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73화 (1,263/1,794)

템빨 64권 - 16화

지혜로운 거인족.

그들이 꽃피운 고대의 문명은 아득히 높은 기술력과 신비를 자랑한다. 현대인들은 그 원리를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허.... 설마 정말로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가져올 줄이야.’

3좌 라드볼프는 거인족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지녔다. 몇 세기를 탑에 틀어박힌지라 지식이 상당히 편향되긴 했지만, 그는 여러 정황과 근거를 토대로 한 가지 사실을 장담할 수 있었다.

적야의 대도.

그 괘씸한 도둑놈은 반드시 그리드를 표적으로 삼을 것이며, 그리드는 자각도 못하는 사이에 몸에 두른 보물들을 빼앗기게 될 거라고.

한데 반전이 일어났다.

그리드가 대도와의 ‘거래’에 성공하고 돌아온 것이다.

대도의 접근을 자각한 것으로 모자라 수완을 발휘해서 설득했다는 뜻이 됐다.

‘무력으로 제압했을 리는.... 없고.’

대도의 심상은 놈의 비겁한 성품을 꼭 빼닮았다. 대도는 심상에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숨겨버릴 수 있었고 굳이 심상을 꺼내지 않아도 기척을 말살하는 게 가능했다.

눈앞에 있다가도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놈을 무력으로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진품이군.”

대도가 사기를 친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감정해본 라드볼프가 혀를 찼다.

목걸이는 의심의 여지없는 진품이었다.

“무슨 수로 대도와 거래를 한 거냐?”

대도는 일방적인 약탈자다.

그리드의 보물들을 은밀히 훔쳐가는 게 가능했다. 한데 왜 굳이 거래를....?

“그게....”

그리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공방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결사들과의 교류도 뜸했던 라드볼프에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허.”

드라시온 레이드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라드볼프가 감탄했다.

“그 도둑놈이 네게 호감을 품었구나.”

“....아무래도 그런 듯하죠?”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강탈해간 인간을 좋게 해석하긴 싫었지만, 그리드는 부정하지 못했다.

대도는 처음부터 그리드에게 호의적이었다.

젊은 나이부터 초월경을 이룬 것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준 눈치였다.

“놈에게 순순히 소검을 준 것은.... 잘한 일이다.”

적야의 대도가 주장한대로 헥세타이아의 소검은 위험한 물건이다.

소검의 소유자는 신들의 감시를 받게 될 운명이며, 신들의 감시를 기만할 수 있는 인간은 적야의 대도 정도밖에 없었다.

만약 그리드가 소검의 소유권을 고집했다면 탑 또한 그리드를 멀리했으리라.

탑은, 신들과 적대하진 않지만 굳이 신들의 시선에 노출될 생각도 없었으니까.

결사들 중 일부는 오래 전부터 신들의 성향을 의심해왔다.

다만 결사들은 신보다 드래곤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할 뿐이다.

“뭐.... 고생 많았다. 어차피 하야테 공께서 조언해주시겠지만 내 노파심에 한 마디 하자면... 혹시라도 신이라는 지위에 심취해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라드볼프는 정말 긴 시간을 살아왔다.

신을 자처했던, 혹은 신으로 추앙받았던 인신을 꽤 많이 목격했다.

그들의 결말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자신을 향하는 신앙에 취해 그릇된 길을 걷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그들은 누군가에게 징벌 당했다. 설령 옳은 길을 걷는다고 해도 어느 도전자에게 짧은 신화를 마감했다.

신화의 주인공이 됐음에도 아직 약한 인신은 누군가에겐 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대표적인 포식자가 바로 무후총의 망령과 대수림의 질풍, 그레니어의 산군이다.

뮐러를 습격했다가 패퇴한 그레니어의 산군은 그 뒤 은둔자로 전락했지만 무후총의 망령과 대수림의 질풍은 여전히 건재했다.

천 년도 더 전부터 존재해온 리치왕, 무후총의 망령.

궁극의 마도를 탐구하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고 불사를 택했다는 놈의 탄생배경은 다른 리치들처럼 지극히 평범했으나 언젠가부터 보여준 행보는 남달랐다.

놈은, 신화를 수집해왔다.

비록 인신들의 짧고 작은 신화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몇 개나 먹어치운 놈은 충분히 괴물이라고 부를만 했다.

오염된 정령들의 집합체, 대수림의 질풍.

세계수를 잡아먹은 레이더스의 광기에 오염돼 탄생한 놈은 오로지 분노하며 대수림을 떠돈다. 언젠가부터 이성과 지혜를 얻은 놈 또한 어째선지 신화를 수집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후총의 망령과 비교해 먹어치운 신화가 아직 적다는 것이지만.... 놈에겐 ‘실체’라할 것이 없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우리들 결사와 적야의 대도를 만나본 너는 잘 알겠지.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강자가 정말로 많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어. 비반 같은 등신은 그나마 애교 수준이고 쓰레기, 병신, 개새끼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무후총의 망령과 대수림의 질풍, 그레니어의 은둔자를 조심해라. 너무 눈에 띄게 행동했다간 놈들의 표적이 되는 수가 있으니.”

“.....”

우락부락한 인상과 다소 어울리진 않지만, 라드볼프는 과학자다.

본능이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지식과 윤리에 따라서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더욱 더 비반을 거칠게.... 아니, 비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적으로 평가하는 듯했다.

‘무후총의 망령, 대수림의 질풍, 그레니어의 산군....’

라드볼프가 조심하라고 일러준 놈들 역시 과장 하나 없이 위험한 놈들이리라.

마음에 잘 새긴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고, 라드볼프는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낡은 서랍 안에 대충 던져놓았다.

“....터프하게 보관하시네요.”

네바르탄의 목걸이는 ‘단순한 기념품’에 불과하다고 라드볼프는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대충 취급할 줄은 몰랐다.

목걸이를 되찾고자 했던 의지는, 정말 단순히 자존심 때문이었나.

‘소검....’

라드볼프의 태도를 보자 헥세타이아의 소검이 새삼 더 그리워지는 그리드였다.

풀 죽은 그를 보고 험험, 헛기침한 라드볼프가 드디어 선물을 꺼냈다.

“자, 받거라.”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월야철>을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3좌 라드볼프와의 호감도가 50 상승하였습니다.]

“허헙....”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심장이 요동쳤다.

아름다운 금속에 매혹되는 것은 대장장이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은색의 금속.

미스릴처럼 밝지는 않고 도리어 어둡다.

‘빛을 빨아들이는 건가....?’

월야철은 대상의 격을 차단하는 금속이다.

마장기의 주먹이 드래곤의 비늘을 꿰뚫을 수 있는 이유는 장갑(裝甲)이 월야철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탐욕에 월야철과 디바인스톤을 함께 섞어버리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며, 초월적인 존재들을 무력화시키는 최강의 금속이 탄생하리라.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그리드의 뺨이 붉게 상기되는 그때였다.

“아서라.”

그리드의 속내를 빤히 읽은 라드볼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게 광룡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네가 광룡철을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광룡철과 월야철의 융합을 논하지 않았던 이유는 융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월야철은 고대 거인족의 땅에서만 자생했던 광물이다.

거인족의 땅이 소멸한 지금은 월야철을 더 이상 구하지 못한다.

구모델 마장기를 폐기하기에 앞서 반드시 월야철을 회수하고, 재활용할 정도로 월야철의 수량은 한정적이다.

누구보다 더 월야철의 증식을 원할 라드볼프가 광룡철과 월야철의 융합을 논하지 않은 이유는 광룡철과 월야철의 궁합이 나빠서였다.

광룡철은 광룡 네바르탄의 광기를 흡수하고 이능을 얻은 금속.

광룡의 격으로부터 비롯한 금속이다.

격을 차단하는 월야철과 최악의 상성을 지닌 셈이다.

“아....”

파브라늄과 광룡철을 섞어 만든 탐욕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라드볼프가 어째서 월야철과의 조화는 논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침음했다.

다행히 실망감은 크지 않았다.

기대감이 최고조에 도달하기 직전에 라드볼프의 설명을 들은 덕분이었다.

마음을 추스르려고 애쓰는 그에게 라드볼프가 조언해주었다.

“월야철은 순수를 지켜야만 비로소 위력을 발휘하는 금속이지만 그리 고상하게 구는 것치곤 단단하지도 않다. 물론 강철이나 미스릴 따위보다야 훨씬 뛰어난 강도를 자랑하지만 파브라늄이나 디바인스톤처럼 무한한 내구성을 지니진 못해. 결국 깎여나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점점 더 귀해진 것이다.

라드볼프의 선조들 또한 월야철의 한정된 수량을 걱정하며 애지중지했었다.

거인족의 땅이 멸망하고 월야철이 완전히 메말라버린 작금에 이르러서 라드볼프가 월야철에 집착하는 건 당연했다.

“월야철은 방어구로 쓰기엔 부적절하다. 소모를 앞당길 뿐이야.”

힐끔, 라드볼프의 시선이 공방에 도열해 있는 여덟 기의 마장기를 훑는다.

팔꿈치와 손, 무릎과 발, 그리고 뿔 혹은 어깨.

월야철로 만든 장갑은 그렇듯 한정적이었다.

마장기의 전신을 월야철로 뒤덮어버리는 사치는 월야철의 소유주인 라드볼프조차 누리지 못했다.

“예로부터 월야철은 귀했다.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부터 선조들께서는 월야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궁리하셔야만 했지.”

스윽.

라드볼프가 양손을 움직여 허공을 저었다.

마에스트로의 장엄한 지휘를 연상시키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여덟 기의 마장기가 지휘에 호응했다.

스파앗!!

동시다발적으로 눈을 뜨는 마력 동력 병기들.

드래곤의 속성을 따라 여덟 개의 속성을 갖춘 마장기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색깔로 번쩍인다.

쿠우웅━━!

라드볼프의 지휘에 맞춰 앞으로 걸음을 옮긴 마장기들이 각기 다른 형태의 무기를 꺼내 쥐었다.

검, 창, 도, 궁, 봉, 편, 포, 너클.

전부 월야철로 만든 무기였다.

그리드가 깨달았다.

팔꿈치와 손, 무릎과 발, 그리고 뿔, 어깨.

전부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부위들이다.

“선조들께서는 월야철로 무기를 빚으셨고 나는 선조들의 판단에 동의한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그 한 덩이의 월야철에 좌절하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무기를 빚는 일이다. 신조차도 꿰뚫어 죽여 버릴 수 있는 일격필살의 무기 말이다.”

그리드는 열 자루의 신검을 만들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헥세타이의 소검을 목도한 순간부터 다짐이 부끄러워졌다. 과연 자신이 저런 검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리드의 눈빛이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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