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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12화 (1,402/1,794)

템빨 70권 - 21화

신은 개념에 가깝다.

숭배 받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잊히지 않는 이상 소멸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죽이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야테...”

제라툴은 충분한 위협을 느꼈다.

용살.

하야테는 신들조차 남기지 못한 업적을 이룬 존재다.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드래곤이 싸울 일은 ‘없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하야테의 업적을 폄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영겁의 시간 동안 무한히 반복되어온 세계.

그 모든 시간과 세계를 통틀어도 혼자서 용을 죽인 인간은 하야테가 유일했다. 우연과 행운이 뒷받침 되었다고 하나 결과가 그렇다.

이레귤러 중의 이레귤러.

하야테는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저놈이 왜 사람들 앞에 나선 거지?’

같은 결사인 비반을 구하려고?

아니, 그럴 리 없다.

결사들의 목숨은 초개와도 같다.

드래곤과 맞서 싸우겠노라 결심한 시점부터 그들의 목숨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서로의 생사에 되도록 무던하고자 노력해왔을 터다.

심지어 하야테는 탑을 떠나는 일을 극단적으로 꺼려한다.

자신의 기척이 드래곤들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반을 구하고자 했다면 진즉에 나섰을 터.’

하야테는 비반의 위기 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그리드를 도우려고?’

거기까지 떠올린 제라툴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리드는 레베카가 베풀어준 자비와 은혜 덕분에 힘을 얻고 성장해왔다.

놈에게 깃들었던 삼신의 축복이 지금의 놈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놈은 레베카를 배신했다.

제멋대로 신을 참칭하고 레베카교를 탄압하는 등, 아스가르드를 아주 우습게 여겼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배은망덕한 놈인 것이다.

한데 천벌을 받기는커녕 잘만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치우와 하야테, 두 경계 대상들의 비호를 받으며.

제라툴은 커다란 분노와 증오에 휩싸였다.

불쾌했다.

위대한 자신이 이따위 저급한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상상해본 적조차 없기에.

“...이쯤 하고 물러나라고? 하야테, 마땅히 숭배해야 할 신에게 감히 명령하는 것이냐.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제라툴의 감정이 왜곡됐다.

그리드에게 향했던 분노와 증오가 하야테에게 향했다.

어쩔 수 없다.

하야테가 그리드를 지키듯 선 실정이다.

이 불쾌한 감정들을 그리드에게 쏟아 붓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하야테와 충돌해야 했다.

제라툴의 기세를 읽은 하야테가 소매를 고이 접었다.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하야테가 인간이었던 시절의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세속적이었다. 귀족은 귀족다움을 강요당했고 하야테는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탑을 세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이 증거다.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그대들을 동정하게 된다오. 정서적으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대들에게 영겁의 시간이 주어진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싶소. 제라툴, 그대들을 바라보는 여신의 눈빛은 평안하오? 혹 연민이 깃들어 있지는 않소이까.”

“...하찮은 도발을.”

제라툴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눈빛은 미세하게 떨렸다.

내심 당황하는 눈치였다. 단순히 화가 난 걸 수도 있다.

“삼켜요. 어서 삼키라고요.”

그리드는 여전히 비반을 품에 안고 있었다.

강제로 벌린 비반의 입에 백도를 우겨넣는 손끝이 떨렸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백도가 무척 부드럽고 과즙이 넘치는 과일이라는 점이었다.

달콤한 물을 뭉쳐놓은 것만 같아서, 비반이 씹지 못해도 과즙이 조금씩 식도로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혈색이 돌아오질 않는다.

빛을 잃고 새카맣게 죽은 눈동자가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설마...

그리드가 최악의 가설을 떠올렸다.

만약... 비반이 이미 백도를 먹었었다면?

“세희... 세희를 불러야...”

“비반과 제라툴의 대결이 빠르게 끝난 이유를 혹 눈치 챘소?”

거의 패닉에 빠진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질문했다.

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기사로 등록해놨던 루비를 소환하기 위해 동생의 이름을 외치기 바빴다.

하지만 응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재 라인하르트는 제라툴의 신격에 짓눌려 있다.

제라툴의 허가 없이 이곳을 출입하기 위해선 최소 제라툴에 근접하는 격을 쌓은 존재여야 했다.

예를 들면 하야테처럼 말이다.

“비반과 제라툴 양쪽 모두 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했기 때문이오. 그들이 내딛는 한 번의 보폭에 담긴 수만 가지의 가능성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 서로의 퇴로를 끊고 방어를 무위로 돌린 거지.”

“하야테 네놈... 나를 앞에 두고 그깟 놈을 상종하는 거냐.”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리드는 송장의 입에 복숭아를 밀어 넣을 뿐이고, 하야테는 대꾸도 않는 그리드에게 연신 떠들고 있었으며, 제라툴은 그런 하야테를 비난했으니.

“조용히 하세요.”

“뭐? 네놈은 또 뭐냐?”

소란 중에 제라툴이 황당해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다시 천상에 오르기 전에 하야테를 한 대라도 갈겨주려던 차에 별 같잖은 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까닭이다.

메르세데스였다.

조금 전 제라툴의 압도적인 무용을 직접 체험했던 그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착했다. 제라툴을 상대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당당히 앞길을 막아 선 것으로 모자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기세가 살벌하다.

“주군의 기연을 방해하지 말고 입을 닫으라고요.”

“하, 하...? 이 미친 잡것이 지금 대체 뭐라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흘리는 제라툴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감정이 또 한 번 왜곡된다.

그의 분노와 살의가 이번엔 메르세데스에게 향했다.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하야테는 검을 뽑았다. 시선과 자세가 평소의 행실만큼이나 차분하고 올곧다. 격조가 있었다. 교본을 보는 듯했다.

“궁극에 도달한 고수간의 싸움은 그렇듯 빠르게 끝나는 경우가 많소.”

“메르세데스! 물러나 있어!!”

“네.”

“신벌을 내리마!”

이쯤 되면 난장판을 넘어 개판이었다.

현장에 어떤 일체감이 없었다.

저벅.

그리드의 명령을 듣자마자 뒤로 물러서는 메르세데스.

콰르륵!

공간을 어그러뜨리며 발을 휘두르는 제라툴.

“즉, 동격의 고수와 싸워 이기기 위해선.”

여전히 장황연설을 늘어놓는 하야테.

“비반?”

미세하게 움직인 비반의 목젖을 느끼고 희망을 엿보는 그리드.

“음.”

물러날 수 없음을 깨닫고 제라툴에게 반격을 시도하는 메르세데스.

이처럼 모두가 따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 뛰어나서다.

그리드가 계속 비반에게 집중하는 것도, 메르세데스가 감히 무신의 앞길을 막아선 것도, 하야테가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과 제라툴의 목표가 실시간으로 바뀌는 것도.

그들 각자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와 달리 단순히 기분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행동하는 게 아니다.

가장 합당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고 있었다.

상위인지능력이라고 한다.

경험, 혹은 재능을 축적하여 연마하는 능력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갖추고 있었다.

다만 각자의 역할이 달라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일 뿐.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메르세데스는 전설이다. 쉽게 죽지 않는다. 게다가 혜안이 있다.

자신이 제라툴을 상대로 최소 7초를 버티는 게 가능하며, 그 안에 하야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메르세데스는 죽지 않아.’

그리드 또한 결말을 알았다.

굳이 자신이 나서봤자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판단하며 비반에게 집중했다.

‘하야테가 올 거다.’

처음에는 비반의 목숨, 다음은 그리드의 신격, 또 다음은 하야테에게 일격, 종국에는 메르세데스의 목숨...

목표를 계속해서 하한 조정하던 제라툴이 또 다시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한다.

왼 손으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찢어 뜯고, 오른 손으론 메르세데스의 검을 붙잡아 내리며, 진각을 밟아 회전시킨 어깨로 메르세데스의 가슴을 짓뭉갬과 동시에 몸을 숙여 자신의 발끝을 시야에 담는다.

메르세데스의 가랑이 사이에서 한껏 웅크린 그의 몸엔 극한의 탄력이 담겨있었다. 무릎을 펼치는 순간 빛살처럼 쏘아졌다.

단순히 비유라기엔 최소 음속을 돌파했다.

메르세데스가 산산조각 난 갑옷의 파편에 즉시 검기를 주입해 무기로 삼지 않았다면, 제라툴의 뺨에서 피가 흐를 일도 없었을 거다.

메르세데스의 혜안으로도 그의 동선을 쫓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드도 어렴풋이 봤을 뿐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현장의 사람들은 제라툴의 움직임을 아예 감지하지 못했다. 단지 빛이 번쩍였다고 느꼈다.

“압도적인.”

과연.

제라툴이 미소 지었다.

바로 코앞에 하야테가 다가와 있어서였다.

그리드에게 가르침을 준답시고 여전히 혼자 지껄이고 있는 꼴이 마뜩치 않았지만, 어찌됐든 좋았다.

천상에 오르기 전에 놈에게 한 방이라도 먹여주면 분노가 조금쯤은 사그라질 터였으니.

“파괴력이 필요하오.”

하야테와 제라툴이 충돌하는 순간 하야테의 조언이 끝났다.

하야테는 직접 실천해보였다.

용의 목을 베었던 검, 세계에 단 한 자루뿐인 <드래곤 슬레이어>로 제라툴의 몸을 입자 단위로 분쇄했다.

자신 역시 가슴부터 골반까지 이어지는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세계에 유일한 절대자가 고작 그 정도로 죽을 리 없다. 쏟아진 내장을 수습해 근육을 조여 상처를 봉합했다.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그리드는 귀중한 백도를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검에 묻은 피를 검기로 불태워 닦아낸 하야테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공부가 좀 되었소?”

“...예?”

얼빠진 반문에 이어지는 건 침묵뿐이다.

지금.

하야테는 신을 죽이진 못해도 패퇴시키는 방법을 보여줬다.

무적이어야 할 무신이 패배를 겪어 잃었을 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래, 제라툴은 무신이다. 치우의 복제품에 불과하다고 해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삼위일체를 이루지 못했다거나, 인계 강림 후 시간이 지나 존재감이 옅어졌다는 식의 핑계가 통하질 않는다. 무적이어야 당연한 존재였다.

그를 패퇴시킨 하야테는 당연히 신화적인 위업을 세운 것이다.

한데 어찌 저리도 담담할까.

“아...”

신화적인 업적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과 기사들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드 본인도 스탯이 올랐다.

계속해서 갱신되는 알림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리드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쥐고 있던 백도의 부피가 급격히 줄어든 까닭이다.

시선을 내려 보니, 어느새 정신을 차린 비반이 백도를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있었다.

“비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안도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힘겹게 말했다.

“왜...”

“네?”

“...않...”

“비반, 진정하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비반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진즉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이다. 순전히 초월자라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가 고통을 인내해가면서까지 전하려는 말이 뭘까.

비반의 입가에 귀를 붙인 그리드의 표정이 점차 차갑게 식었다.

“왜... 백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 는가...”

“...”

죽다 살아나도 변하질 않다니.

또 다른 의미에서 놀란 그리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느새 다가온 하야테가 비반을 어깨에 들쳐 메고 그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드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벗을... 동료를 살려주어서 고맙소.”

“아니 그게 무슨...”

감사해야할 사람은 당연히 나다. 우리다.

그렇게 말하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하야테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순간 깨닫는다.

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목숨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힘을 가진 자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두려움을 숨긴 채, 희생을 각오하고 탑을 세워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온 것이다.

죽어가는 비반의 모습을 보며 하야테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리드는 이제야 깨달았다.

“...저 또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반드시 갚겠습니다.”

“가끔 놀러와 말동무나 해주시오. 또한 오늘 나의 작은 조언을 잊지 않았으면 하오. 그대에겐 내 조언을 실행할 잠재력이 있고 훌륭한 본보기도 있지 않소.”

하야테의 시선이 서른 개의 갓 핸드에게 향했다.

“운석을 빚어 떨어뜨린다거나.”

“...!”

하야테가 말하는 잠재력이란 탐욕이었고, 본보기란 브라함이었다.

기술의 극한을 연마한 존재들.

‘맞아주면서 때릴 수밖에 없는’ 그들을 상대할 때 필요한 파괴력을 탐욕의 물리력을 이용해 재현한 마법으로 보충하라는 의미였다.

해낼 수만 있다면 정말로 강력한 무기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드는 깨달으며 또 다른 사실을 눈치챘다.

조금 전 마드라의 일기장을 토대로 배웠던 사십만대적검.

잠재력 개방을 사용해 오십만대적검으로 발현했던 그것에 대해선 하야테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 무패왕은 지나간 과거일 뿐이야.’

무패왕 마드라.

그에겐 항상 ‘죽지 않았으면 최강이었을 것’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최강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검술들 역시 최강이라기엔 손색이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리드가 습득한 무패왕의 검술들은 무적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확신했다.

앞으로 더 강해지기 위해 갈고 닦아야할 것은 과거의 잔재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잠재력임을.

무패왕의 검술은 어디까지나 나를 거드는 역할일 뿐, 내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브라함도 말하지 않았나.

역대 전설 중 최강은 바로 나, 그리드라고.

“예, 가르침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7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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