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04화
십만대군 봉쇄검이 레라지에의 점액을 베지 못했을 때부터 그리드는 확신했다.
통상의 방법으론 레라지에를 쓰러뜨릴 수 없다.
만약 신장이 발동해주지 않았다면, 그것도 3번이나 연속으로 발동하지 않았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이번 대결에서조차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운이 좋았다.”
그리드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무릇 승자란 여유가 있는 법.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얻은 이상 겸손해서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읏...!”
그리드의 태도가 레라지에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신은 발까지 굴러가며 패배를 부정했건만, 저자는 이겨놓고도 요행 덕분이었다며 겸손하게 구는 것이다.
완벽한 패배다.
역시나.
현장의 악마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라지에게 보냈던 선망의 눈길에 불신이 가득 담겨있었다. 어떤 놈은 조소마저 띄웠다.
‘분하도다...! 분하도다!!’
콰자작!!
레라지에가 옥좌의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을 싣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팔걸이가 처참하게 부서진다 싶더니 흙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이다.
그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화냐?’
그리드는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대장장이다. 저 붉은 옥좌의 재질이 무엇인지 첫눈에 알아봤다.
블러드스톤.
지옥 최강의 광물이다.
블러드스톤을 세공해서 만든 저 붉은 옥좌는, 적어도 내구력만큼은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데 단순히 악력으로 부수고, 가루로 만들다니....
저런 힘에 기술을 실어서 휘두른다면 감당이 될까 싶다.
‘살레오스의 힘을 쓰지 않는 이상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건 자살행위일 것 같은데?’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
그게 말이 되나?
황당해서 혀를 내두르던 그리드가 문득, 흙가루 너머로 옅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아....’
무엇인가를 깨달은 그리드의 시선이 부서진 팔걸이에 고정됐다.
단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악력에 깨지고, 부서진 게 아니라 어떤 산성(酸性)에 의해서 부식된 흔적이었다.
‘그런 거였군.’
물리력을 반감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닿는 물질을 녹이는 점액.
여러모로 위험한 레라지에의 권능은 정말이지 강력했다.
스카캉.
마침 아이템 합체의 지속 시간이 끝나며 열망의 무아검과 염룡검이 분리됐다.
내구력이 무한인 염룡검은 멀쩡한 반면 열망의 무아검은 날이 크게 상해있었다.
‘격수가 레라지에를 레이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겠어.’
하지만 브라함이 있으면 의외로 쉽게 레이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열 10위의 대악마라는 건 분명히 대단한 존재이지만, 반신인 미르처럼 무결에 가까울 순 없다.
물리력에 저만큼 강한 이상 반동으로 마법에 약할 확률이 높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그때, 레라지에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약해졌어.’
일천 년 동안 쌓아온 투쟁의 역사에 두 번 연속의 패배가 오점으로 남았다.
격이 떨어졌고, 떨어진 격에 비례해서 권능이 약해졌다.
잿더미로 만들 심산이었던 팔걸이가 형상을 유지하고 있음이 증거다.
‘죽일까?’
레라지에의 커다란 눈동자에 살의가 번들거렸다.
수천의 악마와 데빌 슬레이어.
오늘의 사건을 목도한 저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다면, 잃은 격을 어느 정도 복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겁한 자여!!”
레라지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부군단장 칼바바와 그의 부하들 때문이었다.
“네놈! 무패왕의 스승이여!! 비겁하게 힘을 숨기고 무패왕의 후예인 척하여 불공정한 승부를 진행하다니!! 인간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더냐!! 너희들 인간이 평소에 울부짖는 도덕과 윤리의식을 너는 도대체 어디다가 갖다 버린 것이냐!!”
칼바바가 그리드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충성심을 이유로 레라지에를 변호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사실 그야말로 이 자리의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있었다.
레라지에가 굳이 불리한 대결을 진행했던 이유는 그리드의 실력을 무패왕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했기 때문.
실제론 무패왕 이상의 실력자였으면서 진실을 속이고 대결에 응한 그리드의 음흉함과 비겁함은 인간들이 말하는 도덕적 관념에서 봤을 때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지옥이라는 점에 있었다.
보통의 악마들에겐 도덕이란 개념이 없다.
“꼬리 내린 주인을 변호하겠답시고 억지를 쓰다니, 10지옥도 한 물 갔군.”
“패배자 집단. 쿡쿡쿡.”
이번 이벤트를 대비해서 레라지에가 초대했던 악마들.
새로운 승리의 목격자가 되어 레라지에의 명성을 높이는데 일조했어야할 놈들이 도리어 그리드의 편을 들었다.
놈들은 승자독식에 집착하는 악마답게 오직 결과에만 주목했다.
속내야 어찌됐든 레라지에는 결국 패배하지 않았는가.
상대의 비겁한 수작에 넘어간 것도 무능의 발로일 뿐이다.
“이놈들! 할 말이 있으면 앞에 나와서 당당히 지껄여라! 단,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
“....!”
악마들의 수군거림을 참지 못한 칼바바가 포효하며 살기를 폭발시키자 악마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의 등골 또한 오싹해졌다.
괜히 10위 대악마의 측근이 아니라는 건가.
서열이 없음에도 기세가 굉장하다.
‘여태껏 싸웠던 대악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
물론 어디까지나 ‘인계에서의 대악마’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찌됐든 대단한 실력자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바알의 권속 중 말단에 속했던 안드라스보단 한 수 위였다.
힐끗, 그리드가 뒤에 선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예상대로 잔뜩 굳어있었다.
지옥 전체를 정화해야한다는 의무를 지닌 그녀 입장에선 강력한 악마가 새로이 출현할수록 위축될 수밖에.
‘걱정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리드가 유라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더 깊이 신경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지옥을 직접 체험해봤기 때문이다.
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세계에서 혼자 싸워온, 앞으로도 혼자 싸워나갈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녀가 그리드는 안타깝고 걱정이었다.
현실도, 게임도 유라에게만 유독 가혹한 것 같아 자신이라도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어쩌면 그 생각이 그녀를 향한 마음을 키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을 수도 있다.
“아무도 앞에 나서지 못하는 거냐!! 하찮은 겁쟁이들 따위가 대결의 본질을 왜곡하고 10지옥을 한 물 갔다고 운운하다니, 마치 저 인간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쓰레기들이군!!”
악마들에게 한바탕 호통을 친 칼바바의 분노와 살의가 다시금 그리드에게 향했다.
어지간히 화가 난 눈치다.
레라지에마냥 대결이라도 신청할 분위기였다.
‘여기서 계속 싸워봤자 좋을 게 없어.’
그리드는 빠르게 판단했다.
이곳이 적진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칼바바와 대적이라도 했다간 놈이 통솔하는 전차군단과 사투를 벌여야할 터.
레라지에는 그리드를 헤치지 않을 거라는 ‘약속’에 얽매여 나서지 못할 테지만, 10지옥의 악마들을 그리드와 유라 둘이서 감당한다는 건 결단코 불가능하다. 매우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다.
“우선.... 패왕 레라지에의 실력에 경의를 표한다.”
여태껏 그리드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진행하고 해결해왔다.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상황을 고려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전개를 도출하는데 익숙했다.
사람 하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다.
“이봐 칼바바, 너의 주인은 지옥 으뜸의 군주답게 과연 강했다. 공정한 대결이었다면 내가 필패했겠지. 그래서 내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대결의 내용을 확인하고도 비겁하게 응했던 거고. 그래, 나는 내가 비겁했음을 인정한다.”
“.....”
“네 주인이 잠자코 있는 모습을 봐라. 네 주인은 강자답게 이미 나라는 약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자비를 베풀 생각인 것 같다만? 너 또한 주인의 입장을 헤아려서 이 이상의 소란은 자제하는 게 옳지 않겠냐?”
“....!”
“....!”
칼바바와 전차군단을 비롯한 장내의 모든 악마들이 크게 술렁였다.
앞서 말했듯이 악마들은 승자독식에 집착한다.
승자만이 모든 것을 거머쥐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지옥 사회의 통상적인 논리였다.
한데 승자인 그리드가 스스로를 약자라고 칭하며 패배자를 추켜세웠으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던 레라지에의 입 꼬리는 어느새 쌜룩거리고 있었다.
“흠흠, 칼바바여.”
레라지에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할 말을 잃고 있는 칼바바에게 말했다.
“무패왕의 스승이 하는 말은 사실이니라. 나는 저자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저자는 분명 굉장히 강하지만 지옥 으뜸의 군주인 이 몸과 비교하면 덧없는 약자. 비겁하게 정체를 숨기고 대결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패왕 레라지에는 강자답게 자비를 베풀어 저자를 용서할 것이니라.”
“으음....!”
10지옥의 악마들은 보통의 악마들과 사뭇 다르다.
싸우고, 이겨서 힘을 증명한다.
그 단순한, 단순하기에 정정당당한 증명을 실천해온 레라지에는 다른 악마들과 달리 무도(武道)를 알았고 그녀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것이다.
“주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희 또한 저자의 비겁함을 용서하겠나이다!!”
“용서하겠나이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레라지에의 성.
그 성 곳곳에 자리 잡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레라지에의 권속들이 일제히 복명복창했다.
저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단 사실도 모른 채 레라지에를 비웃었던 악마들의 표정은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흐흠, 따라오너라. 내가 너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강하다곤 하나 어찌됐든 대결에서는 졌으니 약속했던 선물을 주겠느니라.”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드를 인도하는 레라지에의 표정이 밝다.
악마들 주제에 뭘 자꾸 비겁을 운운하는 건지....
그리드는 레라지에 패거리의 취급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도착한 보물창고에서 어떤 물건을 발견하고 사로잡혔다.
금은보화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블러드스톤, 푸른 불꽃을 갈기처럼 흩날리는 지옥의 명마, 그 유명한 제파르가 애용했다던 마검 등등.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재치고 그리드의 시선을 사로잡은 물건은 낡고 얇은 한 권의 책이었다.
번헨 열도 전기.
레라지에가 번헨 열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엮은 책이다.
“하고많은 보물 중에 왜 하필 그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냐? 그, 그건 이 몸의 일기장인데....”
위인전으로 출판하려다가 무패왕을 만나고 내용이 꼬여서 부끄러워 봉인한 것이건만....
레라지에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난처해했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고 책을 펼쳤다.
[레라지에에게 받을 선물로 <번헨 열도 전기>를 선택하였습니다.]
2개뿐인 보상 중 하나를 고작 낡은 일기장으로 고르다니.
타인은 그리드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책의 가치를 이미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과연.’
번헨 열도 전기에는 마드라의 검술을 목격했던 레라지에의 감상들이 적혀있었다.
데스나이트로 존재하며 점차 이성을 잃었던 마드라의 일기장엔 많은 내용이 생략됐던 반면 레라지에의 기록은 상세하고 빼곡했다.
사십만대적검의 편린을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 32지옥에서는....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리드!!”
괜히 레라지에와 가까운 곳에 있다가 십만대군 학살검에 베여 죽었던 로제가 부활 포인트에서 살아나 절규하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몇 번이나 내 발목을 붙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건데엣!!”
분을 이기지 못해 꽥꽥 소리치는 로제의 비명이 곳곳에 숨죽이고 있던 악마들의 이목을 끈다.
주인 잃은 32지옥.
공석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악마들의 경쟁은 매일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괜한 소란을 피워 악마들의 이목을 끈 로제의 앞길에 암운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