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7화
“오아시스!!”
고작 56초.
“러, 럭님!!”
지슈카 일행이 떠나고 채 1분도 안 돼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슈카, 루비, 유페미나, 극검.
네 사람의 공백이 크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문제는 궁극기의 제한에 있었다.
궁극기.
종류는 다양하다.
그리드의 5융합 검무, 혹은 유페미나의 프로미넌스 웨이브처럼 공격력의 수십, 수백 배에 해당하는 위력을 내는 공격 스킬.
그리드의 화신의 폭풍, 혹은 유라의 지옥 규제처럼 적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아군을 강화 시키는 광역 필드 스킬.
디버프 삭제, 면역과 아군 강화에 특화 된 루비의 성역이나 개인의 역량을 초월적으로 상승시키는 크라우젤의 검을 찬미하는 시.
끝으로 그리드의 낙월검과 크라우젤의 우주 검처럼 적에게 큰 피해를 주고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회심기 등.
그 많은 종류의 궁극기 중 상당수를 원정대는 초장부터 소진했다.
엘리고스 등장 후 초반 2분.
원정대가 선전하며 4명의 동료를 탈출시킬 수 있던 이유다.
무려 5명의 전설과 15명의 하이랭커가 쏟아 부은 궁극기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였으리라.
플레이어에겐 꿈도, 희망도 없다는 방증이 됐을 테니.
“유라... 미안하지만 오아시스 좀 챙겨주라.”
켈베로스가 토해낸 화염과 독무를 날렵하게 피해 다니던 오아시스의 등으로 엘리고스의 창이 떨어졌다. 팔만대적검의 검기가 엘리고스의 어깨를 벤 것이 불행이 되었다. 크라우젤에게 집중됐던 어그로가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럭이 나섰다.
오아시스를 대신해서 마창을 맞았다. 피해가 심각했다. 럭 스스로 목숨을 끊을 틈이 없었다.
엘리고스가 자신의 마기를 집결시켜 빚어낸 창의 위력은 럭의 생명력을 단 일격에 고갈시켰으니.
럭은 이미 죽었다.
그가 버티고 선 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전쟁의 기둥’이라는 불굴 특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을 때 사망 시간을 5초 유예하는 특성.
전설들의 불사와는 다르다.
5초 동안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등 무슨 수를 써도 5초가 지나면 무조건 죽게 되므로 ‘이미 죽어있다’는 것이다.
불사의 열화 버전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저 녀석... 한 번이라도 죽으면 정말로 많은 걸 잃거든.”
사실, 럭은 처음부터 부탁하고 싶었다. 지슈카 일행이 탈출할 때 오아시스를 데려가주길 바랐었다.
하지만 선발대의 면면을 보고 포기했다.
지슈카, 루비, 유페미나, 극검.
네 사람이 대규모 전투에서 발휘하는 전투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럭 또한 직접 보아왔으니까.
크라우젤과 페이커, 그리고 크리스조차 그들에게 선발을 양보한 마당에 오아시스의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할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라면 부탁해 봐도 좋지 않을까.
“부탁한다. 다음 지옥문에 오아시스 좀 태워줘.”
럭의 불굴 특성은 직업이 아닌 지위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장군.
전쟁의 기둥.
전장에서 대장군의 죽음은 군대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 사실을 자각하기에, 잠시나마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다.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아레스 군단이 밥값 할 테니까.”
지슈카 일행이 떠난 이후 원정대가 약화된 직접적인 원인이 또 있다.
일부 ‘패시브 스킬’의 부재.
과거.
검성으로 전직하고 성장치가 초기화된 크라우젤의 레벨이 아직 한참 낮았을 무렵.
대악마 레이드에서, 크라우젤은 하찮은 레벨이 무색하게도 제대로 밥값을 했던 전력이 있다.
파티원의 물리공격력과 물리공격내성, 그리고 검술 스킬의 위력 등을 상승시키는 ‘검성 고유의 패시브 스킬’ 덕분이다.
그와 같은 이치로 궁성, 성녀, 무무드의 후계자의 패시브 스킬은 원정대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됐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씁쓸한 사실이지만, 대장장이와 달리 전장에서 비로소 빛을 보는 직업군의 정점들은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에게 큰 힘을 선사하는 것이다.
대장군이라는 지위 또한 그랬다.
존재 자체가 힘이다.
“...?”
켈베로스의 등 위.
엘리고스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아까 란스티어가 박아두고 갔던 ‘깃발’을 타고 워프해온 인간이 그를 당혹케 하였다.
놀랄 수밖에 없다.
마창에 꿰뚫려 죽었어야 할 인간이 눈앞에 버젓이 살아서 나타났으니까.
가슴의 절반이 날아가 세포 단위까지 소멸한 놈이 무슨 수로 살아서 자신에게 덤벼오는 건지, 엘리고스는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인간이 이렇게 튼튼한 종족이었나?”
당황도, 감탄도 찰나에 불과하다.
엘리고스의 주먹은 이미 럭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주먹이 3갈래로 잘려나갔다. 전설 속 뮐러보다 더 다양하고 대단한 검술을 구사하는 당대의 검성에 의해서다.
문제될 건 없었다.
인간이 고위 대악마를 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힘.
재생과 회복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파괴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검성은 아직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잘 베면 뭐하나.
다시 붙이면 그만인 것을.
쿠와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발생했다.
쏘아지는 과정에서 3갈래로 잘리고, 곧바로 다시 붙으며 럭에게 도달한 엘리고스의 주먹은 짙은 마기를 둘둘 두르고 있었다.
풍압만으로 하늘을 갈기갈기 찢는다. 프로미넌스 웨이브의 잔재에 의해 붉게 물든 먹구름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몸이 사실상 반으로 찢어지기 직전인 럭의 신체는 먼지가 됐어도 문제가 없을 파괴력이다.
한데 정작 표적이 된 럭은 무사했다. 풍압을 돌파하고, 주먹을 피하며, 엘리고스의 가슴 깊이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면서 새카만 투구 너머에서 오만하게 웃고 있을 엘리고스의 면상에 힘껏 스트레이트를 꽂았다.
크로스 카운터.
천외천 크라우젤의 검술조차 카운터 쳤던, 럭을 상징하는 최강의 반격기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품고 지옥 최강자의 턱을 돌려버렸다.
“하핫...! 어떠냐! 천외천의 무릎을 꿇렸던 주먹이다!”
“그런 적 없다만.”
크라우젤이 즉각 부정했지만, 럭은 듣지 못했다. 잿빛으로 산화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대장군의 불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사망하였습니다.]
[흑기사 ‘엘리고스’가 월권을 행사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윤회에 실패해 부활 불가의 페널티에 걸립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합니다.]
“럭님!!”
지상에서 오아시스가 절규했다.
고작 자신을 위해 희생한 동료의 죽음에 좌절하고 분노했다.
그의 마음과 럭의 희생을, 크라우젤은 헛되이 만들지 않았다.
럭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연계시켰다.
“뮐러류 무쌍검.”
하이랭커의 궁극기 보유량은 평균 5개다. 다만 궁극기마다 위력의 편차가 컸다.
초반부에 얻은 궁극기의 경우, 종류에 따라서 후반부로 갈수록 궁극기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드의 검무에 ‘융합’ 기능이 없었다면, 그리드의 궁극기 중 하나는 여전히 살(殺)이었을 것이다.
즉, 그리드처럼 특별한 강자들의 궁극기는 하나 같이 위력이 강력하며 종류 또한 많다는 의미다.
그리고 현재 플레이어의 기준에서 ‘특별한 강자’ 중 하나가 바로 크라우젤이다.
그리드와 비교해서 늘 몇 걸음씩 뒤처지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플레이어들의 동경이고 우상이었다.
“오의, 행성 깎기.”
꾸준히 자신의 검술을 창조해왔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뮐러의 비급마저 습득한 당대의 검성.
그가 양손에 거머쥔 두 자루의 검이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무수한 검광을 그리자 엘리고스의 몸이 허공으로 부유하며 난자당했다.
“...가소롭다!”
콰르르륵!
아쉽게도 파괴력이 부족했다.
믹서 속 육편처럼 갈려나가는 엘리고스의 육신이 실시간으로 회복됐다. 파괴를 재생이 웃돌았다. 검기의 소용돌이를 꿰뚫고 나온 놈의 손이 새카만 마기를 머금고 있었다.
불꽃을 연상시키는 마기였다.
마기가 크라우젤의 검기에 베일 때마다 사방팔방으로 튀어 날리며 들불처럼 번졌다. 켈베로스의 새카만 털에 달라붙어 활활 타올랐다.
“어, 어어...?”
“미친...”
지상에서 켈베로스의 어그로를 끌고 있던 원정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새까만 불길에 휩싸인 켈베로스가 마치 자신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포효했기 때문이다. 한층 더 강해졌다는 사실이 공기의 흐름만으로 생생하게 실감됐다.
엘리고스의 마기가 켈베로스에게 버프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희망을 버려라. 적응해버렸으니.”
엘리고스 본인도 강해졌다.
아니, 강해졌다는 표현보단 본인의 발언대로 적응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지옥과 지상이 섞이며 원정대의 지옥 페널티가 감소한 것과 반대로 엘리고스는 오히려 페널티가 생긴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약화된 신체능력과 마기의 흐름에 지금 막 적응을 해버린 것이다.
엘리고스는 인식과 현실의 괴리에 더 이상 애를 먹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자각했다. 육체에 전도되는 마기의 흐름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옳게 조정(調整)한다.
그러자,
꽈아아아아앙!!
크라우젤의 눈에는 보였던 엘리고스의 약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초감각이 마구 경종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큭!”
“너, 아직 약하다고.”
검기의 폭풍을 꿰뚫고, 흐트러뜨린 엘리고스의 주먹이 그대로 크라우젤의 안면에 꽂힌다.
크라우젤은 어서 피하라는 초감각의 경고를 무시했다. 습관처럼 물러나려는 발을 고정시켰다.
‘약하다고?’
검성이 되고 여러 해가 흘렀다.
동대륙에서 미르를 상대로 수십 번을 싸웠다.
그런데 여전히 약자 취급을 받아야한다고?
용납 못한다.
철컥!
이를 악 문 크라우젤이 양손에 쥔 두 자루 검을 동시에 납검한다. 두 팔이 자연스럽게 교차됐다.
무방비의 극치였다.
엘리고스의 주먹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크라우젤의 안면에 꽂혔다. 생명력을 뭉텅이로 깎는 마기를 두른 채였다.
“하핫! 포기한 거냐...”
엘리고스의 음성이 도중에 끊겼다.
사선으로 교차한 두 개의 검광이 그를 참수(斬首)했다.
극검의 발도술과 럭의 카운터를 접목시킨 검술.
지금 막 탄생한 쌍아격(雙牙擊)이, 우주 검과 프로미넌스 웨이브 이후 최초로 엘리고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크라우젤.”
발밑의 그림자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피투성이가 된 채 휘청거리던 크라우젤이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었고,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페이커의 손이 그를 붙잡아 그림자 속으로 데려갔다.
직후.
콰아아앙!!
마기의 창이 방금까지 크라우젤이 섰던 자리에 꽂혔다.
주르륵.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목을 이어붙이는 엘리고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었다.
‘검성이란 자고로 최강의 인간이라 하였나.’
그 구전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증명하듯, 당대의 검성은 실시간으로 성장 중이다.
엘리고스는 아쉬움을 느꼈다.
당대의 검성이 보다 완전해진 상태에서 찾아왔다면, 놈을 죽이는 행위 자체가 업적이 되어서 지옥의 지고한 위엄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됐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성장하곤 있다지만 한참 부족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작지 않은 신’의 사도들과 비교해도 한 급 아래였다. 잠재력을 가늠컨대 머잖아 동급이 될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다.
‘더 볼 것도 없다. 켈베로스의 상태도 좋지 않으니 이만 끝낸다.’
인간 몇 놈이 켈베로스의 시선을 떨쳐내고 허공을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림자에 숨어든 검성과 란스티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맞춰서 협공을 노리는 낌새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 와서 확신하건데 켈베로스의 상태가 심각하게 나빴다.
무식하게 큰 대검을 든 검사에게 발등을 찍히고 정강이를 얻어맞을 때마다 몸서리치는 꼴이 상당히 허술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켈베로스는 지옥의 파수꾼이다. 녀석이 등장했던 신화의 무대 또한 지옥이었다.
지옥을 떠나본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지옥과 지상이 혼재하게 된 작금의 환경에 켈베로스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게 느껴졌다. 좋을 게 없는 반응이다.
콰자작!!
엘리고스의 양손에서 어둠이 명멸했다.
여태까진 볼 수 없던 짙은 어둠이었다. 그것이 찰나지간에 나타났다 사라지자 세상이 순간 하얗게 보였다.
“이제 그만 죽음에 순응해라. 죽음이야말로 지옥의 순리이니.”
푸화하하하학!!
엘리고스가 인지하는 모든 공간에 창림(槍林)이 솟구쳤다. 삶을 부정하는 마기로 벼른 창의 숲이다. 이 영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엘리고스와 켈베로스를 제외하곤 없...
“...?”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리던 엘리고스가 이질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창림의 전개 속도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무척 느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를 한 발 늦게 알았다.
지옥 규제.
데빌슬레이어가 지옥을 억압했다.
지옥을 지옥이 아니게끔 만들었다.
그 탓에 마기의 흐름에 문제가 생겼고 마기를 양분으로 삼는 창림의 성장이 현저히 느려졌다.
‘계산 능력이?’
대다수의 악마들이 착각하는 사실이지만, 데빌슬레이어의 지옥 규제 스킬은 만능이 아니다.
규제라는 단어의 뜻을 알면 추측하기 쉽다.
규제란, 규칙이나 규정을 세워 제한하는 것.
말인 즉, 데빌슬레이어의 지옥 규제는 지옥을 단순히 힘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지옥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모든 환경에 변형이 생길만한 규칙을 일일이 적용시켜 지옥이 형태를 잃도록 유도하는 것에 불과했다.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주변의 환경을 파악하는 통찰력, 환경을 효과적으로 바꾸는 계산 능력, 바뀐 환경을 고정시킬 마력의 제어 능력 등.
요구되는 능력과 조건이 너무 많았다.
한데 당대의 데빌슬레이어는 쉬지 않고 저격을 날려대면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알렉스가 전투 중에 지옥 규제를 사용했단 기록이 있었나?’
적어도 엘리고스의 기억에는 없다.
전대 데빌슬레이어 알렉스는 끔찍하게 강했지만, 당대 같은 신기(神技)는 보여주지 못했다. 사전에 지옥 규제를 설치한 뒤 전투에 돌입하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했었다.
유라의 솜씨에 엘리고스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때.
창림이 뭉개져 진흙처럼 깔린 지면을 튕기듯 오른 인간들이 협공을 가해왔다. 강력한 바람마법이 그들에게 일시적인 비행 능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켈베로스의 등 위라는 고지(高地)를 무색하게 만드는 비행이었다.
인간들 틈에 단 한 명 섞여 있는 바람술사가 혼자서 일으킨 이적이다.
‘영혼이 탐날 정도의 재능을 가진 놈들이 많군.’
사뭇 진지해진 엘리고스의 권, 장, 각이 휘몰아쳤다. 인간들의 협공을 무위로 돌리며 반격을 일삼았다.
마기의 흐름을 재구성하면서다.
엘리고스는 규제 당한 지옥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마기를 운용할 심산이었다. 자신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 그만이었기에.
꽈작!
허리를 꺾어 데빌슬레이어의 저격을 피하고, 무식한 대검을 두 손으로 간신히 붙잡아 세우고, 하단 그림자에서 솟아나온 검성의 검을 발등으로 흘리고, 상단에서 나타난 란스티어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꿈치를 쑤셔 넣어 어깨를 분지르며.
어느새 마기의 조정(調整)을 마친 엘리고스가 재차 창림을 전개하는 그때였다.
“...!”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옥 규제가 풀렸다.
오류가 발생하며 창림의 전개에 너무 과도한 마기가 빨렸다.
엘리고스와 연동되어 있는 수천, 수만 개의 마창 하나하나가 엘리고스를 말려 죽일 기세로 거칠게 마기를 빨아갔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엘리고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낯선 두려움이 그의 뇌를 오싹하게 저몄다.
‘의도적으로?’
당대 데빌슬레이어 유라.
흑기사 엘리고스의 의식과 시선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당당하게.
지옥을 멸하는 숙명을 타고는 존재의 위풍이었다.
지옥 원정 기간 동안 최고의 플레이어들을 이끌어온 리더다운 면모였다.
그녀에게,
키야아아아!!
켈베로스가 돌진했다. 주변에 마구잡이로 쏘아대던 독무와 화염을 일점으로 집중시키면서다. 정확히 유라에게 겨냥했다.
엘리고스의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다. 위험을 느낀 짐승의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지축이 흔들리며 유라의 균형이 무너졌고, 원정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그 순간.
“흑기사여. 내 그대와는 늘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느니라.”
정체불명의 여성이 유라의 눈앞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쓴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으나, 작은 체구와 앳된 음성이 마치 소녀 같았다. 점잖고 엄숙한 말투가 어색하게 다가왔다.
패왕 레라지에.
패배를 모른다는 서열 제10위의 대악마가 인간의 편으로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