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7권 - 20화
“...”
사막을 뒤덮었던 얼음이 녹고 불꽃이 소멸할 때까지.
미르는 못 박힌 것처럼 떠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죽음, 그리고 공포.
예상치 못했던, 그러므로 대비하지 못했던 개념과 감정.
그것에 육체와 정신이 옥죄여졌던 경험을 그는 몇 번이고 되새기는 중이었다.
신들의 시선을 염려하느라 잠시 정신이 분산 된 순간.
몸이 두 동강 날 정도의 검격을 허용하고 느꼈던 당혹.
그 낯선 감정은 미르의 이성을 좀먹었고 미르는 자신의 본성을 체험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미쳐 날뛸 뿐이었던 그 순간의 자신은 단지 삶에 집착할 뿐인 가녀린 존재였다.
“하하...”
돌이켜 본다.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겨왔다. 양반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니 당연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늘 무언가를 베풀어왔다. 저들이 나보다 못하니 내가 감싸줘야 한다고 믿었었다.
정작 벌거벗겨졌을 때는 결국 나 또한 특별할 게 없는 보통의 사람이었거늘.
“부끄러운가?”
짤랑.
아련한 방울 소리와 함께 무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는 그에게 정중히 고개 숙인 미르가 대답했다.
“아니요, 기쁩니다.”
오직 한울에게 바쳐지기 위해 만들어진 목숨이다. 설령 잃게 될지언정 미련 따위 없을 줄 알았다. 다만 무신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고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비록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삶일지언정 나는 그 삶에 집착하고 있다. 나 또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평범한 이들을 감싸주고 보듬어왔다.
나의 선의와 배려는 강자의 오만이 아니었던 거다.
나는 단지 타인의 아픔에 공감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주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신이 될 자가 갖춰야 할 자격.
“그런가.”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미르의 모습이 치우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미르가 미약하나마 신살의 가능성을 품었음을, 그는 눈치 챘다.
짤랑.
방울 소리를 남기고 떠나는 치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르는 생각했다.
환국의 신들이 끝까지 이변을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는, 치우의 호의가 아니었을까.
***
십이지들의 숲.
가야로 떠나기 전, 그리드가 부활 포인트로 지정해뒀던 장소다.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벤토리 확인이었다.
소실한 아이템 목록과 장비 아이템들의 내구력을 점검했다.
‘방패 두 개 부서지고 칼 하나 떨어뜨렸네.’
아깝긴 하지만 수십 개의 보조무기 중 3개일 뿐이다.
신검을 안 떨군 게 어디냐...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혹시 뭐 떨구진 않았지?
-백호검.
-뭐? 지, 진짜?
-농담이다.
-...아니 대체 무슨 컨셉이야?
본래 크라우젤은 유머러스한 면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어머니께서 찾는다는 둥, 밥 먹을 시간이라는 둥(그 모든 게 사실이었지만).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들떠있는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크라우젤은 무쌍검법을 배우지 않고도 검성의 자격을 증명했다.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나 ‘전설의 대장장이 기술’을 봉인한 채 파그마의 후예라고 인정받은 꼴이다.
그리드였으면 절대 그렇게 못했다.
그리드뿐만 아니라 크라우젤이 아니고선 누구도 이루지 못했을 업적이다.
극한의 이득을 노릴 줄 아는 노가다의 제왕.
노말 클래스로 랭킹 1위를 찍었던 게 충분히 납득 된다.
그리드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에도 크라우젤의 귓속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의견을 나누며 조금 전 전투를 복기했다.
서로의 실수와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보완할 방법을 함께 강구했다. 천금보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복기가 끝날 때쯤엔 미르가 바알과 동격이라는 결론을 내놓기도 했다.
미르가 바알과 동격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압도적인 패배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본인들의 실력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전대 전설들의 전성기에 근접하거나 이미 뛰어넘은 상태고 크라우젤도 크게 손색이 있진 않았다.
한데 미르와 싸워서 이기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물론 바알이 미르보다 강할 확률이 높지만 동급으로 묶어도 무리가 없었다.
-그럼 대천사장도 바알급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알기로 미르는 리파엘과 대적하게끔 만들어진 존재니까.
-쩝...
그리드는 리파엘을 만나보지 못했다. 게다가 천사와 관련 된 구전은 매우 희귀한 것이라 정보가 부족했다.
헥세타이아를 구출하려면 리파엘과 대천사들이 이끄는 천사군단을 돌파해야 할 텐데 리파엘이 미르처럼 강할 거라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크라우젤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너무 걱정할 필욘 없을 것 같다. 네겐 바알이나 리파엘보다 미르가 더 까다로운 상대일 확률이 높거든. 설령 그 둘의 스팩이 미르보다 높다고 해도 그 둘에겐 사방신의 힘이 없고 신성과 마기라는 명확한 상성이 존재하니까.
-확실히...
그리드가 공감했다.
미르가 까다로운 이유는 높은 스팩도, 모든 무술에 통달했다는 점도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서 완벽하게 정제하고 통제하게 된 사방신의 힘.
그리드가 템빨로 구사하는 사방신의 힘과 비교해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는 그것이야말로 미르의 가장 큰 무기였다.
만약 순수하게 ‘주작의 힘’만 겨룬다면 그리드도 비벼볼 수 있겠지만 미르는 사방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배합해 다양한 효과와 속성을 일으킬 줄 안다. 미르는 그리드가 품은 주작의 심장조차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상성 자체가 최악인 셈이다.
반면 바알이나 리파엘은 경우가 달랐다. 오히려 그리드가 상성적인 우위를 점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드가 ‘성검’과 ‘마검’을 만들면 된다.
바알과 리파엘은 그리드의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치명상을 입을 것이었다.
낙월검에 베인 미르의 몸이 두 동강 났듯이.
‘성검과 마검도 지속력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고작 한 번 휘두르는 걸로 끝은 아닐 테니 낙월검보단 백배 천배 낫겠지. 성속성 방어구하고 마속성 방어구를 몸에 도배하면 입는 데미지를 최대한 경감시킬 수 있을 테고.’
다만 문제는...
성스러운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선 레베카교에, 사악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선 야탄교에 도움을 요청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리드 혼자서 성속성 광물이나 마속성 광물을 이용해서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걸 진정한 성검, 혹은 마검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성속성 축복은 세희한테 맡기면 되겠지만 문제는 마속성이군.’
지난 몇 년 동안 세희는 엄청나게 노력했다.
뱀파이어의 도시 상위 구간에서 한계를 느낀 뒤부터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다.
접속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오직 사냥과 전직 퀘스트에만 열중했다. 자원봉사나 방송출연 등 대외활동을 겸하면서 말이다.
다만 문제는 성녀라는 직업의 특성상 솔로 플레이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해선 예림이와 함께 최소 2인 이상의 파티를 유지해야했고, 사냥터도 언데드나 마족이 있는 곳으로 골라야했기 때문에 사냥 효율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세희의 게임 재능이 천재적이지도 않았다. 치료나 버프 타이밍을 보면 필시 드문 재능을 갖추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수재 수준에 그쳤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거긴 해서 하이랭커의 끝자락 정도엔 닿을 만큼 레벨을 올리긴 했다.
빠른 시일 내로 400레벨을 찍어주길 바랄뿐이다.
‘4차 각성하고 나면 영구적인 신성력을 부여해주는 축복 관련 스탯도 강해질 테니... 아마도 성검 제작은 문제가 없어.’
비록 레베카교의 성검과 비교하면 수준이 낮을지 몰라도 대악마에겐 꽤 치명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속성을 부여해줄 저주는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마검 제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체인 야탄교는... 그리드와 템빨국을 주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리드가 야탄의 종 학살자니까 당연했다.
‘마안족한텐 그쪽 방면 기술이 없으려나.’
안 그래도 마안족 왕을 만날 생각이었다.
한 번 만날 때마다 진이 빠져서 한동안 좀 피했으니 얼굴 도장을 찍어놓을 시기였다.
“덕신님~!”
“템빨신이라고.”
그리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달려오는 청호와 십이지들.
마안족 왕과 만나기에 앞서 각오를 다지던 그리드가 녀석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자 웃고 말았다.
***
“왕비...?”
크라우젤은 가야에 남을 거라고 했다.
홀로 서대륙으로 돌아온 그리드는 라인하르트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
얍, 얍.
정원에서 낯선 기합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아이린이 검술을 연습 중이었다.
“돌아오셨군요!”
그리드가 동대륙에서 쌓아올린 노력을 빛나게 하는 존재.
신혼시절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젊어진 아이린이 밝게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이가 들었을 때의 그녀가 아름답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그리드의 눈에 비치는 아이린은 언제나 보석보다 빛났다.
“전하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기뻐요.”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와 두 눈을 마주하고, 숨결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한쪽 손으로 드레스의 끝자락을 집어 올린 아이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달려오고 싶었던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가 끝내 달리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다른 한쪽 손에 목검이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목검을 내려뒀다면 양쪽 손으로 드레스를 집어 올리고 달려올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검(劍)을 존중했기에.
그녀는 검사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화와 행복의 근원을 알고 있다.
병사들과, 기사들과, 그리드 모두가 검을 휘둘러서 쟁취한 평화.
늘 아이린의 곁을 지키는 이들도 검을 패용한 기사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린은 검을 단순한 도구 취급하지 않고 존중했다. 함부로 내팽개치지 못했다.
그녀의 깊은 속내를 어렴풋이 읽어낸 그리드의 가슴이 크게 떨렸다. 아이린에게 처음 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오늘 그는 아이린에게 156번째 반하고 말았다.
‘마안족 왕은 내일 만나야겠군.’
미소 지은 그리드가 아이린의 등 뒤에 섰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품에 안고 여린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기립하고 있는 로이먼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왕비의 스승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어.”
수석기사 로이먼이 작게 웃었다.
“저의 작은 재주로는 왕비 전하의 빛나는 재능을 감당하지 못하던 차였습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집중적으로 교육 받은 로이먼.
그녀의 실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리드와 비교하면 아직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다.
“자, 아이린. 두 발은 이렇게. 시선과 어깨는 이쪽으로.”
“이건... 전하의 검술이 아닌 것 같은데요?”
“...!”
아이린의 작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를 교정해주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자세를 잡고 검의 길(검로)을 열기 직전.
아이린이 너무나도 예리한 질문을 던져온 까닭이다.
과연 스테임 백작의 핏줄이라는 건가?
아니면 신격 덕분일까.
혹은 그녀가 나를 늘 지켜봐왔다는 증명일까...
자신도 모르게 아이린의 뺨에 입을 맞춘 그리드가 설명했다.
“맞소. 이건 나의 검술이 아니오.”
“저는 전하의 검술을 배우고 싶은 걸요.”
“하하, 하지만 내 검술은 다인(多人)을 상대하는데 특화되어있으니 그대에겐 어울리지 않소.”
아이린의 곁에는 늘 최고의 기사들이 호위로 붙는다.
만에 하나 그녀가 검을 쥐어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 그녀가 마주하게 될 적은 한 명이거나 두 명일 거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사사하고 그리드의 템빨을 등에 업은 템빨국 최고의 기사들은 설령 천 명의 적이 아이린을 습격할지언정 모조리 참살할 테니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두 명 흘리는 게 고작일 터다.
그렇기에.
“그대에게 적합한 최고의 검술은 바로 이것이오.”
그리드는 검성의 검술을. 아니, 크라우젤의 검술을 아이린에게 가르쳐주었다.
미르와 싸울 때 보았던 크라우젤의 검술이야말로 단기접전에 최적화 된 것이었으니.
물론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크라우젤이 그리드의 검무의 동작을 고스란히 따라한다고 해서 그리드의 검무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듯, 그리드가 크라우젤의 검술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설령 무쌍심법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형태만 갖춰도 약간은 위력을 발휘하는 게 바로 크라우젤의 검술이었다.
그의 검술이야말로 극한이고 이상(理想)이었기에.
“얍...!”
[당신의 부인 ‘아이린’이 <초급 소드 마스터리>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곧잘 따라하는 아이린의 모습이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리드로 하여금 ‘이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열망과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지게끔 만드는 존재.
바로 아이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