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21화
“저, 저게 무슨...”
후원에 둘러싸인 궁전.
그리드가 대장간으로 이용하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던 로이먼과 기사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왕궁의 가장 높은 첨탑보다 족히 5배는 거대한 검이 시야에 불현듯 나타난 까닭이다.
세상을 관통할 기세여서 압도당하고 만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어찌 저리 큰 검이 존재한단 말인가.
무슨 수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났단 말인가.
“...서둘러라!”
템빨국의 선임기사에게도 초월자의 심상은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무위가 아닌 미지로 다가왔다.
잠시 넋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 로이먼이 기사들을 통솔했다. 어쌔신들에게 선두를 빼앗겼단 사실을 자각하면서였다.
페이커와 카심에게 철저히 교육받은 템빨그림자단의 어쌔신은 악몽 같은 광경에 지배당한 세계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발이 워낙 빠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아...”
기사들과 어쌔신들의 거리가 좁혀졌다.
현재 위치
어쌔신들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든 덕분이다.
급기야 그들과 나란히 선 기사들도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거검의 주변으로 수천 자루의 검이 부유하고 있었다.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어지럽게 얽히는 기세가 몹시 빠르고 매서웠다.
“대체... 대체 어떤 괴물이...”
무신이라도 강림했는가.
불길한 상상이 일행을 괴롭힌다. 그리드 전하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들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워진 두 다리를 애써 내딛었다. 이를 악 물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거검에 관통당한 구역 즉, 그리드의 대장간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긴장은 극도에 달했다.
다만 신경은 오히려 분산됐다.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비행 중인 수천 개의 검.
멀리서는 시야에 포착됐던 그것들의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흐릿해진 까닭이다.
비행 속도가 아음속(亞音速)에 비견되어 일행의 인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반응조차 못하고, 눈치 채지 못한 채 검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공포를 전염시켰다.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까가강!!
갓 핸드들의 비명이 연신 울려 퍼졌다.
비행하는 검들과 충돌하고 멈춰서길 반복하는 게 보였다.
갓 핸드가 상대적으로 너무 느렸다.
검무를 전개하는 순간마다 가속을 얻긴 했지만 부족했다. 분사되는 매직 미사일의 물결이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템빨왕의 상징이 참혹하게 허물어졌다. 어울리지 않게 초라했다.
“큭!”
망설일 때가 아니다.
검과 방패를 꺼내 쥔 로이먼이 그대로 돌진했다.
벌떼가 우는 듯한 소음을 내며 비행하는 검들이 이룬 빛살의 장막을 미련하게 돌파했다.
갑옷이 찢겨나가며 선혈이 마구 솟구쳤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행위였다. 그녀는 오직 그리드를 도와야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 하?”
대장간 바로 옆에 펼쳐지는 다목적 터.
각종 석재와 광석 등을 쌓아놓곤 하는 그곳은 그리 넓지 않다.
작은 연병장 수준. 국왕을 위한 공간이라기엔 초라할 정도다.
한데 그리드와 정체불명의 검사는 그곳을 마치 광야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비웃듯, 하늘과 지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공방을 교환했다.
대장간 건물 바로 옆에서 얽혔다가 사라지고,
불현듯 공터 중앙에서 나타나 다시 얽힌다.
이때야 비로소 대장간 건물 옆에 검광의 잔흔이 새겨지며 수십 회의 충돌음이 메아리쳤고,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며 공터 중앙에 새로운 검광의 잔흔이 새겨졌다.
“...”
로이먼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 두 사람이 천지사방에 퍼뜨리는 파열음에 귀가 먹먹해진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직감했다.
지금 자신은, 전설에도 없던 대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감히 끼어들 계제가 아니었다.
“헉...”
한 발 늦게 도착한 일행의 반응도 로이먼과 같았다.
갓 핸드와 뱀파이어들을 해치며 비행하는 검의 장막을 헤치고 전진한 여파로 상처투성이가 된 그들이 숨을 죽였다. 기껏 그리드를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착한 그곳에 목석처럼 섰다.
힘을 못 쓰던 갓 핸드들이 새카만 거인으로 변하는 광경이 보였다.
무려 서른 대의 마장기.
안 그래도 크지 않은 공터를 반 이상 채우는 규모였다. 비행하는 검들의 포화를 뚫고 정체불명의 검사를 압박한다.
전장이 한층 좁아졌다.
하지만 검사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쏟아지는 온갖 폭격을 피하고, 쳐내며 달을 등질 정도로 높이 도약했다.
혈마법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티라멧이 그의 허리에 매달렸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움찔.
달빛의 음영에 드리운 검사의 흔들리는 눈빛을 아무도 읽지 못한다.
검성 비반.
대결에 전력으로 임하며 집중하고 있던 그는 불청객들을 뒤늦게 목도하고 말았다.
하여 ‘인식하는 대상’을 베는 심검의 작동에 변형을 주었다.
이미 발현된 심상에 변형을 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할 수밖에 없다.
탑의 결사가 드래곤이라는 괴물들로부터 세계를 지키겠노라 맹세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후손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결사는, 어떤 치명적인 이유가 아닌 이상 결코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설사 후회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념에 집어삼켜져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숭고했다.
주륵.
비반의 입가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심검이 발현되는 순간 억제한 여파로 심상이 흔들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으로 갈라진 마장기들을 헤치며 다가온 그리드의 춤사위를 잠자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춤사위여서, 도리어 미소 짓고 말았다.
‘훌륭하구나.’
그토록 젊은 나이에 나를 넘어서는가.
여태껏 그 어떤 선구자도 탑의 염원을 이루기엔 역부족이었건만, 자네만큼은...
“...?!”
연살파극의 검무 중 연살파의 흐름이 전개된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상념에 잠긴 채 그리드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비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무 진행 도중 새로운 검을 꺼낸 그리드가 그것을 기존의 검과 하나로 합쳤기 때문이다.
‘월야철!’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에 등골이 절로 오싹해진다.
팔 하나 잘릴 각오하라는 듯했던 그리드의 은근한 협박이 새삼스레 뇌리에 스쳤다. 버르장머리 없다고 느꼈던 언행이 진심어린 염려와 호의로 변모하여 다가왔다.
‘이런 빌어 처먹을...!’
낙월검의 위력을 가늠한 비반이 급히 의념의 방벽을 세웠다.
검무의 동작과 합일하는 십만대적검의 위력이 무패왕이 썼던 원본을 초월하고 있음을 알아보면서였다.
하지만 지금 비반이 경계하는 부분은 무패왕의 검술이 아닌 낙월검 그 자체였다.
무패왕의 검술?
더 강력한 검술로 파쇄하면 그만이다. 설령 백만대적검이라도 심검으로 상쇄할 수 있다. 큰 의지를 소모하여 심상이 흔들리겠지만 어떻게든 감당이 가능했다.
하지만 월야철은 다르다.
월야철을 외장갑으로 두른 라드볼프의 마장기가 드래곤의 절대방어를 깨뜨리는 장면을 비반은 몇 번이나 보아왔다.
심지어 낙월검은 마장기의 외장갑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단단하게 벼려져 있었다.
1좌 하야테의 용살검을 어느 정도 연상시킬 정도였다.
꽈창─!
템빨 앞에서,
의념의 방벽이 부서진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권능과도 같은 검광의 파도가 비반의 행동을 강제했다.
코앞까지 다가오는 검광을 마주본 채 비반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상체를 돌려 왼쪽 어깨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 오른 손에 쥔 검을 앞으로 뻗었다.
낙월검의 범위에 닿는 신체 범위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검’으로 국한되게끔 유도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0.1초 단위로도 쪼개지 못할 만큼 짧았다.
꽈차차차창!!
검성의 의지가 깃든 검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진다.
이어서 손목이 잘려나갔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연마해온 검성의 육체가.
드래곤의 브레스에 스치고도 버텼던 초월자의 강인한 신체가 허무하게 허물어졌다.
“크윽...!”
흩어지는 심상과 함께 원래의 풍경을 되찾은 세계.
무수한 별빛이 수놓인 밤하늘에 그리드의 색이 번진다.
시야 끝까지 뻗어나간 검광이 지평선에 걸린 태양을 연상시켰다.
쿠웅!
지상으로 떨어진 비반이 자신의 잘린 손목을 바라보았다.
외팔은 면했으나 외손 신세가 되었나.
...괜찮다.
내가 즉 명검보도를 넘어서는 신검이다.
검이 없어도 검법을 펼칠진데 한쪽 손을 잃은 게 대수일까.
아니, 꼭 외손으로 살아갈 이유는 없다... 대도시에는 응당 레베카교 신전이 있으니 늦지 않게 찾아가면 치료 받을 수 있을 터다.
그리드도 말하지 않았나.
만약 몸이 잘려도 너무 당황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다시 붙여주겠다고.
설마 그 말이 현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잘린 손을 잘 챙겨 비단에 감싼 비반이 뒤이어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드에게 웃어주었다.
그리드의 행색도 온전치 못했다. 만신창이가 되어선 사지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내가 졌네. 잠깐 보지 못한 사이에 여기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진정으로 존경하는 바일세.”
“상처를 보여주십시오.”
그리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의념의 방벽을 부수는 순간까지도 비반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순보를 견제했다. 절대로 놓치지 않고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비반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목도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은인의 육신을 훼손하다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대련 내내 느꼈던 비반의 호의가 그리드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스승을 다치게 만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허겁지겁 붕대를 꺼내는 그에게 비반이 말했다.
“지혈은 되었네. 보게. 피 안 나잖나.”
과연 초월자의 육신은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자력으로 근육을 조이고 혈류의 흐름을 바꿔서 출혈을 막고 있었다.
전신 혈맥조차도 제어하는 경지에 오른 인물이 비반이었다.
한데 그를 이긴 것이다.
순수한 1대1 대결이었다면 훨씬 더 힘든 승부가 됐을 테지만, 애초에 그리드는 템빨러다. 그의 입장에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싸우는 게 옳았다. 낙월검도 같은 맥락이다.
‘세희는 언제 오는 거지?’
지옥에 있는지라 귓속말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연락을 취해달라고 라우엘에게 로그아웃을 부탁했던 거다.
하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조금 늦어지는 듯하다...
초조해하는 그리드의 어깨를 비반이 두드려주었다.
“걱정 말게. 우선 레베카 신전으로 안내해 주시게.”
“없습니다...”
“음? 뭐가 없단 겐가?”
“레베카 신전이요. 원래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뭣이? 이만한 도시에 레베카 신전이 없을 리가 있나?”
“제가 싹 다 밀어버려서...”
“이, 이런 미친!!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대련에서 패배한 걸로 모자라서 한쪽 손까지 잘린 비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한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던 그가 도끼눈을 뜨고 그리드를 노려봤다. 멱살이라도 붙잡고 흔들 기세였다.
“레베카 신전이 없다는 말을 왜 이제야 하냔 말일세!”
“죄송합니다...”
“자네 나를 기만한 겐가? 레베카 신전도 없으면서 무슨 수로 몸을 붙여주겠다고 약속했던 게지?”
“...”
희망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또 모를까, 기껏 얻은 희망을 빼앗기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절망하거나 분노하는 법이다.
그리드는 비반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니까 지금 주변에 인파가 가득 모였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는 거겠지.
‘애써 평정을 유지하셨던 거구나.’
하긴 어느 누가 손목이 잘려나가고도 침착할 수 있을까.
“탑... 탑으로 돌아가면 방도가 있을 수도... 읍!”
한껏 열불을 내다가 중얼거리는 비반의 입을 그리드가 손으로 황급히 막았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줄이야.
‘X 됐다.’
어쩌면 두 번 다신 비반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큰 걱정에 휩싸인 그리드가 발버둥치는 비반을 갓 핸드까지 동원해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그때였다.
“오빠!!”
구원자가 나타났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성녀 루비다.
예상보단 약간 늦었지만, 충분했다. 만약 비반이 손목이 아닌 허리가 잘려나갔어도 아슬아슬하게 나타나 붙여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타이밍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비반의 허리를 벤다?
어지간해선 불가능할 일이다. 그리드가 베고 싶어도 베지 못했을 거다. 비반의 반응속도가 워낙 초월적이었다.
“조, 조심히 다뤄주시게.”
“...”
루비 앞에서 순한 양이 된 비반을 지켜보며 십년감수하는 그리드였다.
소란을 듣고 몰려온 인파에 둘러싸인 채였다.
무려 수백 개의 시선이 비반에게 꽂혀있었다.
탑이 어디냐는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대륙에 존재하는 마탑의 이름이 죄다 한 번씩 거론되는 중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비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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