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12화
“내가 힘을 과시했다면, 레베카교가 아직까지 존재했을까?”
충격적인 말이었다. 레베카교를 언제든지 멸망시킬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오만한 수준을 넘어서 광기가 느껴졌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어찌 저런 망발을...”
그리드의 위압감에 짓눌렸던 교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머지 공포를 잊은 눈치였다.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교인이 많았다.
빛의 여신 레베카는 특별한 존재다.
그녀가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빚었다. 아스가르드의 고귀한 신들조차 그녀를 어머니로 섬길 정도였다.
레베카교가 최대, 최고의 종교로 군림해올 수 있던 배경이다.
주신, 그것도 창조신의 비호를 받는 레베카교를 감히 누가 해친단 말인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탄교가 이미 수차례 증명했다.
야탄교는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레베카교를 위협했지만, 레베카교는 마치 필연처럼 매 순간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필연의 증거 중 하나가 그리드였다.
그리드가 레베카교를 위해서 싸웠던 일도, 야탄의 종들을 죽여 간접적으로 레베카교를 도왔던 일도 모두 레베카의 안배였다.
...레베카 교인 중 유달리 신실한 자들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절반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드가 레베카교를 도왔던 계기 중엔 레베카의 신탁이 있었으니.
쿠르르르릉!!
“히익...!”
그리드를 노려보던 교인들이 질색했다. 굉음이 울리며 땅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건물이 약간 더 기울어진 여파였다.
“곧바로 무력을 행사하고 겁박하는군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절제하지 않는 겁니까? 무엇이 됐든, 세상에 당신 같은 신이 존재했다면 세상엔 재앙이 범람할 테죠. 사람들은 당신의 눈치를 보느라 노심초사해야 할 테고요.”
이토록 많은 목격자가 있는데 다짜고짜 검을 뽑아 던질 줄이야. 심지어 레베카교를 모욕하면서 말이다.
교황은 그리드의 격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실망할수록 그를 향한 숭배도 약해질 테니까.
‘이게 바로 그 신검 중 하나인가?’
슬쩍.
푸른 눈동자를 굴린 교황이 자신의 얼굴 옆에 꽂힌 검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강력한 위력을 싣고 날아온 탓에 벽에 깊숙이 박혔다.
한데 검은 멀쩡했다. 자신의 높은 안목으로 봤을 때 명검이었다.
‘소문의 신검들과 생김새가 다르군. 최근에 새로이 만들었나.’
교황은 그리드의 신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간에서 신검이라 일컫는 그의 무구들이 훌륭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아스가르드에서 탐을 내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생각하기에 그리드는 헥세타이아의 대체자였다. 여신께서 그에게 내려주었던 축복을 거두지 않고 있음이 명백한 증거였다.
‘헥세타이아님을 석방할 생각이 없어 보이셨지. 이자가 차기 대장장이 신이 될 거다. 천상에 올려 보내기 전에 교정해놓을 필요가 있어.’
그리드의 성장 기반엔 레베카 여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의 축복과 호의가 있었다.
교황은 아스가르드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그리드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킬 생각이었다.
본인이 다른 신들과 동등하다고 착각하는 불상사는 없어야지 않겠나.
콰득.
교황이 벽에 박힌 검을 쥐어 뽑았다.
얼굴은 여전히 그리드가 있는 방향으로 고정시킨 채여서, 칼날이 이번에도 그의 귓불을 스쳤다.
주륵...
그리드가 던진 검에 베였을 때는 멀쩡했던 귓불에서 피가 흘렀다. 보호막이 생성되지 않아 칼날에 고스란히 베였다.
이쯤 되면 교황의 정체가 천사라는 건 확실했다.
특별할 거 없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교황의 탄생 비화와 용모파기를 접했을 무렵부터 템빨국은 교황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었다.
야탄교의 배후에 아모락트가 있듯, 레베카교의 배후엔 천사가 있게 됐을 뿐이다.
‘처음엔 사리엘인 줄 알았다.’
사리엘은 ‘천국에서 쫓겨나 육신을 교체할 수 없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레베카교에선 사리엘의 복제품이 활동했었다. 템플러 단장의 정체가 바로 사리엘의 복제품이었다.
언제 다시 새로운 복제품이 나타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황은 사리엘과 달랐다.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외모와 빛이 흘러내리는 듯한 금발 탓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의 형태에 차이가 있었다. 얼굴선이 조금 더 두껍고 키도 10센티미터는 더 컸다.
사리엘은 예쁘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교황은 남성적인 면이 조금 더 강했다.
“제 상처가 보이십니까.”
귓불에 묻은 피를 굳이 손에 묻힌 교황이 그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섬겨야 마땅할 신들의 상징물을 파괴하여 이미 그 폭력성을 입증해온 템빨왕이 기어코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이 마인을 발생시킨 원흉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지도, 대화로 설득하려 하지도 않고 폭거를 자행하는 모습에 저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본교를 멸망시키겠노라 겁박하는 태도에 슬픔과 분노를 느낍니다.”
“우우! 우우우우!!”
교인들이 그리드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NPC였다. 플레이어 교인들은 슬그머니 현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플레이어는 NPC와 비교해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본다. 온갖 매체를 접해온 까닭이다. 플레이어 중에 교황을 맹목적으로 믿는 바보는 드물었다.
“두 눈에 저자의 모습을 똑똑히 새기십시오. 저자는 신이 아닙니다. 신에 버금가는 무위를 손에 넣었을지언정 그것을 올바르게 휘두를 정의가 저자에겐 없습니다. 저자는 일개 왕에 불과합니다. 인류의 강역이 아닌 자신의 영토를 우선시할 것이고 인류의 안위가 아닌...”
교황의 연설이 시작됐다. 맑고 따스한 목소리를 교인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겼다.
연설의 내용은 단순했다.
그리드는 신이 아니다. 그를 믿어서도, 의지해서도 안 되며 신을 참칭하는 그를 부정해야한다. 만약 그가 본교에 폭력을 행사한다면 내가 맞서 너희들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저자를 비난하라.
단순하기에 명료한 내용이었다.
교황은 연기에도 능숙해서, 곱고 선한 인상에 교인들을 염려하는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그리드가 서서히 하강했다. 그의 눈높이가 교황과 맞추어졌다.
“우우우우!!”
교인들이 보내는 야유가 거세졌다.
교황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득의양양한 꼴을 보아, 그리드가 여기서 폭력을 행사하든 물러나든 자신의 의도는 이뤄질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혀가 길다.”
사람들이 백날 그리드를 부정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드는 이미 자신의 자격을 증명했고, 그러므로 신이 된 것이다. 지금 와서 누군가가 그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의 신격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또한,
“너는 지금 여기서 죽는다.”
그리드의 무력은 교황이 상정한 것 이상이었다.
그리드의 신격을 부정한 시점부터 교황은 그리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휘릭-!
허공에 손을 뻗는 그리드의 왼손에 염룡검이 회전하며 쥐어진다. 곧바로 교황에게 겨누어진 그것이 브레스를 뿜었다. 이때 그리드의 오른손엔 무형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콰아아앙!!
“큭...!?”
천사는 원거리 공격을 무시한다.
교황은 브레스를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의외로 신음을 토했다. 브레스가 일으킨 폭발을 꿰뚫고 등장한 칼날에 베인 탓이다.
앞서 회수한 신검으로 막아보았지만 신검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즉시 성검을 뽑았지만 늦었다. 나선으로 휜 칼날이 목덜미를 감싼 뒤 압력을 가해왔다.
푸화하하학!!
교황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었다.
주황빛의 극광에 번지는 핏줄기에 예술성이 담겼다.
“...?”
“...?”
광장의 교인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시청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찰나(刹那).
초 단위의 시간조차 가늠하기 무색한 찰나에 교황의 목이 베인 것이다.
역할과 비중을 고려했을 때 필시 초네임드 NPC에 속할, 일반적인 관점에선 도무지 범접하지 못할 상대가 일격에 시체로 전락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끼, 끼야아아아악!!”
“교황 성하아아!!”
뒤늦게 울려 퍼진 비명이 메아리가 되었다. 교황청을 둘러싼 산에 빼곡히 자란 나무들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쏴아아아!!
수만 교인들의 힐이 교황에게 쏟아졌다. 빛의 비였다.
그리드의 시선이 광장에 꽂혔다. 템빨신의 관조가 발동하며 힐의 작동을 상당량 파훼시켰다.
하지만 무려 수만 개의 힐이다. 원천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봉쇄할 생각도 없었다.
시선을 옮긴 그리드가 건물 안쪽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광장의 교인들과 달리 가만히 있었다. 교황에게 힐을 쓰지도 않았고 버프를 걸지도 않았다. 그리드를 공격하거나 질책하는 일도 없었다. 민망하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까는 사람이 있었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제압할 심산이었던 그리드가 관뒀다.
‘뭔가 사연이 있나보군. 그래도 삼신교는 없앤다.’
그리드는 복합적인 이유로 레베카교와 도미니언교, 그리고 쥬다르교를 적대하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근본적으로 선역이다. 신들의 실체와 별개로 삼신교의 교인들은 대부분 선하여 민생을 돌봤다. 야탄교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삼신교는 Satisfy에서 드문 힐러들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삼신교의 세력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힐러는 더욱 귀해졌다. 어쩌면 멸종하게 될지도 몰랐다.
끝으로, 그리드는 레베카교와 깊은 교분을 맺었던 시절이 있다. 나쁜 기억도 많았지만 좋은 추억이 많아서 굳이 그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확신했다.
삼신교는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인마대전을 앞둔 상황에 굳이 그리드와 템빨국의 입지를 손상시키려 한 교황의 태도가 증거다.
삼신교엔 아스가르드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뢰였다.
속 편히 없애버리는 게 낫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세력이 워낙 광활하게 퍼져있어 발본색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민심이 요동칠 가능성도 높았다. 아마 많은 반발을 겪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없애야 돼. 해산시킨다.’
굳이 학살극을 벌일 생각까진 없었다.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살육은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인마대전에서 힐러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건 뼈아프지만... 현재 상태로 보아 이놈들은 애초에 도움이 될 놈들이 아니다.
번쩍!
빛이 터졌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없습니다.]
초월경이 발동했다. 신속의 공격이라는 뜻이다. 가속 된 사고로 상황을 관조한 그리드가 직선으로 뻗어오는 빛줄기를 검으로 쳐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염룡검을 허공에 띄우면서였다.
휘리릭!!
쌍수검을 버리자 무형검의 검로가 보다 빠르고 정교해졌다. 머리가 다시 멀쩡하게 붙은 교황의 성검을 미끄러지듯 타고 넘었다. 그리고 다시 교황의 목을 찔렀다.
쩌엉!
이번에 교황은 멀쩡했다. 몸에 빛의 장막을 둘러 무형검의 위력을 최소화시켰다. 신성력을 두른 호신강기였다. 스스로 움직여 교황의 등을 찔렀던 염룡검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 어어?”
거짓말처럼 회복한 교황의 모습에 교인들이 당황했다.
쉽게 죽어선 안 되는 인물인 건 맞지만, 살아나길 바라며 힐을 퍼부은 것도 맞지만, 잘린 목을 즉시 다시 붙이고 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기쁘기보단 놀란 마음이 컸다.
“천사를 벤 경험이 있으신 분답게 능숙하군요.”
천사.
오직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병단.
그들이 무적의 군단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법을 비롯한 모든 원거리 공격을 차단하는 가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된 말로 눈 먼 화살에 죽는 경우가 없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선 오직 접근해서 직접 싸워야했다. 소모전 없이 사생결단이었다.
그리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행의 이점을 버리고 굳이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촤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