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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04화 (1,394/1,794)

템빨 70권 - 13화

아스모펠이 긴장했다.

안 그래도 최근 실력이 늘지 않아 불안하던 차에 탑주가 말을 고르자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근심했다.

착각이었다.

“그대의 검에서 타인의 그림자를 보았네. 아마도 그대는 열등감을 양분으로 삼는 듯하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나름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려다가 그리 된 듯한데... 노력은 가상하네만 틀려먹었어.”

최강의 2인자.

아스모펠은 1인자의 발자취를 쫓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1인자의 힘을 재현하고 한계를 초월한다.

여기서 1인자란 대개 피아로를 뜻했지만 브라함인 경우도 있었다.

아스모펠은 피아로의 힘을 재현해 무신의 추종자 시절 카일에게 잠시나마 우위를 점했던 전적이 있으며,

브라함과 싸워 패배하고 영감을 얻어 만든 마법통찰을 이용해 테러를 방지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쳐왔다.

그 모든 것을, 비반이 부정했다.

“그대의 방식으론 대성할 수 없네. 평생 노력해봤자 그대가 질투하며 숭배하는 대상보다 강해질 도리가 없으니. 지금 그대는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은 격일세.”

아스모펠은 치부를 드러낸 심정이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피아로의 기술을 따라 썼던 모습을 떠올린 일행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였고,

싱클레드는 힐난했다.

“저 병신은 여전히. 쯧.”

거친 욕설이었다.

아스모펠이 감내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고개 숙인 아스모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여전히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추악한 감정 때문에 수많은 벗과 벗의 가족들을 해쳐놓고도 변하지 못했습니다. 타고나길 글러 먹은 인간인 거지요. 저는 아마 평생토록 바뀌지 못할 겁니다.”

그나마 과거보다 나은 사실은, 열등감이 단순한 질투로 변질되진 않는단 점이다.

비반이 간파한대로 아스모펠은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고자 노력해왔다. 정말로 부단히도 애썼다.

그 결과 피아로를 질투하지 않고 숭배하게 되었다.

브라함에게 패배했을 때도 분노하기보다 존경하며 영감으로 삼았다.

묵묵히 그들의 그림자를 쫓아왔다.

그것이 나의 한계를 결정지은 거라면, 한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한계를 부수겠답시고 발악하다가 또 다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간... 추악한 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하여 과거와 같은 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아스모펠...”

마음을 굳히며 표정을 지우는 아스모펠의 얼굴을 엿본 일행이 안타까워했다.

이번엔 싱클레드도 조용했다.

아스모펠의 고해는 매번 그의 마음을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비반이 말했다.

“열등감은 인간의 천성 중 하나일세. 단순히 추악한 감정이라고 선을 긋기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원동력이지. 나는 자네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자네의 기존 방법이 썩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하지만 자네에 한해선 틀렸네. 자네의 재능은 고작 그런 식으로 썩힐만한 게 아니니.”

“...”

“자네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를 향한 신뢰일세. 타인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마주해보게나.”

“아...”

아스모펠이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배신했던 옛 벗들을 찾아 떠났던 속죄의 여정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을 마주했었다.

속죄하기 위해선 죄를 마주해야했으니, 죄를 범했을 당시의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꼈던 것들이 있다.

“...고인의 말씀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가슴에 잘 새기겠습니다.”

아스모펠은 직감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자신이 크게 성장해나갈 거란 사실을.

스스로 정해놓았던 한계가 깨지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했다.

명백한 기연이었다.

일행이 비반을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와 존경이 담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인물은 다름 아닌 피아로였다.

의외였다.

그는 아직 비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전이었으니.

“...이젠 그대밖에 남지 않았군.”

왜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비반이 피아로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별 같은 재능을 지닌 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눈빛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서 알고 싶었다.

“고인께 가르침을 받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피아로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야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싶었다.

도중에 눈치 챈 것이다.

눈앞의 검탑주가 자신과 똑같은 무쌍심법을 익히고 있단 사실을.

심지어 대성한 듯했다.

주군께서 알려주신 무쌍심법의 구결이 누구로부터 전해진 건지 알 것 같았다.

피아로는 눈앞의 검탑주가 스승처럼 느껴졌다. 응당 예절을 다하고 극진히 섬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자고로 무인이란 칼과 호미로 대화를 나누는 법.

일단은 대련에서 진심을 전한 뒤에 절을 올리는 것이 순리이리라.

“오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준 비반이 검파 위에 손을 얹었다.

아멜다가 발검술의 준비 자세라고 해석했던 기수식이다.

하지만 피아로는 저 자세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섣불리 편견을 품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나갔다. 우선은 씨앗을 뿌렸다.

“...?”

비반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확장된 동공에 자연경의 기로 빚어진 유형의 씨앗들이 비산하는 광경이 비추었다.

수천 개의 씨앗들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피아로가 빠르게 출수했다.

양손에 호미와 낫을 꺼내 쥐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비반이 버럭 소리쳤다.

“잠깐!!”

“...?”

“...?”

일행이 의아해했다.

여태껏 고수답게 차분한 모습만 보여줬던 비반이 대놓고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이유를 눈치 챈 피아로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무쌍심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눈치 채신 거로구나.’

피아로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비반의 오성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검성인 그는 검과 검술에 궁극의 통찰을 보여주는 반면 다른 분야엔 영 젬병이었다.

농부의 본질 따위 관심도 없었고 간파하지도 못했다.

‘농부라고?’

비반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호미와 낫을 무기로 다루며 싸우려드는 농부를 오늘 처음 보았다.

예전에 템빨국에서 보았던 고강한 농부도 허리에 검을 패용하지 않았나. 심지어 마법을 익힌 흔적까지 있었다.

한데 눈앞의 농부는 농기구로 싸우려드는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부패한 정권에 맞서 농기구를 들고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은 정녕 오늘이 처음이다.

한참을 침묵한 채 피아로를 바라보던 비반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농부가 왜 검탑에 올랐는가?”

“탑주께 인사를 드리고 상황에 따라 가르침을 얻기 위해...”

“농부가 왜 내게 가르침을 바라느냐 이 말일세! 자네는 내가 농부로 보이는가? 허! 고얀!”

“...”

본래부터 전설의 농부는 편견에 맞서 싸워야하는 직업이었다.

피아로는 오해 받는 일이 꽤 익숙했다.

하지만... 설마 이쯤 되는 고인에게까지 오해를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내가 무쌍심법을 연마했단 사실을 못 알아보시는 건가?’

아멜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 대장 어쩜 좋아. 그러게 왜 농부가 되어선~ 깔깔깔!”

“흠흠... 피아로, 일단 진정하게. 지금 자네 얼굴이 너무 붉어.”

“...피아로?”

단테가 피아로를 진정시키려고 이름을 부른 순간.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비반의 귀가 쫑긋 섰다.

피아로.

그 이름이 비반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있었다.

그리드가 알려줬던 이름이다.

무쌍검법의 아류인 무상검법을 익혔다던...

그 또한 인연이라 여겼던 비반은 그럼 피아로 그자에게 무쌍심법의 구결을 전수하라 일렀었고...

“...자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비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자네, 왜 농부가 된 게지?”

피아로가 당당히 대답했다.

“그것이 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쌍심법은 익혔고?”

“예, 고인의 호의 덕분이겠지요.”

“무쌍심법을 익혔는데 왜 아직도 농부인 게지?”

“무슨 말씀이신지...?”

“무쌍심법을 익혔으면 당연히 다시 검사의 길을 걸어야하는 거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무상농법에 무쌍심법을 녹여내어 무쌍농법으로 진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닥치게! 이런...! 이런 빌어 처먹을!!”

“...”

“기껏 훌륭한 검사가 되라고 구결을 알려줬더니, 뭐? 농부라고? 이런 고얀! 우라질!!”

“...”

비반은 검성이다.

검과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당연히 남달랐다.

무쌍심법의 후인이 당연히 훌륭한 검사라 되리라 믿었고, 멀리서나마 응원해왔건만 농부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납득이 안 됐다.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고귀한 무쌍심법을 농사 짓는데 써먹다니...!”

피아로가 농사를 짓는다고 그리드에게 들었던 것 같긴 하다.

당연히 적당한 취미 생활일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취미가 아닌 생업으로 삼았다고 했어도 내심 농담으로 치부하며 한 귀로 흘렸을 거다.

만약 진실로 삿된 길(농업)에 빠졌을지언정, 무쌍심법을 익히면 다시 올바른 검사의 길을 걷게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무쌍심법은 무려 검성이 만들고 배웠던 심법이니까.

한데... 한데 이 무슨...

피아로가 이유도 모른 채 원망의 대상이 된 그때.

“내 자네에게 실망...!”

삿대질하며 버럭버럭 소리치던 비반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거대한 악의 기운을 느낀 까닭이다.

‘한 자릿수 군주... 그것도 최상위권의 군주다.’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의 출현.

검성 비반의 감각은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 거악의 기운을 감지할 정도로 초월적이었다.

‘전쟁의 규모가 예상보다 커질 것이다. 이래서야 수많은 목숨이 덧없이 사라질 터인데.’

지혜의 탑에선 이번 인마대전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었다.

인간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위기라고 해석했다는 뜻.

즉, 드래곤 출현 사태와 비견될 정도의 재해가 아니라는 의미다.

비반이 굳이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 자명한 사실 아닌가...

평소처럼 탑에 갇혀 세상일을 모르는 상태였다면 또 모를까, 지금은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인데 외면함이 옳은가?

“...이보게 피아로.”

“예.”

바락바락 성을 내다가 갑자기 침묵하는 탑주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피아로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탑주와 대련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농부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설파하고 싶었다.

마음을 알아준 걸까.

“오게. 자네의 실력을 확인해봐야겠네.”

탑주가 대련을 허락했다.

비반은 냉정해지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현재 인류의 수준을 파악하지도 못한 마당에 걱정부터 앞서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하여 우선 피아로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

비록 농부이긴 해도 명색이 무쌍심법의 전수자 아닌가.

의외로 실력이 뛰어날 수도 있다...

“기꺼이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피아로가 급성장을 전개했다.

앞서 뿌려두었던 씨앗들이 급격히 성장하자 검탑의 정상은 논밭으로 변했다.

농부의 영역이었다.

“이런 우라질...”

기껏 냉정해졌던 비반의 심사가 다시 뒤틀렸다.

***

“헤에...”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어둠의 도시.

이번엔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을까.

전혀 가늠이 안 되지만, 꿈자리가 사나웠던 이유가 뭔지는 알 것 같다.

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마리로즈가 먼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마기를 향해 미소 지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네.”

스르륵...

요염하게 흔들린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유일한 주민이 떠나자, 도시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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