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78화 (1,368/1,794)

템빨 69권 - 11화

레베카교는 그리드에게 부채 의식이 있다.

그는 타락한 교황에게 신벌을 내린 여신의 대행자이자 성검의 봉인을 푼 용사였다. 레베카의 딸들의 목숨을 살렸으며 위기에 빠진 교황청을 구한 전력도 있다.

만약 그리드가 없었다면 본교는 진즉에 쇠락했을 거라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인지했다.

하지만 그리드를 대놓고 은인으로 섬기진 못했다. 그가 교리에 어긋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신을 참칭했다.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 심지어 교황 데미안과 다수의 원로들, 그리고 레베카의 딸들을 빼앗아갔다...

레베카교는 큰 혼란을 겪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오직 교리로 움직이는 일부 교인들은 그리드를 즉각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은원과 도리를 교리만큼 중시하는 일부 교인들은 어찌 감히 은혜를 잊고 그리드를 해치냐며 반박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고가 가능한 대부분의 교인들은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리드의 처분을 논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드를 해쳐야한다는 쪽도, 해치면 안 된다는 쪽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한 질문이었다. 의문에 본질이 담겼기 때문이다.

레베카교에겐 그리드를 해칠 힘이 없었다. 도미니언교, 쥬다르교와 협력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힘이 없다는 건 매우 좋은 명분이었다.

레베카교는 사태를 관망했다. 그리드에게 노골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힘이 없다는 핑계로, 다만 유감을 표하는 게 고작이었다.

상당수의 교인은 속으로나마 그리드를 응원했다. 대천사 사리엘 사건을 계기로 레베카에게 의심을 품은 교인들이었다.

교단의 핵심 인물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신을 배신했겠는가?

몇몇 고위 사제들은 데미안이 간악한 마음을 품은 탓에 천사에게 징벌당한 것이며 본교를 떠난 게 아니라 추방당한 거라고 못 박았고, 데미안과 함께 떠난 원로들과 레베카의 딸들은 재물에 눈이 멀어 타락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저급한 선동에 불과했다.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교인은 많지 않았다.

데미안이 교황으로 지내는 동안 보여준 진실 된 신앙과 선행을, 교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교인들의 의심과 혼란이 깊어져가던 어느 날이었다.

임시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

-그가 당신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맑은 하늘로부터 여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음에 품은 의심과는 별개로 감격하게 되는 신성한 목소리였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따스하여 의지하고 싶어졌다. 아아, 우리가 어째서 잠시나마 저분을 의심했을까? 교인들은 자신이 섣불렀다고 참회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들의 눈앞에 빛이 내렸다.

미녀인지 미남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금발의 존재가 빛에 비추었다.

자신을 새로운 여신의 대행자라고 소개한 그가 자연히 교황이 되었다.

여신의 음성처럼 따스한 사람이었다. 2대 교황 크레이슐러의 재림이라는 표현이 손색없을 만큼 유능하기도 했다.

교인들은 점차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잃어가던 신앙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교황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다.

“마인이 나타난 이유가 템빨국과 템빨신교 탓이라니요?”

마인은 상징물이 건제한 마을과 도시에서도 발생했다.

또한, 템빨국과 템빨신교가 철거한 상징물들은 대부분 무신 제라툴과 관련 된 것이었다.

물론 다른 신들의 상징물도 훼손하긴 했지만, 최소한 레베카 여신의 상징물만큼은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나름의 선을 지킨 것이다. 레베카 여신의 상징물이 있는 곳에서도 마인이 출몰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의 상징물이 철거된 마을과 도시에서 마인이 발생했다는 교황의 주장은 명백히 틀린 것이었다.

“템빨신교는 교황성하의 왜곡 된 주장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말씀을 정정하셔야...”

흘러가는 상황이 심각해졌다.

교황의 주장에 선동 당한 교인들이 민간을 현혹하고 있다. 여파가 실시간으로 체감 될 정도다. 한동안 끊겼던 사람들의 발길이 삼신교의 신전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템빨국이 템빨신을 숭배하고 템빨신교를 세운 이후.

레베카교와 템빨국은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줄타기가 끝나게 생겼다. 여파가 클 것이다. 두려울 지경이었다.

우려를 쏟아내는 원로들을 쭉 훑어 본 교황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템빨신교의 교인입니까? 어째서 본교의 원로이신 당신들이 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겁니까?”

“이건 감정적으로 대할 문제가 아닙니다. 템빨국이 본교에 적대감을 품게 되는 순간 본교는 여러모로 불편해질 겁니다.”

당장 교황청만 해도 템빨국 영내에 위치한다.

템빨국이 존재하기 전부터 교황청은 이곳에 존재했고, 법적으론 독립 된 영토로 인정받고 있다지만,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에트날 왕조 시절에 규정 된 것이다.

템빨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기존의 법을 철폐하고 교황청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물론 교황청이야 타국에 새롭게 세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쫓겨나는 형태가 되면 제대로 망신을 당하는 꼴이었다.

교황청을 수용할 나라가 과연 몇 개나 될지도 솔직히 의문이었다. 현재 템빨국의 입김은 대륙 어디에나 닿을 정도이니.

“더욱이 지금은 악마들이 태동하는 시기가 아닙니까. 공통의 적을 앞두고 굳이 적을 늘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황은, 만인의 모범이 되는 인격자였다.

크레이슐러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강한 무력과 신성력을 지녔음에도 폭거하지 않았다.

여신께서 내리신 빛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선민의식이 없었다. 늘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하여 원로들은 교황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일을 수습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교황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악마들이라. 공통의 적이라.”

읊조린 교황이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창문을 젖히고 나아가 테라스에 섰다.

“와아아아아!!”

“교황 성하 만세! 레베카교 만만세!!”

족히 수만의 인파가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인종이 다양했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교황청에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모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싶었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교황이 쭈뼛거리고 선 원로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것들은 본교의 존립 이유와 거리가 멉니다.”

“그게 무슨...”

“본교는 오직 레베카님을 위해서 행사합니다. 본교가 사악한 존재들과 투쟁해온 이유도, 나약한 인간들에게 봉사해온 이유도 결국엔 전부 레베카님의 덕을 쌓고 레베카님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새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제가 템빨신교에 누명을 씌우고 진실을 왜곡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본교의 세를 키우고 레베카님의 실추 된 명예를 바로 세울 기회였기 때문에 이용했습니다. 교황의 소임을 다한 거지요. 원로들께서는 그런 저를 도와야할 책임이 있을 진데 어찌 도리어 비난하십니까?”

“순서가 잘못 되었군요. 레베카 여신께서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는 겁니다.”

교황으로부터 광기를 느끼고 말문을 닫은 원로들을 대신해 노년의 원로가 대표로 말했다.

제국의 황도 타이탄에서 교구 사제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누구보다 정직하고 신실하게 여신을 섬겨온 그는 한때 교황 후보로 거론됐을 정도로 인망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단지 여신께 기도를 올리고 싶은 한 명의 사제였을 뿐이다. 권력을 멀리했다. 자신의 의지로 교황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원로직도 마다해왔다.

그런 그가 최근 원로직을 받아들인 이유는 레베카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여신을 쉽게 의심하고, 또 다시 쉽게 의심을 거두는 교인들을 보고 염려하여 그들이 혹 길을 잃지 않도록 선두에 섰다.

“성하께서 무거운 책임에 짓눌려 그릇된 판단을 하신 거라고 믿겠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지지에 다소 격양된 나머지 실언을 하신 거라고 믿겠습니다. 며칠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다스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위험하다.

광신의 기질이 있다.

원로들은 교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도 알았다. 교황을 잠시 구속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은 크레이슐러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무력적인 측면에서 그랬다.

“원로라는 자가 망발을. 교정이 필요하겠군요.”

빛이 번쩍였다. 직선으로 뻗는 빛이었다. 그것이 타이탄 교구 출신 원로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이, 이럴 수가...!”

“지, 지금 무슨 짓을!!”

원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 여전히 환호하는 광장의 사람들, 미소를 유지한 채 그들에게 손을 흔드는 교황, 사늘한 주검으로 변해 교황의 발치를 뒹구는 노년의 원로.

시야에 한꺼번에 들어오는 광경이 워낙 비현실적이라, 원로들은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만 공포는 실감했다. 그들은 악마를 본 심정이었다. 뒤틀린 광신이란 그만큼 악에 가까웠다.

한편.

“방금 그 빛은 뭐지?”

건너편 건물에서 교황의 모습과 광장의 교인들을 촬영하던 방송국 사람들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시야를 명멸시키는 하얀 빛이 교황의 주변에서 발생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풍경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지만, 어째선지 교황 뒤편에 서있는 원로들의 얼굴이 겁에 질린 상태였다.

“영상 돌려 봐.”

“빛이 너무 강해서 화면을 완전히 물들였습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어요.”

“이런 젠장...”

필시 무슨 일이 벌어졌다.

방송국 촬영팀 뿐만 아니라 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 중인 시청자들 또한 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광장의 사람들만 이변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자리에선 테라스 위의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기에.

“어딜 보는 거지?”

촬영팀과 시청자들이 체한 듯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광장의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교황의 시선이 갑자기 하늘로 향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쫓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던 하늘에 주황빛 극광(極光)이 번지고 있었다. 마치 석양이 깔린 듯했다.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그리드...?”

촬영팀의 당혹이 컸다.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 영상이 흔들렸다.

교황을 내려보는 그리드의 시선이 사늘했다. 명백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붉게 보일 지경이어서, 석양을 퍼뜨리는 태양 같았다.

“...”

뒤늦게 그리드의 출현을 깨달은 광장의 사람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교황에게 묻는다.”

침묵을 불러온 사람도, 침묵을 깨뜨리는 사람도 그리드였다.

“그대는 마인의 발생 원인이 본국에 있다고 주장하였지.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본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전쟁을 앞둔 병사들의 사기를 꺾은 죄가 크다. 사죄해라.”

그리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했다. 차가운 음성에 분노가 담겼다.

침묵을 강요했던 위엄이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압으로 바뀌었다. 광장의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NPC와 플레이어 전부 그랬다. 누구도 감히 고개를 위로 들지 못했다.

촬영팀의 사정도 비슷했다. 그들은 그리드와 꽤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지만, 그럼에도 위압감에 짓눌렸다. 카메라의 시선이 낮아졌고 시청자는 불편함에 시달려야했다.

원로들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유일하게 교황만이 태연자약했다.

그는 본질을 흐렸다. 그리드의 말이 아닌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비난했다.

“고작 사과를 받기 위해 본교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도 명색이 신을 자처하는 분께서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걸음을 가벼이 하다니, 몹시 당황스럽군요. 이단의 수준이 높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저열합니다.”

교황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있지만 마음이 들뜬 눈치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굳이 본교에 집회가 있는 날 찾아와 많은 교인들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권력과 무력을 과시하는 의도는... 교인들을 겁박하고 본교의 기세를 짓누르기 위함이겠지요. 당신에게 신이란 그토록 불순하고 폭력적인 존재로 비추는 겁니까? 하여 스스로 증명하는 겁니까? 가당치도 않습니다. 당신은, 신이 아니기에 신을 모릅니다. 저와 본교는 당신을 부정합니다.”

“내가, 권력과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무표정하게 있던 그리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어이가 없어서 새어나오는 실소였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 검을 뽑았다. 익히 유명한 신검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대장간에서 만들던 보급형 무기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리드는 그걸, 던졌다. 그 어떤 기교와 스킬도 섞지 않았다.

-콰창!!

섬전처럼 날아간 검이 교황의 귓불을 베며 벽에 꽂힌다. 동시에 땅이 흔들린다 싶더니 쩌적, 쩌저적! 충격을 견디지 못한 건물에 균열이 발생했다. 건물이 흔들린 것이었다.

“내가 정말로 힘을 과시했다면, 레베카교가 아직까지 존재했을까?”

“...!”

“...!”

이 순간.

긴 세월 동안 최대, 최고의 종교로 군림해온 레베카교가 대수롭지 않은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드의 한 마디가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직감했다.

오늘, 세력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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