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20화
“비반! 비반!!”
비반과 제라툴을 집어삼킨 검기의 장막.
억만 개의 칼날과 칼날의 파편이 뒤얽혀 서로의 빛을 반사하고, 흡수하는 광경이 설핏 은하를 연상시켰다. 예술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잔혹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때리고, 할퀴고, 쥐어뜯는 그의 두 손은 어느새 피투성이다.
너덜거리는 살갗 사이로 뼈마디가 보일 지경이었다.
“전하!!”
“고, 고정하세요!”
한때 레베카의 딸 후보였던 여인들.
본래 그녀들은 교단의 인형이 되어 사지로 내몰렸을 운명이다.
하지만 데미안이 구출하고, 그리드가 보살펴준 덕분에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들이 기꺼이 로드에게 헌신해온 가장 큰 이유는, 그리드와 데미안이 그것을 바라서였다. 은인들을 향한 그녀들의 마음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비반이라는 인물과 그리드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진 몰라도, 비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광분하는 은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당장 달려가 붙잡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신분은 대륙에서 가장 고귀했다.
템빨국의 왕이자 신이었으니.
감히 그의 옥체에 손을 댈 수 없어, 300명의 여인은 울먹이며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동안 이사벨과 블란드를 수습해온 로드도 잠자코 있었다.
로드는 그리드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함부로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또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무너지듯 주저앉은 그리드가 거친 욕설을 토했다.
자신을 부모로, 왕으로,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
가슴에 꽉 찬 이 감정을 당장 분출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드는 분노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난입한 제라툴에게 휘둘리는 상황이 화가 났다.
비반의 선택에도 짜증을 느꼈다.
나와 함께 싸우는 편이 그나마 승산을 엿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굳이 혼자 나선 거지?
한 번 죽으면 끝인 주제에, 왜...
“왜 마지막까지 이딴 선물이나 주고...”
정말이지 바보 같은 인간이다.
왜 늘 베풀기만 하고 돌려받을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인류를 위해 스스로를 탑에 가둔 결사들의 기질이란 전부 그와 같을까. 평생을 희생해온 만큼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당연하고 쉬운 걸까.
...그건 너무 가혹하다.
“제기랄!!”
쾅! 쾅! 쾅...!
다시 일어나 장막을 두드리는 그리드의 모습이 필사적이다.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가장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칸과 작별했을 때의 기억이다.
허망히 잿빛으로 흩어지는 그를 품에 안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두 번 다신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아버지 같았던 칸과는 다르지만, 비반도 소중한 인연임은 분명하다.
감사한 기억이 몹시 많았다.
언젠간 반드시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검을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하기도 했다.
“근데 내 탓에...”
그리드의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에 피가 쏠려서 현기증이 난 것이다.
몸을 가누지 않고 그대로 쓰러진 그의 시야에 푸른 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느긋하게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현재 상황을 침착하게 되짚어 봤다.
검기의 장막?
낙월검으로 베어 부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낙월검이 비장의 무기라는 점이다.
낙월검을 소모한 상태로 제라툴에게 승산을 엿보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기껏 장막을 펼쳐 제라툴을 가둔 비반의 수고를 헛되이 만들 수도 있다.
망자 언어 해독본.
비반이 남긴 선물의 가치를 가늠해본다.
용도를 파악하고 결과를 측정한다.
‘어쩌면 비반은...’
그리드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명령을 내려주세요.”
시리도록 맑은 음성이 그리드의 귓전에 스몄다.
갑자기 눈앞에 일렁이는 푸른 물결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메르세데스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동자는 고요했고, 표정은 차분했다.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같아서, 그리드를 막연히 안심시켰다.
“제가 주군의 의지를 실천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도 ‘메르세데스’가 새로운 기사도를 세웁니다.]
그리드의 손을 감싸는 메르세데스의 두 손은 무척 차가웠다. 금속으로 짜인 건틀릿을 무장해서였다.
하지만 그리드의 마음은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메르세데스에게 의지해 몸을 일으킨 그의 곁으로 4쌍의 날개를 활짝 펼친 사리엘이 강림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도 도착했다.
피아로의 건강한 치아가 오늘따라 유독 반짝였다.
“주군의 적은 주군의 영토를 더욱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가 될 뿐이옵니다.”
동태눈을 연상시켰던 아스모펠의 눈빛이 전과 달리 깊고 투명했다.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 저를 지켜봐주십시오.”
“...”
그리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분노와 불안에 물들어 있던 그의 몸과 마음이 떨림을 멎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판단한다.
“메르세데스, 혜안으로 장막을 분석해줘.”
“네.”
“사리엘, 메르세데스의 분석이 끝나는 즉시 장막을 파괴해.”
“맡겨주세요.”
다소의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다.
하지만 낙월검을 아껴야 승산을 엿볼 수 있다.
애초에 지금의 그리드에겐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비반은 충분히 버텨줄 것이다.
버틸 자신이 있으니 홀로 장막에 투신한 거겠지.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상대는 무신이다. 여태껏 없던 힘든 싸움이 될 거야.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하지만 싸워야 돼. 우리가 오늘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토록 놈에게 휘둘리고 말 거다.”
“예!”
메르세데스, 피아로, 사리엘, 아스모펠, 싱클레드, 아멜다, 단테, 켄트릭...
그리드의 곁으로 도열한 템빨국의 최강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신을 상대로, 그것도 무신을 상대로 전혀 두려움이 없는 태도였다.
반드시 지켜야 할 존엄이라는 게 있음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그리드는 비반에게 받았던 선물을 펼쳤다.
[<망자 언어 해독본>의 내용을 확인합니다.]
[절대자가 공들여 기술한 주석이 당신의 이해를 크게 돕습니다.]
[당신의 높은 지력이 <망자 언어 해독본>의 지식을 온전히 흡수합니다.]
[이제 당신은 망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이 대번에 주입된 여파는 컸다.
그리드는 아찔한 두통을 느꼈다. 두개골 속을 파고든 누군가의 손이 뇌를 주무르는 듯한 감각이 고통스러웠다.
목까지 치미는 구역질을 간신히 삼킨 그가 마드라의 일기장을 꺼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스아아...
알 수 없던 문자들이 단어가 되고, 문장을 이루어 이야기로 나열됨에 따라 그리드의 의식이 침잠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수백 년 전의 번헨 열도에 서있었다.
그곳에 홀로 고독히 존재하며 미쳐가는 마드라의 데스나이트를 마주보았다. 혹은 하나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감정의 격류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마드라의 고통과 분노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건 이미 과거에 충분히 했다.
지금의 마드라는 이성을 잃은 상태라 교감을 나누기 힘든 면도 있었다.
그리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했다.
현재의 인연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망령을 청산했다.
‘이제 그만 푹 쉬세요.’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무패왕 마드라의 일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
검성 비반은 심중유검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의지가 곧 검이며, 그의 검은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시공간을 베어 도려내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가 펼친 검기의 장막은 세상과 완전히 유리되어 시간조차 멈춰있었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억만 개의 칼날과 칼날의 파편은 하나하나에 강력한 의지를 담았다.
제라툴을 향한 살의였다.
“아이야.”
비반이 등장한 뒤부터 지금까지.
뒷짐 지고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보던 제라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무(武)의 재능을 몹시 아낀다. 네가 처음 검을 쥐었던 날부터 검의 극의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내 너를 쭉 지켜보았다. 돌이켜 보거라. 너는 필시 나의 따스한 온정을 느꼈을 터이다.”
멋대로 지껄이는 제라툴의 몸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적자색의 투기가 비반의 심검을 모조리 밀어내고 있었다.
“너는 어찌 나의 호의를 잊고 감히 내게 검을 겨누느냐?”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네놈이 나를 지켜봐왔는지, 아닌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아느냔 말이다.”
“...”
“오호, 이제야 알겠구나. 내가 벽에 가로막혀 괴로워 할 때마다 비급을 내밀어 쉬운 길로 미혹하고 타락시키려 했던 악마의 정체가 바로 네놈이었구나. 너는 미친 게냐? 무슨 염치로 그 추악한 과거를 호의로 치장하는 게지?”
“내가 준 시련을 극복했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궤변만 지껄이기는. 네놈은 존중을 바라지 마라. 지금 당장의 행동만 놓고 봐도 네게는 신을 자처할 자격이 없으니.”
악마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때 기껏 인계에 강림한 무신 제라툴은 사람들을 돕지 않고 템빨국을 침략해 그리드를 해치려 들었다.
사람들이 믿고 바라온 신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비반의 속내를 읽은 제라툴이 실소했다.
“아이야 너는 크게 착각하고 있다. 조금 전 나는 230,927명의 인간을 구원하였다. 무력하여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들의 기도에 호응하여 인계에 강림하였고, 그들의 꿈에 현현하여 힘을 부여하고 기회를 주었다. 230,927개의 목숨을 살린 격이다. 이런 나를 부정하는 건 억지밖에 안 되지 않겠느냐.”
검기의 장막은 비반의 심상이다.
비반의 마음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비반은 제라툴과 교감하고 있었다. 제라툴의 속내를 읽고 그의 주장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알게 됐다.
무신 제라툴은 인계에 강림한 순간 사람들의 기도에 호응했다.
전쟁에 휩쓸려 죽어가던 230,927명의 목숨을 살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힘을 주었다.
...진실이다.
하지만 비반은 더 큰 혐오를 느꼈다.
“네놈... 그들에게 비급을 쥐어줬군.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을 좇으며 오직 너만을 숭배하게 만들었구나.”
무신의 추종자.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른다.
본래의 삶을 완전히 잊은 채 단지 무신의 비급을 찾아 평생토록 헤맬 뿐이다.
그건 결코 숭고한 행위가 아니었다.
제라툴의 이름과 가치를 높이며 제라툴을 강화시키는 왜곡 된 신앙에 불과했다.
“어찌 그걸 구원이라고 할 수 있지?”
“힘을 원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었다. 더욱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 영원히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면 무엇이 구원이더냐.”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거구나, 네놈은.”
비반이 품에서 검을 꺼냈다.
길이가 짧고 폭이 좁은 단도였다. 짐승의 가죽을 벗길 때나 사용해온 물건이다.
물론 비반은 검성이기에 맨손조차 보검처럼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무신.
여린 단도가 유독 아쉽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겠나.
본래 사용해온 검은 그리드와의 대련에서 파괴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인간에게 공감하지 못해 소망조차 곡해하는 네놈을, 나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 같은 괴물을 낳고 방관하는 레베카 여신 또한 부정한다.”
이 세상은, 인간에게 너무 가혹하다.
드래곤.
숨결만으로 수십만의 인간을 해치는 절대자.
그들은 단지 본능과 욕구에 사로잡힌 짐승일 뿐이다.
문득 기분에 따라 인간을 몰살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토록 위태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신은 돌보지 않는다.
비반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가엾어서였다.
하여 검을 휘둘렀다.
세상의 불합리를, 불합리를 낳은 괴물을 베기 위해 그의 검은 여태껏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품었다.
푸화하학!!
제라툴의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억만 개의 칼날에도 꿰뚫리지 않았던 적자색의 투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비반의 배에도 구멍이 뚫렸다.
“어리석은... 네가 아무리 부정한다 한들 나는 신이다. 인간이 신을 해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냐.”
허물어지는 비반을 바라보는 제라툴의 상처는 어느새 회복되어 있었다.
반면 비반의 초점은 흐릿해졌다.
“...?”
성큼 한 걸음 나아가 비반의 심장을 부수려던 제라툴이 멈칫했다.
자신의 존재감이 옅어지는 걸 느낀 까닭이다.
힘을 갈망하는 인간들의 소망을 이용해 인계에 강림하고, 인간들의 소망을 이뤄줌으로써 충분한 시간을 확보했건만,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5분이 되어간다고...? 네 녀석, 설마 처음부터?”
시공간을 베어 시간의 흐름을 멈춘 게 아니라, 뒤틀어 가속시켰던 건가?
깨달은 제라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비반을 죽이고 템빨국을 파괴하기 위해 출수를 서둘렀다.
기껏 인계에 강림한 만큼 목적은 이뤄야하지 않겠나.
푸욱!!
비반의 심장을 제라툴의 손이 꿰뚫었다.
비반의 검 역시 제라툴의 심장을 쑤셨다.
하지만 둘에겐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제라툴은 표정의 변화조차 없는 반면 비반은 움직임을 멈췄다. 눈동자에서 빛을 잃고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꽈차앙─!!
검기의 장막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제라툴 입장에선 공교롭게도, 외부로부터 발생한 현상이었다.
“오십만대군 멸살검.”
단 한 번의 참격.
낙월검으로 행해진 이적이 제라툴의 투기를 박살내고 손목을 갈랐다.
제라툴의 신형은 그리드의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손목이 잘려나간 즉시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리드에게 살수를 펼쳤다.
날카로운 예기가 집약된 수도가 그리드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건 뚫린다.
끔찍한 고통을 직감하는 그리드였지만 방어도, 반격도 포기했다.
비반을 시야에 담고 순보를 사용했다.
콰직!
그리드의 목이 뜯겨나가며 선혈을 흩뿌렸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신음을 삼켰다. 비반을 품에 안고 서둘러 백도를 꺼냈다. 무릉도원에서 얻었던 ‘완전 회복 물품’이다. 한 사람당 평생에 한 번밖에 복용 못하는.
그리드가 그것을 비반의 입에 물려주려는 순간,
“나를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인 제라툴의 발꿈치가 그리드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메르세데스와 사리엘, 피아로와 아스모펠, 그리고 갓 핸드가 변신한 마장기들과 노에, 랜디.
거기에 직계들과 기사들의 공격을 허용하면서도 집요하게 그리드만 노렸다.
제라툴 본인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비반의 목숨만이라도 가져가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정수리에 닿는 충격의 파동을 감지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행동했다. 비반의 입에 백도를 쑤셔 넣었다.
큰 희생을 각오한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자신이 치명상을 입으면 승산이 크게 줄어든단 사실을 알고도, 인연을 지키고자 했다.
한데 각오가 무색하게도.
콰창!
제라툴의 공격이 그리드에게 닿지 못하고 멀찍이 튕겨나갔다.
“그쯤 했으면 물러나시오.”
고저 없이 낮은 음성이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명료하다. 귀족적인 품격이 있었다.
인간을 상대로 감정에 휩쓸렸던 무신 제라툴을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 깃든 목소리였다.
“하야테...”
초월자의 궁극.
절대자의 한 면.
제라툴도 좌시하기 힘든 용살자 하야테가 강림해 그리드의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