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8화
어느덧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살(殺)부터 연계하는 편이 공격력 증강엔 도움이 되는군.’
레베카교 교황에서 템빨신교 교주로 신분이 바뀐 데미안은 세 달 동안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했다. 벌써 2개의 융합 검무를 만든 그는 자신의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크.”
살(殺)로 찌르며 파고 들고 연(聯)으로 난도한다.
그리드도 애용하는 융합검무로 필드 보스를 압박하던 데미안이 황급히 방패를 세웠다.
쿠웅!
강철처럼 단단한 나무를 건틀릿처럼 칭칭 묶은 보스의 주먹이 데미안의 방패를 짓눌렀다. 휘청,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굽은 무릎 탓에 균형을 잃은 데미안이 그대로 앞구르기 했다.
보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오는 그를 보고 반트너가 박장대소했다.
“하하! 꼴불견이구만!!”
“살았으면 됐지 꼴불견은 무슨.”
반트너에게 핀잔을 준 지슈카가 활시위를 당겨 보스의 뒤통수에 불을 붙였다.
아무리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해도 나무는 나무.
목(木)속성 보스는 주작의 숨결을 품은 궁성의 화살을 버티지 못한다.
활활 타오르며 몸부림치는 보스의 눈 먼 공격을 연달아 피해낸 데미안이 반트너의 등 뒤로 숨어 숨을 골랐다.
‘연(聯)의 모션이 유지되는 동안은 이동이 안 되서 곤란하네.’
연은 1초 동안 수십 회의 검격을 휘두르는 공격이다.
그리고 그 1초 동안 시전자의 두 다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밀착된다.
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대상이 반격할 생각조차 못하게 압도적인 공격력을 발휘하거나 대상의 반격을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의 방어력을 보유해야했다.
마치 그리드처럼 말이다.
직업이 바뀌고 전반적인 능력치가 약해진 데미안의 입장에선 연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연을 휘두르는 도중에 반격을 받으면 도리어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쉽게 말해서 맞딜을 하면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높은 스팩을 지닌 적과 싸울 때의 이야기였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레벨의 보스들은 다 데미안보다 스팩이 높다.
“이거 안 되겠네요. 다음 보스부터는 빠지겠습니다.”
데미안은 현재 자신이 레이드 공대에 끼는 건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파티에서 탈퇴하는 데미안을 붙잡는 건 의외로 조금까지 그를 비웃던 반트너였다.
“그러지 말고 같이 해.”
레이드 공대에 끼는 건 각 분야 실력자들의 특권이다.
레이드 공대원들은 템빨국 전역에서 리스폰되는 보스 중 일부를 독점 사냥하고 거기서 나오는 아이템의 일정량을 길드에 바치는 대신 자신들도 분배금을 받는다. 꽤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길드 입장에선 유니크한 아이템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는 한편 재정이 쌓여서 좋았고.
“이제 너도 템빨단원인데 돈벌이는 같이 해야지.”
반트너가 데미안을 설득했다. 다른 템빨단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거절했다.
“하는 것도 없이 분배금만 챙기고 싶진 않네요. 호의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다.
초창기부터 이름난 랭커였고, 매해 국대전마다 활약했으며, 레베카교라는 거대 세력의 수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데미안이 소위 말하는 ‘분배충’이 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쩝.... 언제라도 합류해. 기다릴 테니까.”
데미안의 마음을 읽은 반트너도 설득을 관뒀다.
그는 다만 데미안이 빨리 실력을 복구하고 자신감을 되찾길 바랄뿐이었다.
미소로 화답한 데미안이 라인하르트로 복귀했다.
‘돈.... 돈이 필요하긴 한데.’
데미안은 템빨신교 성기사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템빨신의 가호가 능력치를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 게 아니라 아이템의 효과를 상승시켜준다는 점이다.
매우 강력한 아이템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지간한 신의 가호보다 템빨신의 가호가 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여전히 레어 아이템을 ‘졸업템’이라고 부르는 실정 아닌가. 어지간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레벨대에 맞는’ 유니크 이상 아이템을 매번 새로 구한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레어 아이템에 만족하고 지내는 실정이었고 레어 아이템 정도로는 템빨신의 가호를 받아봤자 극적인 효과 상승을 노리기 힘들었다.
없는 자들의 현실적인 고통.
랭커들 특히 템빨단의 랭커들은 느끼기 힘들 고통을 요즘 데미안은 절실히 체험 중이었다.
‘어서 빚을 갚아야 템을 맞추던가 하지....’
데미안의 레베카교 탈퇴는 별 탈 없이 진행됐다.
교황이라는 작자가 레베카의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던 시점부터 레베카교는 데미안을 불신했다. 추방을 논의하려던 차에 데미안이 스스로 떠나겠다고 하니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 데미안은 떠났다.
교황을 상징하는 오중관과 축복의 망토,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교황이었음을 뜻하는 성검을 내려놓고.
교황으로서 소유했던 것을 모조리 반납하고, 그는 빈손으로 떠났다.
하지만 레베카교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여태껏 교황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과, 교황으로 누린 것들이 있기에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전부 다 내놓으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우리는 당신에게 늘 감사했고, 존경했지만 이번 사태와는 별개라고.
잘못한 건 당신이라고.
여신을 배신한 당신을 처단하지 않고 당신이 소유했던 것들을 빼앗는 선에서 처벌을 멈추는 건 당신에게 바치는 마지막 예우라고.
그러면서 놈들은, 그 빌어먹을 놈들은 데미안의 전 재산을 몰수한 것으로 모자라 텅텅 빈 인벤토리 아래쪽에 마이너스 수치를 기입시켰다.
-159,885,103 GOLD.
빚이다.
무려 1억 6천의 빚.
엔화로 따지면 200억이다.
교황을 재임하면서 얻었던 경제적 이득이 그만큼 컸다는 뜻은 아니다. 데미안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지위를 악용한 적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의 빚이 책정된 이유는 이사벨을 비롯한 3명의 레베카의 딸들 때문이었다. 데미안이 데리고 떠난 레베카의 딸들에게 레베카교는 막말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매겼다.
데미안은 도리어 그것밖에 안 되냐고 화를 냈지만 뭐.... 허세였다. 어쨌든 빚쟁이가 돼버렸다.
‘그나마 그리드 님께 받았던 아이템들은 지켜내서 다행이긴 한데...’
낡았다.
방패를 제외하면 최소 몇 년 전에 구매한 것들이라 더 상위의 아이템이 필요하다.
“하....”
그리드에게 새로운 아이템 제작 의뢰를 부탁하려면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소정의 사례금을 지불하는 게 관례다. 최근의 그리드는 사례금을 거절하고 있지만 라우엘이 따로 받아 챙겨서 국고에 넣는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계산이 확실해야한다는 지론에서였고 템빨단원들과 데미안도 공감했다. 애초에 템빨국의 국고라는 건 그리드의 개인금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절차에 문제도 없었다.
‘제작 재료야 노가다를 해서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지만 사례금을 마련하려면 빚부터 갚아야하는데....’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아이템이 팔릴 때마다 들어오는 골드가 자동으로 레베카교에게 전송되고 있다.
마이너스 골드를 다 까기 전까진 돈을 만질 수조차 없단 뜻이다.
“하.”
한숨만 나온다.
마이너스 인벤토리 가졌다고 동네방네 자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충에 속이 답답하다.
‘이 상태론 국대전에 나가봤자 메달 따기도 힘들 테고.... 안 되겠다. 일단 집부터 팔자.’
안 그래도 혼자 살면서 너무 큰 집을 샀다고 후회 중이었다.
호화로운 대저택에서의 삶은 종종 쓸쓸했다.
초심을 떠올리자.
골방에 틀어박힌 채 게임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응?”
마음을 달래며 다짐하던 데미안이 신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족히 수천 명에 달하는 인파가 신전 앞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템빨신교가 처음 생겼던 시기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많은 인파였다.
최근의 템빨신교는 ‘부자들을 위한 종교’라는 인식이 생긴 바람에 방문객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데미안이 원인을 파악했다.
몇 달 전 그리드가 새로 발주했다는 대장장이 칸의 동상이 신전 입구에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살아생전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칸의 동상은 신전의 주인인 그리드의 동상보다 더 크고 눈에 띄었다. 그리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칸....”
데미안의 마음이 괜히 뭉클해졌다.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줬던 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자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천국에선 부디 행복하시길.’
“데미안 님?”
“....?”
칸의 동상에 기도를 올리던 데미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일본 유명 방송국의 프로그램 제작 PD였다.
데미안이 인터뷰에서 그리드를 찬양했던 모습들만 교묘하게 편집해 데미안이 그리드의 꼭두각시라느니, 매국노라느니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젠 당당하게 그리드를 섬길 수 있어서 행복하겠어요?”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는 데미안에게 PD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언제 봐도 재수 없는 낯짝이다.
데미안이 표정을 풀지 않고 물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리드 신전에 칸의 동상을 세웠다는 소문을 듣고 취재하러 왔죠. 긴가민가하면서 왔는데 진짜였네요? 그리드는 칸이 신이 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겁니까? 하하.”
“뭐가 웃깁니까?”
“웃기잖아요. NPC가 죽었을 때 복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도 웃겼는데 이젠 심지어 신격화라.... 이쯤 되면 일종의 정신병이 아닐지.... 아,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마요. 당신이 NPC랑 사귄다고 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인데 뭘 그렇게 화를 냅니까?”
“그냥 꺼지세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걸 꾹 참는 데미안이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려는 데미안에게 PD가 말했다.
“플레이어 55라는 프로그램, 아시죠?”
플레이어 55.
잠재력 있는, 혹은 이미 유명한 랭커 플레이어 55명을 선정해 방송국과 시청자가 함께 관찰하고, 응원하고, 후원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시청자들에게 후원금액을 가장 많이 받은 상위 3명의 플레이어는 방송국과 각종 기업을 스폰서로 등에 업고 비상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최고의 플레이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니만큼 엄청난 시청률을 자랑했다.
“모르는데요?”
“에이, 연일 매스컴에서 떠드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모르실 수가 있어요? 모르는 척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란 것도 아나보네.”
“모른다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어제 최종 우승자가 제로스로 결정됐어요.”
“아 글쎄 모른....”
“그리고 이건 아직 밝히지 않은 사실인데, 제로스가 올해 일본 대표로 국대전에 나갈 겁니다.”
“....”
“그리고 국대전 개막식에 맞춰서 ‘레전드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방영되죠. 프로그램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플레이어 55에서 우승한 자랑스러운 일본인 플레이어 제로스가 올해 국대전에서 몇 개의 메달을 획득할지 기록하려는 거죠.”
“근데요?”
“기대하라고요. 제로스가 당신의 메달 기록을 넘어서는 순간 데미안 당신이 남겼던 기록들은 ‘매국노가 남긴 부끄러운 기록’으로 역사에 남을 거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나는.... 그리드에게 예쁨 받으려고 노력하는 당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어요. 당신을 늘 혐오했죠. 애초에 당신 따위가 일본을 대표하는 랭커라는 게 잘못됐던 겁니다.”
올해부터 올바른 역사가 써질 것이다.
선언하고 떠나는 PD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는 데미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