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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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65권 - 01화
그리드는 양반 미르와 만난 순간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게 조작이 아니라 진짜라고?”
신영우의 집.
영우가 로그아웃하는 시간에 맞춰서 군고구마를 사들고 놀러온 지슈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껍질을 까서 영우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던 고구마를 영우의 코에 박아 넣을 정도로 그녀가 받은 충격은 컸다.
대단위 필드 마법(지신)과 고유 결계(화신의 폭풍)를 같이 작동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선행 동작 없는 고속 이동(뇌신)이 가능하고 ‘번개’를 만들어서 쏘기까지....
양반 미르의 전투력은 지슈카가 여태껏 만나왔던 어떤 적보다 압도적이었다.
“패턴을 분석하는 게 무의미하네? 필드 마법으로 진형을 붕괴시키고, 고유 결계로 광역 디버프를 걸면서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이동, 공격하는 놈을 무슨 수로 잡으라는 거....”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 네임드를 도대체 무슨 수로 넘기란 말인가?
아예 불가능하다.
저쯤 되면 완전 무적이다.
그렇게 따지려던 지슈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르의 강점들을 나열하다보니 바로 곁에 있는 영우(그리드)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필드 마법, 고유 결계, 눈으로 쫓기 힘든 스피드 전부 다 영우의 특징들이었다.
“이제 보니까 너.... 양심 없구나? 하긴, 나하고 유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시점부터 양심하곤 담 쌓았었지.”
“....한국 말 많이 늘었네.”
“나도 이제 한국인인데 당연히 잘 해야지”
지슈카가 귀화한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남미와 비교해서 다소 조심스러운 한국인들의 정서에 익숙해졌다. 그래서일까.
“그건 그렇고.... 요즘 유라하고는 어때?”
영우와 단지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민을 결심했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대담했던 지슈카의 성격도 덩달아 수그러들었다.
영우의 마음이야 어찌됐든 내가 영우를 좋아하니까 그걸로 족하다, 또는 나 같은 여자가 좋다는데 안 넘어올 남자가 있을까, 등의 자신감은 사라진지 오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가장 먼저 챙기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영우의 상냥함을 지난 1년 동안 곁에서 지켜봐온 그녀의 영우를 향한 마음은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어느 날 아침.
몸살에 걸려 무거워진 몸과 머리를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영우의 가족과 조찬을 가졌던 날.
집으로 돌아가려는 자신을 조용히 뒤따라 나온 영우가 목도리를 둘러줬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주더니 약을 주문하고 온종일 곁을 지켜주었다.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이기에, 누구보다 큰 책임을 짊어지고 있기에 시간을 황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하루를 낭비한 것이다.
그를 보면서 지슈카는 깨달았다.
저 남자의 가족이 되면 평생토록 외롭지 않을 거라고. 영원토록 행복할 거라고.
그때부터 힘들어졌다.
지슈카는 단지 영우의 곁에 있는 것으론 만족하지 못하게 됐다. 매주 주말마다 유라를 만나러 나가는 영우의 모습을 창가에서 바라보면서 우울해졌다.
“뭘 어때, 똑같지. 밥 먹고, 데이트하고....”
“잠도 잤어?”
“....갑자기 뭔 헛소리야?”
“뽀뽀는 했어?”
“.....”
“손도.... 잡았겠네.”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들이던 영우의 얼굴이 굳었다.
지슈카의 표정에 담긴 우울과 눈빛에 담긴 어둠을 읽은 것이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강한 만큼 당당하고, 당당한 만큼 올곧고, 매일 봐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그녀가 드물게 보여주는 나약한 모습을 기회로 삼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 어떤 중독을 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문득 유라의 얼굴이 떠올라서 인내할 수 있었다.
힘겹게 결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세상 모두에게 사랑 받는 네가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을 건 뭐냐? 이참에 돌이켜봐. 지슈카 네가 나를 좋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종종 힘들 때 내게 도움 받았던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들을 착각해서 내게 집착하는 것뿐이야. 주작궁 때문에 빚진 일을 신경 쓰는 걸 수도 있고.”
“무례하게 말하지 마.”
“....”
“네가 뭔데 내 감정을 재단해? 내 마음을 부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야.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건 네 자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내 마음을 판단하고 부정할 권리는 없다고. 그냥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지 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미안, 내 생각이 짧았다.”
“미안한 거 알았으면 됐어. 어찌됐든 나도 네 마음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그만 껄떡거릴게. 연인 말고 지금처럼 쭉 친구로 지내면 되는 거잖아, 그치?”
“.....”
“아, 오늘은 일찍 가서 쉬어야겠다. 네가 언젠가 미르에게 다시 도전할 때 도움이 될 수 있게끔 공략법은 꾸준히 궁리해볼 테니까 기대하고. 고구마 많이 먹어서 방귀 뀔 수도 있으니까 캡슐 들어갈 때 환기모드 꼭 잊지 마.”
“....응, 그래.”
영우도 지슈카가 좋다.
능력 좋고, 책임감 있고, 밝고, 강하고, 아름답고 멋진 그녀를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애초에 지슈카는 영우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영우를 체다카 길드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좋은 동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영우의 신세는 아그너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우의 마음에 더 크게 자리를 잡은 사람은 지슈카가 아닌 유라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용기 내 고백해준 그녀와 만나 평범하게 걷고, 대화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던 어느 날, 영우는 자신이 그녀에게 커다란 애정을 품게 됐음을 깨닫고 말았다.
지슈카만큼 강하지 않으면서 강한 척 노력하는 그녀를 볼 때면, 지슈카처럼 밝지 않으면서 밝은 척 노력하는 그녀를 볼 때면 더욱 더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진짜로 강해질 수 있게끔, 그녀가 진짜로 밝아질 수 있게끔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지슈카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아니,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녀에게는 나보다 훨씬 더 잘나고 멋진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
애매한 사이를 고집하느니 그녀가 빨리 마음을 정리하게끔 도와주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이다.
진즉부터 알고 있던 일이지만 계속해서 미뤄왔던 이유는 단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을 뿐.
“.....”
마음이 진탕되다가 이내 공허해진다. 지슈카를 만나서 크게 부풀었던 마음이 뭉텅이로 찢겨나간 듯한 감각이다.
괴롭다. 아프다.
어느새 건물을 빠져나가 힘없이 인도를 걷는 지슈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영우는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독주에 의존하고 싶어졌다. 술에 취해 오늘 하루를 통째로 잊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힘든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바쁘게 움직여야했다.
“모쏠인 내가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하는 거냐....”
한참을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있던 영우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움직였다. 늘 그랬듯이 캡슐로 가서 누웠다.
템빨신 그리드가 Satisfy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
미르와의 격전 후.
그리드는 지옥으로 떠났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유라와 짝을 맞춰서 악마들을 사냥하며 성장에 집중했다.
마음 같아서야 대장일에 우선 집중하고 싶었다.
헥세타이의 소검을 직접 사용하며 얻었던 영감과, 미르와 싸우면서 절감한 문제점들을 토대로 새로운 신검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템빨신 그리드의 석상>의 레벨이 앞으로 최소 6개는 더 올라야 만렙 기준 <영웅왕 그리드의 석상>과 비슷한 수준의 손재주 상승 버프를 얻기 때문.
그 전에 아이템 제작을 해봤자 기존보다 못한 결과물을 얻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게다가 브라함의 마법 광물 제련도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당분간은 사냥에 열중하면서 재단 기술의 레벨을 올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어머~ 참 예쁜 속옷이네요~ 우리한테 선물해주려고 만드신 건가요~?”
이정의 수련도구 세트를 무장한 채 바느질 중인 그리드는 불 꺼진 방에서 떡을 썰었다는 옛 현인의 기분을 체험 중이었다. 어렵다. 힘들다. 손끝이야 수십 번이나 찔렸고 바느질도 삐뚤빼뚤 보기 나빴다.
하지만 고생 끝에 하나의 속옷을 만들어낼 때면 재단 기술의 숙련도가 눈에 띄게 늘었다. <미식룡의 바늘>에 붙은 숙련도 2배 상승 옵션과 이정의 수련 도구 세트가 결합해서 만든 시너지였다.
보람 찬 결과를 보고 흐뭇하게 웃던 그리드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걸 미쳤다고 너네한테 주냐.”
서큐버스들에게 하는 말이다.
안 그래도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그녀들에게 이런 속옷을 입혔다간 변태로 오해 받기 십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빨리 스킨 제작자하고 연락이 닿아야할 텐데.’
처음엔 서큐버스들에게 옷을 입히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옷 입기를 워낙 싫어하는 종족이었다. ‘명령’으로 강제로 입힐 수는 있었지만 옷을 입히는 순간부터 의욕을 잃어서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아무래도 가장 현명한 방법은 서큐버스들이 입고 있는 속옷을 속옷이 아닌 다른 의상으로 보이게끔 스킨을 덧씌우는 것 같았다.
“그럼 저 언니한테 주려고 만드신 거에요~?”
“저 언니한텐 이런 거 안 어울릴 거 같은데~? 주인님 취향하고 언니 취향이 너무 다르네~”
서큐버스들이 유라와 속옷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덩달아 속옷의 형태를 확인한 유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드가 급히 설명했다.
“이 속옷은 내 취향을 반영한 게 아니야. 같은 속옷을 만들어도 여러 형태와 종류로 만들어봐야 재단 기술하고 손재주가 빨리 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공교롭게도, 그리드에겐 설명할 시간이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지축이 흔들린다 싶더니 지평선 너머에서 마족 대군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의 군대는 뭐지?
짐짓 놀란 그리드가 눈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머리 3개 달린 코뿔소가 이끄는 전차들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전차 위 마족 사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파팟-!
파파파파파파팟!!
“....!”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는 화살 세례를 목도한 순간, 그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화살이 연사되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
“뒤로 물러나!”
서큐버스들이 피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그리드가 결국 직접 앞으로 나섰다.
연(聯)의 검무를 이용해서 검막을 펼치고 화살들을 쳐냈다.
타앙-!
유라는 저격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쏜 마력의 탄환이 이미 3명의 사수를 쏴 죽였다.
하지만 전차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워낙 많았다.
막말로 수백 대의 전차가 그리드 일행을 향해서 돌진해왔다.
‘위험해 보이는데?’
잠시 지옥을 떠나있는 동안 그리드는 서큐버스들을 지옥에 그대로 남겨뒀었다. 아무래도 그녀들을 데리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큐버스들은 다시 돌아온 그리드를 반겨줬다. 그리드의 예상과 달리 그리드를 배신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이후 함께하면서 공교롭게도 정이 쌓였다.
“엘핀스톤!”
“블러드 필드.”
콰르르르륵!!
사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서큐버스들을 버리는 것이다.
노에, 랜디 등의 펫들을 역소환한 후 유라만 데리고 순보로 자리를 이탈하는 게 가장 피해 없이 전차들의 돌진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언제나 미련한 구석이 있었다.
노에, 랜디, 템빨골, 그리고 뱀파이어들의 힘을 모조리 동원해서 전차들의 돌진에 정면에서 맞섰다.
만약 이 과정에서 죽는 펫이 생긴다면 다시 소환할 때까지 페널티가 생길 테지만 감수했다.
꾸과과과과과과광!!
힘과 힘의 충돌.
삼두 코뿔소들이 이끄는 전차군단과 그리드 군단의 스킬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전장을 뒤흔들었다.
그리드는 바쁘게 움직였다.
적을 약화시키는 블러드 필드를 전개 중인 엘핀스톤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코뿔소들을 채찍질하던 손에 창을 거머쥐고 꽂는 기수들의 공격을 모조리 검으로 쳐내고 노에, 랜디와 협력해서 반격, 사살했다. 템빨골들과 서큐버스들도 한쪽에 뭉쳐서 기수들을 조롱하거나 매혹했다.
전차군단의 진격이 차츰 기세를 잃는 것을 느끼는 그리드였지만, 여유를 찾기엔 부족했다. 전차군단의 무력이 워낙 뛰어났다. 20번대 지옥에서 만나온 마족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
어느새 상처투성이가 된 노에와 랜디가 앓는 소리를 내는 순간이었다.
짝짝짝!!
블러드 필드의 영역 밖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본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박수 치는 악마의 이름 위에 <제10지옥의 부군단장>이라는 칭호가 달려있었다.
‘10지옥?’
20번대 지옥에 왜 10지옥의 악마가 출현한 거지?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악마가 소리쳤다.
“무패왕의 검술을 계승했다더니 과연 훌륭하다! 자! 내 옆에 타라! 지옥을 지배하는 33군주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시는 위대한 군주, 레라지에님께서 성에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레라지에.
무패왕의 일기장에 등장했던 악마다.
기억을 떠올린 그리드가 유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유라는 섣불리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대악마. 그것도 무려 10위 서열의 대악마가 플레이어를 성으로 초대하고 있었으니 히든 퀘스트의 전조는 분명한데,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판단은 당사자 그리드의 몫이었다.
“....좋아, 우선 만나보지.”
10마리의 코뿔소가 이끄는 부군단장의 전차.
요새라고 표현해도 무색한 그 위에 그리드와 유라가 올라탔다. 부군단장은 유라를 탐탁찮게 노려봤지만 딱히 내쫓진 않았다. 반면 서큐버스들은 확실하게 제지했다.
“32지옥의 하층민들은 꺼져라.”
“글런트하고 같이 기다리고 있어.”
“출바아알!!”
서큐버스들을 일별하는 그리드와 유라를 태운 전차가 제10지옥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