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21화
“말하다가 갑자기 없어지기에 도망친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생산되는 회복물약은 이제 ‘비약’이라고 불린다.
꿀꺽, 보통의 물약보다 용량이 작아 복용이 편한 대신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난 비약을 한 입 삼켜 체력을 채운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라우젤을 반기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미르에게 고정돼 있었다.
방금 전에 그리드를 베었던 미르는 어느새 다시 달 아래 선 상태다.
파직, 뇌신의 잔영이 나부끼며 눈꽃을 파랗게 불태운다.
“식사를 하고 왔을 뿐이다.”
“든든히 먹었어?”
“그래.”
“그럼 소화 시키자고.”
이번엔 그리드가 선수를 쳤다. ‘땅을 딛고 있는 동안 랜덤으로 활성화되는’ 지신의 활성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땅의 파도를 일으켰다.
콰르르릉!!
미르가 딛고 선 지면이 솟구쳤다. 달 아래 서있던 놈의 몸이 순식간에 달 위까지 떠올랐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굳이 어떤 작전을 짜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각자 판단하고 따로 움직였다. 하지만 완벽한 협공을 이뤘다.
순보를 써서 미르의 후위를 장악한 그리드의 염룡검이 미르의 등을 베었고, 미르가 이를 막아내고자 청룡도를 뒤로 세우는 동안 크라우젤은 지룡 승천을 전개했다. 미르는 지룡 승천을 가뿐히 피했지만 크라우젤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대상을 가격하지 못해 높이 떠오른 지룡 승천의 반동을 이용, 미르의 머리 위로 떠오른 그가 유성 검을 연계했다.
이때 그리드는 연살 등의 2융합 검무를 남발하는 중이었다.
미르가 지룡 승천을 피하느라 잠시 드러낸 빈틈을 공략하기 위한 시도였다.
쿠와아아아앙-!
그리드의 맹공을 막아내는 미르의 머리 위로 유성 검이 떨어진다.
대지를 짓누르는 강력한 기파가 안 그래도 파도치는 땅을 더 크게 출렁이게 만들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동시에 생각했다.
미르를 몰아붙일 수 있다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쩌엉-!
그리드의 염룡검과 얽히던 미르의 청룡도가 뒤로 물러난다 싶더니,
촤르륵!!
미르의 금나수가 유성 검을 구현하며 접근해온 크라우젤의 손목을 낚아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초월경의 발현이다.
크라우젤이 인지하는 0.2초대의 시간을 더욱 더 잘게 쪼개고 활용한 놈은 크라우젤을 쉽게 기만했다.
콰앙!!
“.....”
지면에 추락해 처박힌 크라우젤이 1초간 침묵했다.
미르의 정수리를 파고 들었던 자신의 검이 갑자기 한 바퀴 회전했고, 직후 자신이 땅에 처박히기까지의 과정이 기억에서 생략됐음을 인지한 그는 자신의 초감각이 아직 초월경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한탄할 뿐이다.
‘....내가 너무 뒤쳐졌나.’
아니, 그게 아니다.
그리드가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단언컨대 미르는 지금 단계에서 대적할만한 적이 아니었다.
“.....”
크라우젤이 고개를 들었다.
미르의 초월경에 넋 놓고 당해버린 자신과 달리 그리드는 여전히 땅의 파도를 넘나들며 미르와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멀리서 바라보자 두 사람의 움직임과 움직임 속에 숨은 의도들을 눈으로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읽지 못하게 될 것이다.
쿠당탕탕!!
잠자코 전투를 지켜보는 크라우젤의 곁으로 이번엔 그리드가 추락했다. 몇 번이나 땅을 뒹굴다가 벌떡 일어난 그가 크라우젤을 재촉했다.
“뭐해? 소화 안 시켜?”
“일단 그 괴상한 모습부터 어떻게 바꿔봐라.”
“남에 마누라 보고 괴상하다니, 후로이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투야?”
그리드가 투덜거렸다.
현재 그는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동대륙에 온 김에 아이린의 모습으로 업적을 쌓고 아이린의 신격을 올리려는 의도였다.
“아이린 양의 생김새가 괴상하다는 게 아니라 아이린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네가 괴상하다는 뜻이었다만. 뻔히 알면서 사람을 쓰레기로 몰아가는 건가.”
“....후로이가 종종 예절이 없긴 하지만 쓰레기는 좀....”
“어찌됐든 지금 너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원래의 몸보다 짧아진 팔과 다리, 미묘하게 달라진 시야로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안 그래도 어색했다.
미르와 공방을 펼칠 때마다 어?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머리와 몸이 기억해온 움직임이, 여태까지 당연시 실행해왔던 움직임이 삐걱거리는 감각이랄까.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와 싸웠을 땐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차이점들에 발목이 붙잡혔다.
‘내 몸에 배인 습관들이 짧아진 리치에 적합하지 않았던 건가.’
습관이란 편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길들여지는 것이다.
상기한 그리드가 인피면구를 벗어던졌다.
애초에 ‘신의 기풍’을 운운했던 미르에겐 처음부터 정체가 발각당한 상태였다.
굳이 아이린의 모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후우.”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리드가 길게 호흡했다.
차지만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며 정신을 일깨운다.
미르는 그리드의 변화한 모습에 흥미를 드러내지 않았다.
신(神)은 외향에 얽매이지 않는다던 그랜드마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다른 양반들과 다르긴 달라.’
경박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다.
말투와 행동에 무게감이 있다.
가람이 등장했을 때 보여줬던 요란하고 강렬한 첫인상과 비교하면 인상이 꽤 약하긴 하지만, 도리어 이쪽이 훨씬 더 까다롭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가람보다 강한 건 둘째 치고 빈틈이 없었다.
‘동대륙의 중간보스.... 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환국의 신들 다음가는 존재.
미르는, 다른 양반들과 달리 반신(半神)이라는 위치에 어울렸다. 대천사의 장(將)과 최소 동격을 이뤘을 것이 분명했다.
“템빨신이시여.”
“.....”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미르에게 감탄하며 긴장하고 있던 크라우젤의 표정이 풀어졌다.
근엄한 표정으로 템빨신을 부르는 미르의 모습에 산통이 깨진 것이다.
‘왜 하필 템빨신이지?’
템빨단, 템빨국, 템빨왕부터 납득이 안 가긴 했지만 설마 템빨신까지 도달할 줄이야.
그리드의 지독한 작명 센스에 혀를 내두르는 크라우젤의 피부 위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손잡이는 용의 꼬리, 양 갈래로 살짝 벌어진 칼날의 끝은 여의주를 잃은 용의 아가리를 형상화한 듯한 도(刀).
찌릿한 예기를 어지럽게 일으키는 청룡도의 도신이 파르르, 경기를 일으킨다 싶더니 강기에 뒤덮인다.
거기까진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크라우젤이 위협을 느낀 이유는....
파지직!
도신을 뒤덮은 강기가 번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강기가 번개처럼 마구 날뛴다는 식의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번개가 되었다.
크라우젤이 <벽력>이라는 기술을 창안했을 때 떠올렸던 묘리가 저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훨씬 더 간결하고 완벽하게.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한 당신께선 인간들의 소망을 이뤄줘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실 테지만, 누구보다 당신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이라고 해서 전지전능하진 못합니다. 신이 정녕 인간들의 믿음대로 전지전능했다면 신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을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한울께서 이곳 동쪽으로 쫓겨나실 일도 없었을 것이며, 사신수가 봉인의 굴욕을 당했을 일도 없었겠죠. 모든 사신의 봉인을 해방시키겠다는 당신의 목표는 허황되다는 겁니다. 신께 더 이상 결례를 범하고 싶지 않으니, 당신께서도 순순히 포기해주십시오.”
스윽.
미르가 번개에 휩싸인 청룡도를 휘둘렀다.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번개가 뻗어나가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덮쳤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없습니다.]
그리드는 번개를 읽었고, 반응했다.
하지만 번개가 워낙 빨라 완전히 피하진 못하고 한쪽 팔을 그을렸다.
[28,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라우젤은 번개를 읽지 못했다. 대신 미르의 어깨가 살짝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에 그가 도를 휘두를 방향을 예측하고 반응했다.
하지만 번개가 워낙 빨랐고 크라우젤 본인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느려 상체의 절반이 그을렸다.
“.....”
단지 검을 휘둘렀을 뿐인 공격을 허용한 대가로 3만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은 크라우젤의 안색이 더욱 더 어두워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감전엔 저항했다는 점이지만 딱히 위로가 되진 않았다.
파직, 파직! 파지직!!
미르는 그저 제자리에서 청룡도만 휘두르면 되는 입장인 반면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사력을 다해서 피해야하는 입장이었다.
미르가 청룡도를 휘두를 때마다 용솟음치는 번개에 반응하고, 예측하고, 피한다는 건 엄청난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를 유발했다.
“허억, 허억, 허억....”
미르가 움직일 때면 무조건 발동하는 초월경이 그리드를 크게 압박했다. 스태미나가 급격히 소모된 그의 움직임이 다소 둔해졌다.
반면 크라우젤은 생명력을 잃은 대신 아직 스태미나에 여유가 있었다.
‘내 역할이 커지는군.’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목적은 미르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미르와 싸워서 이긴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할 것을 예상했었다.
다만 그리드는 앞으로의 일정을 세우기 위해서 미르의 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크라우젤은 그런 그리드를 외면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면 그걸로 족하다.
파직!
미르가 다시 한 번 청룡도를 휘두를 때,
쿠와아아앙!!
벽력을 발동시킨 크라우젤이 앞으로 돌진했다. 순간 뺨을 스치고 지나간 번개가 짜릿한 고통을 주었지만 인내했다.
순식간에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미르는 너무나도 태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검성 크라우젤, 그대의 기술은 매우 훌륭하지만 청룡의 숨결을 체화한 나를 상대로는 무용지물이다.”
소리가 뒤늦게 들린다.
미르는 이미 크라우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미르의 기척을 쫓기 위해 노력하는 크라우젤에게 알림창이 떠올랐다.
[초감각 스탯이 1 올랐습니다.]
엄청난 속도의 성장세.
뇌신과 청룡도를 다루는 미르의 광속이 크라우젤의 초감각을 실시간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진즉 초월경에 진입한 그리드와 비교하면 뒤처지는 신세였지만, 크라우젤에게 의욕을 심어주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성장 속도였다.
서걱!
청룡도가 크라우젤의 옆구리를 벤 후 등을 타고 넘어 찌른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크라우젤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눈 덮인 지면에 닿아가는 크라우젤의 눈앞엔 이미 청룡도가 나타나 있었다.
푸욱!!
청룡도가 이번엔 크라우젤의 가슴을 관통했다.
울컥, 피를 쏟아내는 크라우젤의 곁으로 미르의 얼굴이 다가왔다.
크라우젤은 미르의 흰 목에 아로새겨진 검흔을 볼 수 있었다. 꽤 오래 전에 생긴 상처로 추측됐다.
“어째서 뮐러의 비급을 배우지 않았지? 설마 그대는 그대의 잠재력이 뮐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독한 오만이다.”
신랄한 비판에 감정이 실린다.
크라우젤은 미르의 목에 새겨진 검흔이 누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만약.... 만약 내가 이제라도 고집을 버린다면.’
이자와 잠시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까?
잠시 흔들리는 크라우젤의 귓전에,
“오만은 개뿔.”
그리드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다섯 개의 검무를 연계하며 크라우젤의 좌측으로 접근해온 그의 시선이 크라우젤의 우측을 장악하고 서있는 미르의 시선과 교차한다.
“크라우젤은 뮐러를 넘어설 거다.”
“....!”
확신이 담긴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파도처럼 밀려와 크라우젤을 괴롭혔던 번뇌가 눈 녹듯 사라진다.
“....!”
전투 시작과 동시에 그리드의 검무를 체험하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미르가 움찔 놀란다.
크라우젤과 미르는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드의 검무가 불과 몇 분 전과 비교해서 훨씬 예리하고, 정확하고, 강력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초연살파극.”
쿠르르르르릉!!
오로지 파멸을 그리는 심상이 현현하여 일대의 공간을 위압감으로 지배했다.
뇌신을 일으키고 있던 미르가 위축될 정도였고, 크라우젤은 미르의 판단을 예측했다. 그대로 가속해 자리를 벗어나려는 미르에게 <고리 검>을 펼쳐서 곁으로 끌어당겼다.
대가는 처참했다.
즉시 날아오는 반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생명력마저 모조리 잃고 불사 상태에 돌입했다.
하지만 미르도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나로 합쳐진 열망의 무아검과 염룡검으로 펼친 초연살파극을 고스란히 허용한 것이다.
상상 이상의 고통에 놀라 눈을 부릅뜬 미르의 입가에 곧 미소가 번졌다.
“훗날이.... 기대되는군요.”
콰르르르르륵!!
그리드가 일으키는 화신의 폭풍 위로 미르의 불꽃이 덧씌워진다. 독무와 번개가 뒤섞인 불꽃이었다. 충돌하며 장렬한 폭발을 일으킨 불꽃이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집어삼켰고, 미르는 두 사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모든 저항이 종국에는 무력화됐고 두 사람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사신수를 해방하는 건 나중에 더 세지고 도전해야겠다.”
이제 백호와 청룡만 해방시키면 된다, 그런 압박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대륙에 집착했던 그리드의 미련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그리드는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보다 올바르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웠다.
반면 크라우젤은 미르에게 집착하게 됐다.
‘30분도 채 안 싸웠는데 초감각이 2개나 올랐어.’
대신 경험치를 잃었지만 레벨보다 초감각 스탯을 올리는 게 훨씬 더 난이도 높은 일이다.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미르와의 결투를 고집하는 편이 빠른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이몽이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결과는 같았다.
두 사람은 더욱 더,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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