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19화
그리드에겐 강력한 공격 수단이 많다.
지옥에서 만났던 서열 제10위 대악마 레라지에조차도 그의 공격을 쉬이 감당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리드는 몇 배나 강해진 상태다. 레라지에를 만났을 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선공을 양보한 비반은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그리드는 승기를 엿봤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화신의 폭풍을 전개하고 모든 버프 스킬을 몸에 둘렀다.
당연히 탐식의 룬도 개방했다.
비반의 방어를 무용으로 돌릴 수단을 갖추는 등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방심할 리 없다.
상대는 검성이다. 더군다나 무쌍류의 창시자다.
비록 역대 최강이라는 타이틀은 뮐러에게 양보했을지 몰라도, 뮐러가 익힌 심법과 검술은 비반이 만든 것이었다.
무패왕의 검술을 개선시켰던 점만 봐도 비반의 검술에 대한 통찰력은 사상 최고였다.
그 대단한 통찰력이 검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사실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리드는 비반을 세계 최고의 강자 중 한 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괴물.
무려 ‘드래곤’과 싸워온 인물이니 당연하다. 그가 최강자가 아니라면 세상의 이치가 잘못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길 각오였다.
석상룡 구젤의 어금니를 반드시 갖고 싶었다.
<패배를 모르는 힘>
잠재력을 넘어서는 힘을 얻습니다.
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시전 후 다음 행동이 근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단, 3위 이상의 대악마와 드래곤, 그리고 절대자와 신을 상대로는 이기지 못하고 비깁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12시간
스킬 자원 소모:없음
쿠오오오!!
아이템 합체로 하나가 된 염룡검과 무형검.
화신의 폭풍으로 말미암은 의지의 불꽃보다 짙은 화염을 토하며 나선을 그리는 검 끝에 절대적인 힘이 집약된다.
반면 비반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선공을 양보하겠노라 선언한 만큼 그리드가 준비를 마치면 대응할 속셈 같았다.
공간을 유리시킨 채 화신의 폭풍을 밀어내는 검기의 결계처럼 고고한 태도였다.
절대자의 풍모였다. 스스로의 실력에 의심을 품지 않는 모습이 새삼 멋지게 다가왔다.
그리드는 비반의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겼다. 뇌리에 완전히 각인시켰다.
닮고 싶어서였다. 같은 무인으로서 반해버렸다.
물론 입을 열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후우.”
그리드는 심호흡하며 레라지에와 겨뤘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비반이 자신의 힘을 체험하는 순간 질색하며 찬사를 보낼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비반이 스스로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듯, 그리드 또한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쿠오오오!!
개변의 여파로 순수 공격력이 1만에 달하는 염룡무형검이 포효한다.
거칠고 세차게 뿜어지는 브레스의 전개와 함께 표표한 검무가 펼쳐졌다.
5융합 검무였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대상의 방어력을 대부분 무시하는 살의 검기가 디텍스 포스의 유도 기능을 담고 뻗어나간다.
하나라도 적중하는 순간 대상을 무장해제 시키고 절망을 선사하는 최강의 검무 중 하나가 명중률 보정을 받은 것으로 모자라 패배를 모르는 힘까지 등에 업었다.
심지어 모든 검기가 변칙성을 품는다.
나선을 그리다가 직선으로 뻗어지고, 직선을 그리다가 나선으로 휜다.
무형검의 특성이었다.
까다로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기의 시작점이 모두 달랐다.
그리드가 검무에 순보를 연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드는 검무에 행동을 강제당하지 않는다. 신의 권능으로 일정 수준의 물리법칙을 무시한다.
하나의 동작마다 전력이 담기는 5융합 검무의 운동에너지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콰콰콰콰쾅!!
비반의 전후좌우에서 극광이 번졌다. 머리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보를 활용하여 비반의 전방위를 점거한 그리드가 만든 힘의 파동이다.
소용돌이를 이룬 7개의 검기가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비반을 덮쳤다. 그 과정에 낙차가 없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공격이었다.
뒤늦게 급히 검을 뽑는 비반의 모습을 시야에 담은 그리드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레라지에를 경악시켰을 때의 전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곧 다시 겪을 일처럼 다가왔다. 예지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지는 헛된 망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콰차아아앙─
발검과 동시에 사방위를 점한 비반의 검이 7개의 검기를 모조리 방어했다.
각기 다른 타점을 찌르는 검기들의 경로가 찰나지간 겹치는 지점을 노려 차단한 것이다.
기술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검술이었다.
경악한 그리드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패배를 모르는 힘이 비반의 방어를 분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한데.
“...!”
초연살파극이 비반의 방어를 꿰뚫지 못했다.
검기와 충돌한 비반의 검이 비스듬히 기울 때마다 7개의 검기가 궤도를 잃었다.
마침 검무의 동작이 끝났다. 패배를 모르는 힘의 효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쿨타임에 걸렸다.
쿠콰콰콰쾅!!
방향을 잃은 7개의 검기가 비반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건재한 파괴력으로 비반이 등지고 선 풍경 전체를 붕괴시켰다.
휘릭.
비반이 칼자루를 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검이 손등으로 올라 회전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나마 남은 윈드 커터의 잔재조차 흐트러진다.
덕분에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은 비반이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무쌍검은 패검이거늘 후퇴하게 만드는가. 내게 기교를 강제하는 존재는 세상 전체를 통틀어도 몇 없을 터인데.”
비반은 괴력난신이다. 폭급한 성정에 더불어지는 검술을 연마하여 무쌍심법과 검법을 만들었다. 힘 대결에서 결코 밀려본 적이 없다. 전성기의 뮐러가 비반에게 앞섰던 점은 힘이 아닌 기술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비반은 전성기 뮐러의 기술조차 넘어섰다.
비반의 검에는 헤아리기 힘든 세월이 담겨있었다.
죽음을 바란 뮐러가 사람들에게 잊히기 위해 검을 버리고 은거했던 것과 달리 비반은 평생을 쉬지 않고 검술을 연마해온 결과다.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비반은 최강과 최고를 논하기에 앞서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검사였다.
그런 그가 그리드에게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검술일세. 내 기감이 조금만 약했어도 자각하지 못한 채 7번을 죽었겠군.”
검무가 아닌 검술이라고 말한다.
한때 검무를 춤사위라고 표현했던 태도와 달랐다.
그리드의 검무가 명백히 한계를 초월했다는 증거였다.
특히 조금 전 그리드는 초연살파극에 순보를 섞어서 운용했다. 초연살파극의 동작이 진행되는 동안 총 5회의 순보를 펼쳤다.
대상이 자각하기도 전에 7번을 죽이는 검술.
비반의 표현엔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았다. 순수하고 적절했다.
부들부들!
그리드의 손끝이 떨렸다. 흥분해서였다. 그의 입가엔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비반이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까닭이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리드를 한참 아래로 보았던 가장 위대한 검사가 지금 이 순간엔 그리드를 호적수로 인정하고 있었다.
지난 삶을 모조리 인정받는 기분인지라 그리드 입장에선 기쁠 수밖에 없다.
또한.
‘이길 수 있다.’
승기를 확실하게 엿봤다.
사실 비반이 초연살파극을 흘려낸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드만 해도 회(回)로부터 파생하는 반격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니.
하물며 검성인 비반에게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기술이 없을까?
그리드는 비반의 방어스킬을 소모시켰다는 점에 주목했다.
‘회피기, 방어기, 반격기의 공통점은 쿨타임이 길다는 거지.’
게다가 개수도 그리 많지 않다. 회 하나로 여러 개의 반격기를 사용 가능한 그리드가 특별한 케이스다.
‘몰아붙인다.’
결정한 그리드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나의 호흡에 최대한 많은 공격을 담는다─ 즉,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을 각오였다.
스슥!
그리드의 신영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어깨가 흔들리지 않는다.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신체의 균형이 완벽하게 잡혔군.’
비반이 평가하는 동안 그의 시야에 그리드의 모습이 가득 찼다.
주홍색 꽃잎이 나부꼈다.
연살화극락(聯殺花極落).
그리드는 연계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화를 중심으로 삼았다. 연살화극락에 이은 연화와 초연화 등.
화를 융합시킨 검무들을 콤보로 써서 비반을 몰아붙였다.
일대가 순식간에 꽃잎으로 뒤덮였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꽃잎이었다. 몸에 닿는 순간 위협이 될 수준이었다.
하지만 비반과 상성이 나쁜 기술이었다.
무쌍검법의 패도적인 검술이 일으키는 풍압은 섭리를 거스르는 힘.
검기의 흐름마저도 비틀어놓는다.
촤르르르륵!!
한 번의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수십 회의 검격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중심에 둔 채 꽃잎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단 하나의 꽃잎도 비반의 몸에 닿지 못했다.
“탑에서 전위를 담당하는 몸일세. 드래곤과 싸워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네. 그 전사 아닌 놈들이 졸렬하게 용언을 쓰면 속수무책인지라 라드볼프의 마장기를 종종 의지하게 되지만... 어쨌든 쉽게 이길 거란 생각일랑 말게.”
“그러십니까.”
비반을 철벽처럼 굳건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화의 검기를 무력화시킬 수단으로 코앞까지 다가와 근접전을 유도하는 비반의 멱살을 왼손으로 침착하게 거머쥐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빈틈을 드러냈다.
팔꿈치를 들어 그리드의 손목을 찍어 누른 비반이 그대로 그리드의 복부에 칼을 쑤셔 넣었다. 역수로 쥔 검이었다. 초근접의 거리에서도 대상을 관통하는 무쌍검법의 기초 초식이었다.
울컥!
그리드가 입에서 피를 쏟았고,
“...?”
비반의 시야가 반전됐다.
천지 뒤집기.
삼제 이정을 레이드하고 얻었던 유니크 등급의 금나수 스킬이 비반의 몸을 바닥에 꽂아버린 것이다.
검풍이 잦아들며 떨어진 꽃잎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비반의 몸에 수북하게 쌓였다. 수많은 표식이 그의 몸에 새겨졌다.
즉시 초를 전개한 그리드가 순보를 써서 거리를 벌리고 검을 한 번 휘두르자 표식의 숫자에 비례하는 검기 폭격이 발생했다.
“음!”
비반의 행동이 강제됐다. 몸을 일으키며 검기들을 쳐냈다.
그에게 용이 떨어졌다.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였다.
비반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호감이 묻어나는 따스한 미소를 거두고 노기를 드러냈다.
“이런 치졸한!!”
염룡검의 <거짓 용언> 때문이었다.
그리드는 본인이 용언에 약하다고 고백한 비반의 약점을 대놓고 찔렀다.
덕분에 잠시 움직임이 구속된 비반의 몸을 낙룡극살파가 관통했다.
피를 거하게 토한 비반이 휘청,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고정시켰다.
태산을 쉬이 가르는 무쌍검법의 절기로 그리드의 연계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한 그가 버럭 소리쳤다.
“왜 말하지 않았나!”
“네?”
“용언 비스무리한 걸 쓸 줄 안다고 왜 말 안 했느냔 말일세!”
“...”
그리드는 그런 걸 왜 일일이 말해주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말을 아꼈다.
치명상을 입히는데 성공한 상황이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
“나와라.”
허공에 속삭이는 그리드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주위 풍경이 우그러지며 일렁이는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그림자는 곧 인영이 되었다.
새하얀 피부와 홍옥 같은 눈동자를 지닌 미남미녀들이었다.
백작 엘핀스톤을 위시한 직계 뱀파이어들의 출현이었다.
하나 같이 도도한 표정을 짓고 선 그들이 등진 하늘 위로 30개의 갓 핸드가 무리지어 나타났다.
노에와 랜디도 함께였다. 노에의 등에 랜디가 올라타 있었다. 비룡기병을 연상시키는 묘(猫)기병이었다.
비반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성한 일대일 대결에 어찌...?”
“비반 님도 무기랑 스킬 쓰시지 않습니까?”
“...?”
“그거랑 같은 이치입니다. 일대일 맞습니다.”
“허...”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비반이 검기로 펼쳐두었던 결계를 없앴다.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결계를 펼치느라 지속 소모하고 있던 4할의 검기를 거둬들인 것이다.
그리고.
콰드드득...
자신의 심상을 현현시켜 화신의 폭풍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이쯤 되면 비반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에겐 무패왕의 검술도 있지. 무패왕의 검술과 자네의 검술을 구분 짓지 말게. 검무와 순보를 함께 썼듯이 응용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