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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50화 (1,240/1,794)

템빨 63권 - 16화

‘뭐라고?’

자유로움을 넘어 기괴하게 회전하는 관절과 근육을 적극 활용하는 연격.

무호흡 상태를 유지하며 사지를 채찍처럼 휘두르던 이정이 깜짝 놀라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인류를 손쉽게 종말로 인도할 줄 알았던 제11위 대악마 드라시온의 ‘기’가 급격히 약해진 것을 느끼고 당황한 것이다.

‘저놈들?’

이정이 안대로 두 눈을 봉한 이유는 육감을 일깨우고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는 드라시온이 약화된 원인을 즉시 찾아냈다.

전장에 모인 수만 명의 인간 중에서 유독 강맹한 기를 품은 4명의 인물이 드라시온을 둘러싸고 있음을 감지했다.

저쯤 되는 실력자들이면 드라시온을 잠시나마 압도한 것이 납득이 될 정도의 수준이랄까.

‘둘은 낯익군....’

이정은 세계수의 숲에서 만났던 인간들을 떠올렸다.

템빨왕 그리드와 기사 메르세데스.

거기에 더해서 아스모펠이라는 녀석까지 셋이 힘을 합쳐서 덤비자 이정은 양손을 묶고 있는 구속구를 풀어야만 했었다.

놈들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선 안대까지 벗어야하는 게 아닐까 고심했을 정도.

필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무신에게 궁극의 비급을 얻고 한층 더 성장한 이정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경계했다.

‘내가 성장한 만큼 네놈들 또한 성장한 것이냐.’

게다가.

‘말도 안 되는 괴물까지 달고 나타났군....’

유독 엄청난 기를 품고 있는 인간 하나가 이정을 긴장시켰다.

아니, 저게 과연 인간일까?

의심하는 이정의 주위로 번갯불이 번쩍였다.

파직!

이정의 호흡이 흐트러진 찰나의 빈틈을 카일이 놓치지 않은 것이다.

뇌전을 일으켜 가속한 그가 날카롭게 소용돌이치는 이정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다.

칼날처럼 벼려진 이정의 사지가 장악하고 있는 공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접근조차 못했던 공간이지만 이정의 호흡이 흐트러진 시점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쩌정!!

앞서 적기사들의 몸을 양단했던 이정의 수도가 카일의 손등에 가로막혀 튕겨 올랐고,

콰작!!

앞서 적기사들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터뜨렸던 이정의 발차기는 카일의 겨드랑이에 밀착되더니 꺾여버렸다.

“삼제도 별거 아니군.”

이정의 공간을 무너뜨리고 접근해 이정과의 간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든 카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미 신탁을 거스른 몸.

앞으로 두 번 다신 무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망했던 그의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신이란 강자를 숭상하는 존재.

비록 자신이 무신의 뜻을 어겼을지언정 삼제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면.

자신의 무력을 증명해낸다면 무신께 버려질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뇌신패검.”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전류를 다루는 재능과 무신의 비급을 결합시켜 만든 카일의 궁극기 중 하나.

카일의 몸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갈래의 벼락 하나하나가 힘찬 검술의 묘리를 담고 이정을 덮쳤다.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를 지닌, 대상을 초살시키는데 특화된 기술이었다.

그것을.

쩌저저저저저정!!

뼈가 부러져 대롱거리는 오른쪽 발을 즉시 회수하며 무릎을 학처럼 세운 이정이 막아냈다.

‘뇌신패검을 막아낼 정도의 호신강기라니?’

뇌신패검의 위력은 태산을 부술 정도이다. 일단 대상을 간격에 넣기만 하면 반드시 죽일 수 있었다.

한데 이정은 상처 하나 없이 막아낸 것이다.

뿌드득!

근육을 조여 부러진 뼈를 똑바로 맞춘 이정이 안대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시야를 봉한 이유는 첫째,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다른 감각들을 벼르기 위함이었고.”

스륵.

두꺼운 안대가 벗겨진다.

길게 늘어지는 천이 전장의 여파로 발생한 광풍에 요란하게 흔들렸다.

“둘째, 타인을 절망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오직 뛰어난 무재(武才)를 갖춘 사람만이 무신의 선택을 받고 무신의 추종자가 될 수 있다.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도 정점이라고 불리는 삼제가 되기 위해선 특히 더 뛰어난 재능이 필요한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땐 불합리하다고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 말이다.

“너의 재능이 다른 추종자들의 의욕을 꺾는구나.”

눈을 봉하기라 마음먹게 만들었던 무신의 말씀.

수십 년 전의 음성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뜨는 이정의 시야에 카일의 모습과 그가 등진 하늘의 풍경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이정의 깊은 시선은 지상의 전쟁터로 꽂혔다.

정확히는 전쟁터에 서있는 백발의 괴물에게 고정됐다.

‘흡혈귀인가....? 저쯤 되는 마법사라면 설마 브라함?’

“나를 무시하는가!!”

눈을 떴음에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이정의 모습에 격분한 카일이 다시 한 번 뇌전을 일으켰다.

형(形)을 버리고 뇌전의 흐름에 고스란히 몸을 맡겨 벼락처럼 이동했으니 <뇌신출두>의 묘리였고, 이정과 거리를 좁히자마자 다른 한 손에 집결시킨 뇌전을 폭발시켜 대단위 충격을 발생시킨 것은 <뇌신포효>의 위력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요란하게 연쇄되는 뇌광이 붉은 하늘을 찢을 기세로 번쩍인다.

그 중심에 선 이정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정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수준을 넘어서 도리어 혈색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입가와 눈가의 깊은 주름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완전히 사라졌고 눈동자는 한층 더 맑아졌다.

이정이 몸에 두른 호신강기가 카일의 뇌전을 차단하는 수준을 넘어서 흡수한 여파였다.

“....!?”

힘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낀 카일이 기겁하며 뇌전을 거뒀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뇌전을 거둔 그의 육체능력은 뇌전을 일으켰을 때와 비교해서 몇 배나 뒤떨어졌으니까.

츠카악-!

이정이 휘두르는 수도에 카일은 반응하지 못했다.

어깨를 크게 베이며 뒤로 물러난 그가 결국 이정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볼품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의 추태를 지켜보는 이정의 검은 눈동자에 혐오가 깃들었다.

“무신의 뜻을 어기고 나를 욕보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가 싶었건만 결국 거기까지였나.”

카일의 배신과 반역이 어리석은 오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확인한 이정이 생전 처음으로 무신을 비난했다.

‘어찌 저깟 놈에게 기대를 품으셨나이까.’

스파앗!!

이정 또한 하강을 개시했다.

그는 이대로 카일을 뒤쫓아 카일의 목을 베어버림과 동시에 전장을 휩쓸 계획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신께서 드라시온을 지키라 하셨으니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듯했던 카일이 도중에 갑자기 멈춰 선다 싶더니,

파직!

다시금 뇌전을 몸에 두르고 역습을 가해왔다.

이정이 호신강기를 거두길 기다렸던 눈치다.

‘같잖은 놈이 집요하게 굴다니!’

퍼억!!

짜증을 느끼는 이정의 가슴에 카일의 발차기가 꽂혔다.

추격에 힘쓰느라 호신강기를 거뒀던 이정 입장에선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니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위기에 놓인 사람은 이정이 아닌 카일이었다.

충격을 견딘 이정이 손을 들어 카일의 발목을 부여잡은 것이다.

꽈드득!!

“크아아악!!”

그대로 발목이 꺾여 부러진 카일의 비명이 하늘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지상의 누구도 카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모두가 카일을 외면한 채 지하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드라시온에게 집중했다.

“버려진 개 신세가 따로 없군.”

고독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카일을 이정이 비웃었다.

“인간이 드라시온에게 취약한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본성이니 드라시온의 저주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지.”

“허억, 허억... 크흐윽....”

“무신께 선택받을 정도의 무재를 갖춘 네놈을 평범한 인간들이 과연 순수하게 존경하고 사랑할까?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저들 모두가 네놈의 죽음을 바랄 것이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자가 죽어 사라져야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갈 거라는 어리석은 착각 속에서 네놈의 단말마를 감미롭게 감상할 테지.”

카일은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에 줄을 잘못 서다니.’

빌어먹을, 그리드의 기세에 짓눌려 오판을 하고 말았다.

어째서 무신의 신탁이 아닌 그리드의 명령을 들었을까....

깊이 후회하며 절망하는 카일의 목을 이정의 수도가 겨눴다.

“후회해도 늦었다. 감히 신의 명령을 거스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대역죄니까.”

“대역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죽는다.

이정의 수도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위축돼 질끈 두 눈을 감았던 카일이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천천히 눈을 떴다.

템빨왕 그리드가 눈앞에 서있었다.

이정의 수도를 칼집으로 천천히 밀어내는 그의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병신 같은 명령에 충성하는 병신들이 세상에 그리 많을 줄 알아?”

“.....”

그리드의 헛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정의 등 뒤로 28명의 인물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이정, 그리고 카일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사정 때문에 아직 서대륙에 남아있던 무신의 추종자들이 전원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오래간만이군, 템빨왕 그리드.”

잠시 침묵하던 이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비난한 그리드에게 그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차라리 못 들은 셈 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세계수의 숲에서 만났을 땐 내가 그대에게 한 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입장이 반대가 된 것 같군.”

28명의 무신의 추종자를 등에 업은 이정은 기세등등했다.

지하에 처박혔던 드라시온이 마침 다시 지상에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꽤 많은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대악마는 쉽게 죽는 존재가 아니다.

하물며 11위 대악마라면 아직 많은 여력을 남겨놨을 게 뻔했다.

승산이 자신에게 있음을, 이정은 확신했다.

카일도 그의 확신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 그리드 전하, 이번 전쟁엔 승산이 없습니다.”

이정의 실력만 해도 압도적이다.

하물며 최소 10개의 비급을 익힌 듯 보이는 무신의 추종자들이 28명이나 더 가세했다.

게다가 대악마 드라시온은 아직까지 건재했고 말이다.

저들이 편을 먹은 이상 세상 그 누가 저들을 감당하겠는가?

스르릉.

대화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28인의 무신의 추종자들이 각종 병장기를 뽑아 손에 쥐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병장기들을 보고 겁먹은 카일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무기 치워.”

그리드가 헛소리를 지껄인다 싶더니.

후두둑.

28인의 추종자들이 손에 쥐었던 병장기를 모조리 손에서 놓아버렸다.

<탈리마의 수치>의 효과가 발휘된 것이다.

<왕의 부정>

에고 없는 무구를 탄압합니다.

반경 10미터 내의 대상이 착용 중인 장비가 에고 아이템이 아닐 경우 강제로 무장 해제시킵니다. 최대 30개.

스킬 자원 소모:없음

스킬 지속 시간:3초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7분

템빨이었다.

아이템 효과를 이용해서 무신의 추종자들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킨 그리드가 <종횡무진>을 전개, 당황하며 수도를 휘두르는 이정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한 후 무신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

삼제를 포함한 무신의 추종자들을 홀로 압도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목도한 카일이 깨달았다.

자신은 줄을 잘못 서지 않았다.

이곳 지상에도 무신이 있었다.

그리드라는 이름의 무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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