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06화
평온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젯밤 붉은 하늘 아래서 겪었던 전쟁이 꿈만 같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잠시 사색에 잠겼던 그리드가 소란을 듣고 시선을 돌렸다.
레베카교의 사제들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신전을 폐쇄하겠다니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립니까!!”
라인하르트에는 총 3개의 레베카 신전이 있다.
레베카 신전을 세우기 위해선 교황청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빠짐없이 충족해야하는 바, 신전을 세우고자 큰 공을 들였더랬지.
“이곳에 여신의 동상을 세우고 기도를 올렸던 순간부터 이미 이곳은 여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신전 전체가! 신전 담벼락 안쪽에 자란 잡초 하나까지 전부가 여신의 사유물이라는 것입니다! 한데 템빨국이 무슨 권리로 신전의 폐쇄를 논하는 겁니까!!”
“여신의 영토를 빼앗는 건 여신께 반기를 드는 짓이며 스스로가 사도임을 증명하는 것이외다!”
“뭐? 템빨왕 전하의 명이라고? 허! 전하께서 이단에 현혹된 것이 분명하오! 당신들이 어서 전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전하께선 필시 천벌을 받을 것이오!!”
3개 신전의 사제들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신전을 폐쇄하겠다는 템빨국의 입장이 그들은 황당할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레베카교의 장로였던 15인의 템빨신교 교인들이 그들에게 진실을 고했다.
“레베카 여신은 신들의 죄를 감추고자 인간들을 해치려고 했네. 우리가 믿고 섬겨온 자애의 여신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세.”
“자신들의 죄를 지목했다는 이유로 대천사 사리엘을 악마로 타락시키고 그 사실을 숨기고자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신들의 본질은 우리가 믿어온, 혹은 바라온 신들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기도를 올려봤자 돌아오는 보답은 구원과 축복이 아닌 기만과 폭력이니 어찌 그들을 믿고 섬기겠는가!”
“신들이 씌운 악마의 탈을 쓴 채 죽어가던 대천사 사리엘과 모든 진실을 엿보고 절망하던 우리 인류를 템빨신께서 구원하셨나니.... 우리는 앞으로 템빨신을 섬겨야할 것일세.”
장로 출신 사제들이 레베카교 사제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장로 시절 그들이 지녔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레베카교 사제들은 절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귀를 막았다.
현장에서 직접 진실을 목도하지 못한 사람들 입장에선 늙은 사제들이 단체로 악마에게 현혹됐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아아!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사도가 되고 말았구나!”
“템빨왕이 신을 부정한 것으로 모자라 스스로 신을 자처하니 이 나라는 글렀소! 머잖아 악마의 소굴이 되어 지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전초기지로 쓰이겠지!!”
“템빨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했어야할 장로들께선 어쩌다가 함께.... 후우....”
레베카교 사제들이 비탄에 빠졌다.
대부분 숨죽여 울었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단 장로들뿐만 아니라 이번 드라시온 원정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신도들이 전부 레베카 여신을 향한 믿음을 버리고 템빨왕을 신이라 숭배했으니 커다란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자신들을 신전에서 내쫓기 위해 급기야 군대까지 동원하는 템빨국의 작태를 확인한 신도들이 두 손을 들었다.
“알겠소.... 더 이상 설득해봤자 무의미해 보이니 순순히 떠나겠소.”
“그간의 정을 생각해 충고하자면 앞으로 나라에 닥칠 우환을 조심하십시오. 템빨왕이 신을 자처한 이상 천상의 신들께서 좌시하지 않을 테니.”
“안 그래도 이미 전국 각지에서 난리가 났다네. 북부에서는 역병이 발생했고 서부에서는 메뚜기떼가 출몰했지. 태풍이 중부를 휩쓴 것으로 모자라 남부에선 홍수가 범람했다고 하던가.”
“뭣....! 그것 보십시오! 그게 다 천벌입니다!! 장로들께서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시고 템빨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셔야합니다!!”
“난리는 반나절도 안 되서 다 끝났다네. 북부의 역병은 루비 성녀께서, 중부의 태풍은 브라함 공과 유페미나 공이, 남부의 홍수는 맥스옹과 수인족이 잠재웠고 메뚜기떼는 피아로 공과 농민들이 힘을 모아 해결했다지.”
“....?”
“태풍이 중부를 휩쓴 와중에도 라인하르트는 평온했던 이유를 아직 눈치 채지 못했는가? 하늘을 보게. 템빨신의 사자 사리엘의 가호가 라인하르트에 축복을 내리고 있으니 라인하르트는 안전할 수 있었네.”
“.....”
“천상의 신들은 템빨신을, 템빨국을 벌할 수 없네. 자격 없는 그들이 어찌 올바른 이들을 벌할 수 있겠는가.”
“.....”
레베카교 신도들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계속해서 떠드는 전 장로들의 망언에 현혹될까 두려워서였다.
“레베카 여신의 자애와 축복이 이 땅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레베카교 신도들이 서둘러 신전을 비우고 라인하르트를 떠났다.
“여신의 동상을 치워라.”
데미안과 전 장로들이 바삐 움직였다. 우선 레베카의 동상을 치우고 레베카교를 상징하거나 암시하는 모든 양식들을 파기했다. 그러자 텅텅 빈 신전에 그리드의 동상이 조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까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그리드에게 참배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그리드의 표정은 영 찝찝했다.
레베카교와 굳이 척을 져야했는지 그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데미안이 다가와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사벨 쨩들과 장로들이 레베카교에서 템빨신교로 개종한 시점부터 레베카교와 템빨신교는 공생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데미안 너도 알다시피 나와 레베카교의 우호 관계는 10년 이상 이어졌어. 우리가 시간을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면 언젠간 진실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레베카교 교인들 대부분이 레베카의 딸들과 장로들처럼 그리드를 신뢰했다. 어쩌면 대화를 통해서 그들을 회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지금은 당신을 유일신처럼 숭배하는 저들 장로들 또한 직접 두 눈으로 진실을 목도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천사의 날개를 되찾은 사리엘을 증인으로 내세워봤자 사도로 싸잡혀 비난받았을 테죠. 평생 품어온 신앙을 의심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
하긴 그렇다.
단순히 대화만으로 사제들의 신앙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레베카교는 조만간 새로운 교황과 장로들을 선출할 겁니다. 그들이 레베카 여신에게 어떤 신탁을 받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레베카교를 곁에 둔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어요. 일찍 연을 끊은 건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 이해했다.”
목수들의 망치질과 톱질이 신전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나간다.
레베카교를 상징하는 모든 양식들이 지워지고 템빨신교를 상징하게 될 양식들이 그 자리를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이제 그리드는 각오를 다져야했다.
천상의 신들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앞으론 여태껏 상상할 수 없었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위험에 맞서기 위해선 더 강한 힘이 필요했다. 원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예를 들자면....’
그리드가 한 사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들의 죄를 가장 먼저 밝혀냈던 일곱 명의 인간 중 하나.
신들에게 배신당하고 영겁의 세월 동안 고통받아온 사내.
칠선인의 화신,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말이다.
‘그자는 나를 아군으로 회유하려고 했지.’
천상의 신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나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눈치였었다.
대체 뭘 보고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건가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그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크프렉터라면 반드시 내 손을 붙잡아줄 거다.’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지크프렉터의 무력은 대륙 최강급, 잠재력은 세계관 최강급이니....
게다가 지크프렉터의 사도 지발과 네오 적기사단도 뛰어난 실력자들이다.
‘지발이 우리 세력에 합류하게 되면 마장기 생산에 본격적으로 착수해도 좋겠지.’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리드가 문득 어떤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데미안, 네 직업은 원래 여신의 대행자 아니었어?”
맞다.
교황은 지위일 뿐, 데미안의 직업은 여신의 대행자였다.
이제 템빨신교의 교황이 된 그를 여전히 여신의 대행자라고 볼 수 있을까?
어색한 표정을 지은 데미안이 뺨을 긁적였다.
“안 그래도 어제 바로 직업을 잃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여신의 대행자는 무려 유니크 클래스 직업이었다.
난감해하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설명했다.
“직업이야 새로 얻었죠. 템빨신교의 성기사로요. 저뿐만 아니라 전 레베카교 교인들 모두 템빨신교의 성기사와 사제로 직업이 체인지 됐습니다.”
“그래....?”
그나마 백수가 아닌 게 다행이지만 데미안이 유니크 클래스를 잃은 건 뼈아픈 손실이다.
데미안을 위해서 새로운 히든 클래스 전직서를 구해야할 듯하다.
‘페이커와 스컹크에게 의뢰해 봐야겠군.’
계획을 세운 그리드가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근데 템빨신교 성기사랑 사제의 능력은 뭐야?”
아무래도 아이템 강화 버프에 특화 됐으려나?
힐도 보유했으면 참 좋을 텐데.
내심 기대하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대답했다.
“음.... 일단 버프 스킬이랑 힐이 없습니다.”
“???”
여태까지 성기사와 사제는 총 3종류로 나뉘었었다.
레베카교 성기사와 사제, 도미니언교 성기사와 사제, 쥬다르교의 성기사와 사제.
도미니언교 성기사와 사제는 개인 버프 능력에 특화돼 있으며 특히 공격력이 뛰어나다.
쥬다르교 성기사와 사제는 방어력이 높고 광역 버프 스킬에 능통했다.
레베카교 성기사와 사제는 다른 두 교단의 교인들과 비교해서 버프 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힐을 보유해서 생존력을 보장 받았다.
“저랑 장로들의 레벨이 300대니까 이미 3차 전직이 완료된 상태라고 봐야하는데.... 그런데도 버프 스킬이랑 힐이 없어요.”
“....버프랑 힐이 없으면 뭐가 있는데?”
“아이템 착용 페널티를 일정량 무시하는 패시브 스킬하고 템빨신교 검무....”
“.....”
그리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앞으로 교인을 늘리기 위해선 템빨신교 교인만이 갖는 고유 특성을 선전해야했는데 버프와 힐을 못 쓰는 성기사와 사제라니... 다른 교단과 비교해서 경쟁력이 너무 없다.
‘NPC야 교감을 통해서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플레이어는 절대로 우리 교단에 가입 안 할 거 같은데.’
낭패다.
이마를 감싸 쥐는 그리드.
그는 검무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다.
본디 검무란 행례의 연출 수단.
제사 등의 예식에서 신령에게 기원을 올릴 때 쓰던 것이다.
예를 들어 초(超)의 검무는 초월자가 되고 싶다는 기원을 올림으로써 초월적인 힘을 거머쥐는 원리였다.
템빨신 그리드의 힘을 열망하고 기원하며 검무를 펼칠 템빨신교 성기사들의 전투력은 그리드의 전투력과 다소 비례할 거라는 뜻이다.
아직은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데미안.... 어서 빨리 새로운 직업을 구해주마.”
“....네.”
이날 이후.
레베카교와 쥬다르교, 도미니언교가 템빨신교와 템빨국을 적대하겠다고 선포했다.
주인을 잃은 최초의 성검과 레베카교의 삼신기를 노리고 레베카교에 가입하려는 플레이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반면 템빨신교는 딱히 각광을 받지 못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서운했지만 어쩌겠는가.
템빨신교 성기사와 사제가 워낙 똥 같은 직업인 것을....
‘게다가 플레이어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는 다른 신들과 달리 나에겐 아직 그런 권능이 없고....’
하지만 괜찮다.
나에겐 지크프렉터와 사리엘이 있으니.
네펠리나도 반드시 설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미식룡을 만나야한다.
미식룡과 함께하는 맛집 순례가 당면한 과제였다.
“한창 클 나이라 그런지 잠이 많군.”
“요즘 한 번 잠들면 최소 보름 동안 깨어나질 않더군요. 네펠리나 님께서 깨어나시는 즉시 연락드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래.... 요즘 여러모로 어수선할 텐데 그래도 신경 좀 써줘.”
“네, 그게 제 역할인걸요.”
언제나처럼 든든한 라우엘에게 뒷일을 맡긴 그리드가 일단 로그아웃했다.
미식룡을 만나기 전에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