빈틈이 없어야했다.

마치 그리드와 브라함처럼 말이다.

“내게 한 말인가?”

이정이 귀를 의심했다.

멍청하다니?

위대한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 삼제가 된 그는 이런 원색적인 비난이 낯설었다.

“이곳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건만, 내 당신이 아닌 누구를 비난했겠소?”

전장의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인 인류가 드라시온과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 것이다.

천상에 오를 기세로 높이 날아오른 드라시온이 날개를 활짝 펼치자 전장 전역으로 검은 깃털이 쇄도하며 파괴를 연쇄시켰다.

하늘에서 어지럽게 얽히는 수만 발의 화살은 이제 드라시온뿐만 아니라 인간들을 함께 노렸다. 저주에 빠진 병사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다.

쿠워어어어어!!

제국군 진영에서 장벽을 이루고 있던 골렘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무려 수천.

각 마탑에서 보유 중인 골렘을 전부 이번 전쟁에 투입한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칠 골렘은 흙으로 빚은 골렘들이었다.

다른 원소의 골렘들보다 단가가 낮고 위력도 떨어지는 하급 골렘이었지만 드라시온이 토속성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은 이미 파악한 상태다.

“홀리 웨폰!”

“홀리 아머!”

흙으로 빚은 골렘들의 몸에 성스러운 빛이 덧씌워졌다.

빛의 건틀렛과 갑옷을 무장한 녀석들이 느리게나마 착실하게 드라시온에게 전진하며 포위망을 구축했다.

“날아오르라!!”

지슈카를 비롯한 궁수들과 제드노스, 라엘라, 그리고 제국의 대마법사들은 드라시온을 추락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원거리에서 쉬지 않고 활과 마법을 쏴 드라시온의 날개를 집중 공략했다.

드라시온이 처음으로 실드를 전개했다.

암흑의 마력이 원형으로 펼쳐지며 드라시온을 둘러싸 지슈카와 마법사들의 공세를 막아냈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놈의 모습을 보고도 템빨단원들은 도리어 화색이 됐다.

‘일정 수준 이상의 데미지는 무력화시키지 못하나보군.’

병사들의 화살과 평범한 성직자, 마법사들이 쏘는 마법은 무시로 일관했던 드라시온이다.

수차례의 포화를 맞고도 변화가 없었던 놈의 생명력 게이지는 템빨단원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드라시온에게 공격이 아예 안 통하는 건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경이다.

하지만 다행히 드라시온은 무적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 공격은 실드를 펼쳐 방어하는 것이 바로 증거였다.

다만 문제는,

콰르르르르르륵!!

“....!”

“....!”

드라시온이 방어에 집중한다고 해서 놈의 공세가 멈추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드 너머 활짝 펼쳐진 놈의 양쪽 날개는 멈추지 않고 깃털을 퍼부었고 지상의 인간들은 깃털에 꿰뚫려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터텅!

“윽!?”

방패를 세워 깃털을 막아내던 반트너와 토반이 흠칫 놀랐다.

방패와 충돌한 깃털들이 갑자기 거대한 새로 변해 아가리를 벌렸기 때문이다.

뒤룩뒤룩 굴러가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하고 기다란 부리 안쪽엔 수백 개의 이빨이 톱날처럼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으니 몰골이 끔찍했다.

퍽!

자신의 머리를 삼키려드는 새의 아가리에 철퇴를 때려 박은 토반이 소리쳤다.

“패턴이 변했다! 깃털을 최대한 요격하도록 해!!”

여태까지 드라시온이 쏜 깃털들은 대상을 절삭하는 예리함과 대상을 약화시키는 저주능력을 갖췄었다.

일단 막을 수만 있으면 아무런 위협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일단 쏘아진 드라시온의 깃털은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괴조로 변해 생명을 멸하는 죽음의 군단으로 거듭났다.

깃털 자체를 요격해 소멸시켜야만 드라시온의 전력이 증식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셈이다.

“쏴라!!”

지휘관들의 외침이 급해졌고 병사들이 화살을 쏘는 속도가 빨라졌다.

병사들의 화살은 이제 드라시온이 아닌 드라시온이 뿌리는 깃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병사들의 활약 덕분에 죽음의 군단은 숫자를 늘리지 못했다.

더 힘든 시련이 시작되자 병사들의 참전이 빛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란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자신에게도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며 함성을 높이는 병사들.

손가락이 터져 피가 흘러도 멈추지 않고 화살을 쏘며 깃털을 요격하는 그들의 모습이 제국의 기사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동료들이 허망하게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의욕을 상실했던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전의를 가다듬었다.

한없이 나약한 병사들조차 용기를 쥐어짜 싸우는데 병사들의 희망인 자신들이 꼴불견을 보일 순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의욕을 상실시켰던 정체불명의 강자는 제국의 기둥 카일이 마주보고 있었다.

죽은 기사들의 원한을 내가 갚아주겠노라고, 카일의 뒷모습은 말하는 듯했다.

‘듀란달 황자의 편에 선 카일을 평소엔 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결국 하나로 뭉치게 되는 건가.

카일을 경계하고 의심했던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며 씁쓸하게 미소 지은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검 끝에 오러를 분출하는 그때였다.

“호흡을 늦추세요.”

제국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웠던 여인.

지금의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한때 동경했던, 혹은 시기했던 전(前) 솔로 넘버 나이트 메르세데스가 다가와 조언했다.

“....!!”

얼떨결에 그녀의 조언을 따른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경악했다.

새로운 호흡법에 따라 호흡이 순환할수록 체내의 마나가 더욱 짙어지며 오러가 확장된 까닭.

바로 직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음을 느끼고 전율하는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선두에 메르세데스가 자리 잡았다.

“뒤따르세요.”

“예....!”

메르세데스의 은익이 활짝 펼쳐짐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녀가 지나는 경로에 나부끼던 깃털들과 괴조들이 모조리 베여 사라졌고 그 뒤를 따라 달리는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검 끝에 맺힌 오러는 점차 더 거대해졌다.

“지금!”

콰아아아아아앙!!

이내 도약한 메르세데스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드라시온의 실드 하단부를 관통하여 파열시켰다. 그 틈새로 드러난 드라시온의 허리를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오러가 일제히 꿰뚫었으니 드라시온의 거체가 잠시나마 흔들렸다.

“너희들을 전장으로 내몰아온 백성들을, 황제를 증오하진 않느냐?”

기사들에게 슬며시 시선을 돌린 드라시온이 질문했다.

놈의 손끝에 차가운 마력이 집결되며 소용돌이쳤다. 질풍처럼 쏘아질 기세였다.

“큭!”

기사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드라시온에게 꽂아 넣은 칼이 도무지 뽑히질 않은 탓이다.

드라시온의 두꺼운 가죽이 기사들의 칼을 꽉 조이며 놓아주질 않았다.

“검을 버려!!”

메인 전력들의 그림자 사이를 넘나들며 그들의 등을 지켜주던 페이커가 참지 못하고 나타나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에게 있어서 검이란 목숨처럼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검을 버린다는 건 자존심을 시궁창에 버리는 셈과 같았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증오해야겠군.”

기사들이 잠시 망설이는 틈에 드라시온의 마법이 완성됐다. 조소를 머금은 놈의 손에서 소용돌이치던 차가운 마기가 급기야 분출됐다.

바로 그때.

뻐엉!!

가죽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폭발했다.

기사들에게 쏘아졌던 질풍 같은 마기의 궤도가 도중에 뒤틀려 붉은 하늘 저 멀리 뻗어나갔다.

전장 모든 이들의 시선이 드라시온의 가슴으로 집중됐다.

운동장처럼 넓은 놈의 가슴 한복판을 한 자루 창이 꿰뚫고 있었다.

폰의 창이었다.

조건부 패시브 스킬 <일기당천>으로 근력 스탯이 2배 강화된 그의 레일 스피어가 드라시온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부르르 몸을 떤 드라시온이 가슴에 박힌 창을 뽑아내 폰에게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대악마의 힘으로 던져진 창은 섬전처럼 빨라 대지를 박살내는 위력을 발휘했다.

“폰! 괜찮냐!!”

창이 워낙 빨리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꿰뚫린 폰이 추락하자 몸을 날려 받아준 반트너가 걱정스레 소리쳤다.

폰의 떨리는 시선이 반트너의 정수리에 고정됐다.

“빛....나는군.”

“이 새끼가!”

이 와중에 놀려?

울컥한 반트너가 버럭 성을 내다가 놀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검은 마기와 붉은 노을이 뒤섞여 음침했던 하늘에서부터 찬란한 햇살이 뻗어지고 있었다.

절대자의 기세가 담긴 그리드의 검기가 만든 휘광이었다.

“연(聯).”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륵!!

수십 회의 검격이 드라시온이 다급히 전개한 실드를 수십 조각으로 갈라 쪼갰고,

“디스인티그레이트.”

한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으로 빚어진 빛의 창이 드라시온의 몸을 꿰뚫어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등장부터 지금껏 하늘 위에 올라있던 드라시온이 처음으로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땅은 놈의 침범을 환영하지 않았다.

“파멸의 대지.”

콰르르르르르릉!!

토속성 마법의 궁극.

디스인티그레이트와 마찬가지로 전설 속에서나 등장했던 대마법이 강력한 지진을 일으켜 드라시온을 집어삼켰다.

이어서,

“절구질.”

피아로의 절기가 드라시온의 거체를 지하 깊숙이 처박아버렸다.

그리드와 브라함, 그리고 피아로.

시대를 초월해서 만난 세 명의 전설이 제11위 대악마를 압도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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