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2화
“허... 오우야...! 흡! 퍽킹!!”
처절하게 해부되고 분절하는 레이더스의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지발이 신음을 연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탄식이 아닌 감탄으로 화했다.
레이더스가 강화됐다거나 하는, ‘그리드가 약속했던’ 변화를 맞이해서가 아니다.
레이더스는 절반 정도 분해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발은 개의치 않았다. 만에 하나 레이더스가 잘못 되면 어쩌나... 그런 걱정과 불안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지발은 어느새 레이더스가 아닌 그리드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장 14시간.
무려 하루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지발은 감동하고, 전율했다.
단 1분 아니, 단 1초조차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오직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리드의 모습에서 낯선 충격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레이더스를 분해하는 한편 다음 아이템을 어떻게 개조할지 궁리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그러다가 궁리가 끝나면 다시 개조하고.
템빨골과 갓 핸드가 만든 아이템을 검수하는 한편 옆에서 은근슬쩍 조언을 구하는 드워프에게 성실하게 답변하고, 그러면서 또 레이더스를 분해하고, 다시 궁리하고, 만들고, 개조하고...
그리드는 도중에 찾아온 라우엘의 보고를 듣고 논의함에 있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다준 아이린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도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불쑥 나타나 투정을 부리는 해츨링에게 휘둘리지 않고 명경지수를 유지했다.
체력이 떨어져서 템빨콘을 소환할 때조차 마음을 놓지 않고 용광로를 살폈다.
그건 이미 플레이어의 태도가 아니었다.
플레이어의 본질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있건만, 종종 느슨해질 법도 하건만, 그리드는 항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일’을 했다.
지발 또한 한때 지존을 노렸던 사람답게 노력, 끈기, 노가다 같은 개념에 이골이 나있었지만... 그리드 앞에선 감히 논할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 ‘이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다.’
그러므로 아무도 저 녀석을 이기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이길 수 없었다.
깨달으며 재차 전율하던 지발이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자는 뭐지?’
삐까소.
아이디부터 대충 지은 티가 팍팍 나는, 그러므로 괴팍한 성정이 엿보이는 화가 랭킹 1위가 언젠가부터 곁에 다가와 앉아 있었다.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며 화폭을 채워나가는 그 작은 여자를 멀뚱멀뚱 쳐다본 지발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쪽 지금 뭐하는 거지?”
“그림 그리는데요.”
“그리드의 초상화 같은데?”
“운 좋게도 좋은 붓과 물감을 구해서요.”
삐까소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였다.
지발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왜 그리드의 초상화를 그리는 건데?”
안 그래도 길드에 웬 화가가 있나 싶었는데 사생팬이었나?
오직 팬심 하나로 템빨단에 가입하고 멋대로 사심을 충족하는 중인 건가?
“평범한 사람은... 설명해드려도 잘 모를 거예요.”
삐까소는 말재주가 부족했다. 딱히 대화를 즐기지도 않았다.
지존도의 개념을 설명하기엔 복잡했고, 귀찮았다. 그래서 대화 도중에 일방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예술가 특유의 기질일 것이다. 자칫 타인에게 오해를 사기 쉬운.
“어. 평범? 내가?”
지발이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평범하단 말은 또 처음 들어봤기에 조금 얼떨떨했다.
“그쪽... 혹시 내가 누군지 모는 건가?”
길드 마스터에서 물러나 제국에 투신했을 때부터 지발은 이미 명예를 내려놓았다. 지크프렉터를 따랐던 시점부턴 과시욕이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무명소졸 취급을 받는 건 마음가짐과 별개의 문제였다.
이 어린 여자가 게임을 한참 늦게 시작했나 보다고, 그래서 1세대 플레이어의 전설 중 하나인 자신을 몰라보나 보다고, 지발은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 받고 싶었다.
하지만 삐까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정말로 귀찮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화폭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온통 그리드가 채우고 있었고,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붓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무리 좋은 도구를 써도, 제아무리 긴 시간을 들여도 성공 확률이 고작 2퍼센트 미만인 지존도를 이번에야말로 ‘갱신’하기 위해. 템빨단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에 그녀는 집착했다.
“거참 재밌군...”
졸지에 무시당한 지발이 실소했다.
처음엔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그래, 나는 평범하다.
그리드가 지크프렉터를 거둬들인 뒤부터 평범해졌다.
지크프렉터를 수행하며 ‘칠악성’이라는 세계관의 심연에 다가서고, 심연에 가까워질수록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렸지만.
그리드가 그 책임을 대신 짊어져준 덕분에 자신은 해방 될 수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템빨단에 가입한 뒤로 근심걱정이 싹 사라졌다.
최근 너무 편했다.
아무 걱정 없이 지냈다.
...부끄러워졌다.
내가 내려놓은 책임이 그리드의 어깨를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리드 너는... 괜찮은 거냐?”
따앙! 따앙! 따앙!!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해 보였던 대장간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용광로가 품은 불길.
결코 꺼지지 않은 채 타오르는 그것이 그리드를 과격하게 채찍질하는 듯했다.
모루 위에 놓인 금속.
점차 단단하게 단련되는 그것이 그리드가 짊어진 이들의 삶과 목숨으로 와 닿았다.
불길의 열기를 감내하고 앉아 묵묵히 망치를 휘두르는 그리드의 모습이 문득 고독하고 가엽다고 느껴졌다.
한시도 쉬지 못하는 그의 양쪽 어깨가 태산처럼 무거운 책임에 짓눌려 있음을 엿봤다.
“...빌어먹을.”
이 낯 뜨거운 감상은 뭐란 말이냐.
어린 화가의 생뚱맞은 한 마디 때문에 별에 별 생각을 다하게 됐다.
문득 품은 상념에 놀란 지발이 욕설을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어색한 감수성을 불어넣은 삐까소를 찌릿 노려봐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지존의 자존심이 있지.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어.”
“전 지존...? 아저씨가요? 2위였던 거로 아는데.”
“나 아네.”
혼잣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반응하는 삐까소에게 콧방귀로 화답해준 지발이 대장간을 떠났다.
‘그리드, 너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하진 않겠다.’
인마대전.
전례 없이 큰 전쟁이 될 거라고 하였다.
우선 그때부터 도움이 되리라.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발악하고, 눈곱만큼이라도 더 강해져서, 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책임을 내가 나누겠다.
어디 한 번 미국인의 긍지를 느껴보아라.
“그랜드마스터! 그만 자고 일어나십시오!! 사냥 갑시다! 어서!”
...레이더스도 없는 마당에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선 버스가 필요했다.
***
일주일이 지났다.
지옥 탐사대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탐사가 진행되는 걸 보면 유라가 어지간히 잘 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그리드는 14개의 아이템을 추가로 개변시켰다. 총 17개의 아이템을 개변한 것이며, 개변시킨 아이템 중에는 지발의 레이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더스의 이해도를 100퍼센트까지 올린 것이다.
그리드는 <마장기:레이더스의 제작법>뿐만 아니라 개변시킨 레이더스의 제작법까지 손에 넣었다. “흠.”
브라함과 함께 적해 한가운데로 날아온 그리드가 하나의 갓 핸드를 지정해서 스킬을 사용했다.
쿠구구구구...!
부피를 크게 키운 갓 핸드가 형태를 갖춰나갈수록 바다가 높이 솟구쳤다.
번쩍!
거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황금색 안광이 그리드를 마주본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살을 투영하지 않고 집어삼키는 무광의 묵색 거인. 그리드의 눈앞에 떠오른 채 명령을 기다리는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장기 레이더스였다.
<아이템 변신>이 손쉽게 현현시킨 것이다.
‘과연.’
그리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만족감보다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중요한 실험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굳이 브라함에게 부탁해 적해까지 날아온 이유는...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의 잠재력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가늠해보고 싶어서였다.
스윽.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탐욕 한 덩어리를 꺼냈다.
정확히 1분 후.
이것은 2배의 질량으로 증식할 것이다.
이 크기에서 2배로 증식하는 순간 광룡의 기운이 위험수치에 도달할 것이며 탑의 결사들이 즉각 반응할 테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내가 실수로 질량을 잘못 계산했다면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드래곤이 나타날 수도 있다.’
두렵지만.
그리드는 잠자코 기다렸다.
원래라면 ‘10일에 한 번 2배로 증식한다.’는 특성의 쿨타임이 돌아오기 전에 반으로 쪼개버렸을 탐욕을, 고스란히 방치했다.
곧.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을 때.
콰지직!!
탐욕의 부피와 무게가 2배로 늘어났다.
한데...
“...”
...아무 일도 없었다.
시스템이 조용했다.
탑의 결사가 찾아올 거라는 소식도, 드래곤이 출현할 거라는 경고도 전달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됐...다...”
그리드의 얼굴에서 드디어 그늘이 걷혔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이 신화급 스킬이라고 확신한 이후 세웠던 가설.
‘이 기술이 광물까지 완전하게 통제하지 않을까.’했던 가설이 사실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실현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그리드가 쓸 수 있는 스킬 중엔 <광물 강화>와 <광물 창조>가 있었으니까.
전설의 대장장이란 광물에 통달한 존재라는 뜻이다.
하물며 신화급 대장장이가 고작 광물 하나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게 도리어 웃기는 일이었다.
탐욕에 담긴 광룡의 기운이 아무리 대단하고 사악할지언정 결국 광룡이 남긴 ‘잔재’에 불과하지 않나.
신격을 갖춘 대장장이가 그것을 ‘결함’이라고 인지하는 이상 개선되는 게 옳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앞으론 눈치 보지 않고 탐욕을 증식시킨다.’
인마대전을 앞둔 어느 날.
라우엘이 예측했던 대로 플레이어 세력이 크게 3개로 분열되기 시작한 그날.
탐욕의 유일한 단점이 사라졌다.
혼돈의 이능 <증식>은 유지하되 드래곤을 자극하는 <광기>는 흩어져 소멸했다.
신을 상징하는 광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
주인과 함께 성장해온 광물이었다.
“됐다아아아아아!!!”
그리드의 환호가 높은 파도에 부딪쳐 흩어진다.
하지만 세계에 분명히 각인 됐다.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부르짖는 그의 외침을, 환희를 브라함이 지켜보고 있었다.
‘너야말로 역대 전설 중 최강이다.’
지공의 공인은 그 누구도 부정 못하리.
브라함의 드문 미소가 파도에 가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