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7화
“놀!!”
기겁한 템빨단원들이 놀의 구출 작전을 펼쳤다.
서로에게 버프를 걸어 디버프를 어느 정도 상쇄시킨 뒤 마물 군단을 반으로 가르며 질주했다.
선두의 반트너는 별명대로 전차를 연상시켰다.
실로 놀라운 활약이었다.
하지만 바알의 흥미를 끌기엔 부족했다.
다시 무표정해진 얼굴로 전장을 살핀 바알이 중얼거렸다.
“개판이다. 잔챙이들부터 정리를 해놔야겠어.”
스아아아아.
지옥 달이 바알의 의지에 반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눈을 사방팔방으로 굴리며 전장의 인간들을 조준했다.
광선의 사출을 예견한 연합군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수만 줄기의 폭우가 쏟아졌다.
수십만 연합군의 정중앙을 노리고 쏟아지는 파멸의 비였다.
“히, 히익!”
운 좋게 조준을 피한 병사들이 칼과 방패를 버리고 도망쳤다.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나지 못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바로 눈앞에 대치하고 있던 마물, 등 뒤에 서있던 아군, 바로 곁에서 얽혀있던 모두가 광선의 비를 맞고 불타 비명을 내질렀으니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광선을 맞지 않은 병사들은 오히려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었다.
곧 우리도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거란 사실에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스아아아아.
한 번의 비를 내린 뒤 눈을 감았던 지옥 달이 다시 눈 떴다. 붉게 충혈 된 눈들이 일제히 부릅떠져선 다시 지상을 조준했다.
그때.
“퇴각! 전군 퇴각하세요!”
푸른 장발의 여기사가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악마들의 피를 뒤집어 쓴 갑주와 방패가 빛을 잃었으나, 그 많은 피를 뿌린 원흉일 백색 검은 여전히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호오.”
바알이 미소를 되찾았다.
쿠콰콰콰콰콰쾅!!
파멸의 비가 재차 쏟아졌고,
지이이이이잉!
메르세데스가 펼친 광역 중력장이 그 수만 개의 폭격을 허공에 멈추게 만들었다.
“어...서!”
이를 악 문 메르세데스가 쥐어짜듯이 외쳤다.
거대한 전장을 둠처럼 뒤덮은 중력장을 유지하느라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그 가녀린 몸으로 수만 광선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철저하게 무방비해진 그녀는 악마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바알의 등장에 혼란해하던 악마들이 마물들을 베어 넘기며 내달렸다.
전설의 격을 공짜로 집어삼킬 생각에 기뻐하며 메르세데스를 덮쳤다.
“감히.”
“저리 가! 더러운 것들아!”
아스모펠과 아멜다가 달려와 메르세데스를 보호했다.
일기당천의 기세를 자랑했던 악마들을 거짓말처럼 학살했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퇴각해라.”
“명령이라고!”
“하, 하지만...”
위대한 기사들의 선전을 보고 정신을 차린 병사들.
공포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이성을 되찾은 그들이 도리어 그렇기에 절망했다.
달은 세상 어디에서나 보인다.
여기서 도망쳐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희도 싸우겠습니다!”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리.
버렸던 무기를 주워 든 병사들이 소리쳤다.
첫 번째 폭격 때 큰 상처를 입은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수십만의 병사가 결사의 의지를 다졌다.
마침 놀을 구출하고 돌아온 반트너 일행이 그들을 독려했다.
“훌륭한 자세다! 우리가 바알을 사냥해 보자고!! 크하하핫!!”
기세 좋게 외치는 반트너에겐 그나마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동안 전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했던 브라함과 카일이 다시 합류했으니.
게다가 바알은 본체가 아니다.
승산이 없지 않다...
반트너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어엉!!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날아와 메르세데스의 중력장을 흔들었다.
“...쿨럭!”
검붉은 피를 토한 메르세데스가 쓰러질 듯 휘청거리자 중력장이 해제되고 말았다.
멈춰있던 광선의 폭격이 재개됐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잔뜩 위축 된 카일이 전류의 방벽을 세워 일각을 지켜냈다.
나름 전력을 다한 것인데 광선의 범위가 너무 넓어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다.
“크윽...!”
“막아! 맞서라!!”
병사들이 사기를 북돋았다.
방패를 세우고 무기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광선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쯧.”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음에 아쉬워하던 브라함이 어쩔 수 없이 나섰다.
최대한 넓은 범위에 광역 실드를 전개하는 한편 매스 텔레포트를 작동시켰다.
수천 명을 지켰고, 수천 명을 전이시켰다.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쿠콰콰콰콰콰쾅!!
또 수만 병력이 광선의 폭우에 무너졌다.
일부는 분전하며 자신을, 혹은 동료를 지켰지만 대부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지옥 달은 다음 폭격을 준비 중이었다.
“아아...”
기껏 다잡았던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진다.
이젠 병사들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까지 좌절했다.
지휘관들이 말을 잃었고 템빨단원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번쩍!
지옥 달이 재차 빛을 뿜는다.
스륵.
서른 개의 갓 핸드가 나타나 5미터씩의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섰다.
전 세계가 고대하던 템빨신 그리드의 등장이었다.
초라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광선의 숫자에 비해 갓 핸드는 너무 작았고 적었다.
연합군 군대를 지키듯 정렬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가 턱없이 좁았다.
-갓 핸드 30개 미친;;
-와 대단하다 ㅋㅋ 광선 한 100개는 막을 듯ㅋㅋ
-아니 게임이 돌았나? 다 접으라는 거야, 뭐야? 저거 뭐 어쩌라고 저렇게 광선을 수만 개씩 쏴 대냐??
-혹시 S.A 신작 출시하려는 거 아님? 사람들 신작으로 유입시키려고 Satisfy 종말 엔딩 내는 거고.
-임철호가 노망나지 않은 이상 그건 말이 안 되지.
-S.A 주가 망할 일 있냐?
└가상현실 기술 독점하는데 어떻게 망함?
-임철호 노망났답니다.
절망뿐이다.
현장의 사람들도, 지켜보는 모든 이들도 작금의 상황에 회의적이었다.
여태껏 만인의 희망이 되어주었던 그리드의 존재감이 제1위 대악마 앞에서 옅어졌다.
광선의 세례가 점차 지면에 가까워지고, 반쯤 이성을 잃은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절규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업데이트가 적용되었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출력됐다.
Satisfy 출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는 공지사항이었다.
스트리머들과 현장의 기자들이 이 소식을 급히 알리자 전 세계 시청자들이 내심 안도했다.
S.A가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주주들이 Satisfy를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했나 보다며.
『인마대전 자체가 없던 일이 될 가능성도...』
스트리머들과 전문가들이 꽤 극단적이지만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면서다.
세상은 인마대전의 난이도가 크게 잘못 됐음을 깨닫고 있었다.
차라리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이때 마침 발생한 최초의 업데이트 공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타이밍부터가 절묘하지 않나.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떠올랐다.
사람들의 기대가 들끓었고, 공지는 이어졌다.
[무점검 업데이트입니다. 변동 사항이 즉시 적용됩니다.]
[업데이트 내용.]
[플레이어 ‘그리드’의 테마곡 추가.]
“...?”
『...?』
-...?
<그리드를 위한 테마곡을 준비 중이다. 최고의 곡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의 거장들과 교섭하고 있다. 앞으로도 플레이어를 기리기 위한 테마곡은 꾸준히 업데이트 할 계획이며...>
언젠가 S.A그룹이 발표했던 기사가 사람들의 뇌리에 스쳤다.
근데.
그게 왜 하필 지금...?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고구마를 100만개쯤 먹은 듯한 답답함에 사이다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는 중이었다.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출현하였습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전장에 스몄다.
바스러지는 얼음의 선율이었다.
차갑고 고독하게 다가왔다.
희망을 잃은 전장에 어울리는 도입부였다.
혹독한 겨울을 표현하는 서사가 펼쳐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의 피아노 선율이 끼어들면서 반전이 펼쳐졌다.
그리드의 등장을 알리는 오프닝 트랙, ‘출두’는 겨울이 아닌 겨울의 끝을 알렸다.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잿빛 전장을 격동시키며 차갑게 식은 사람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쿠콰콰콰콰콰콰쾅!!
서른 개의 갓 핸드가 <마력 방사>를 토대로 분사하는 수백 줄기의 매직 미사일이 광선의 세례와 충돌한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시각적인 효과는 대단했다.
아군 병사들이 공포와 좌절을 딛고 환호하게 만들 정도로.
진짜는 따로 있었다.
번쩍!
수만 개의 광선이 연합군 병사들에게 파고들기 직전.
서른 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레이더스로 변신했다.
그 자체로 장벽을 이루고 광선의 세례를 몸으로 막았다.
빈틈으로 빠져나가는 광선들은 어느 신전의 기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창을 휘둘러 쳐냈다.
“아핫! 푸하하하핫!!”
바알이 대소를 터뜨렸다.
놈이 등진 지옥 달이 붉게 충혈 되다 못해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눈으로 다시 한 번 광선을 쥐어짰다.
무의미했다.
단순히 규모가 클 뿐인 형태의 공격은 그리드와 상성이 좋지 못했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쿠화하하하학!!
광선의 범위와 필적하는 반월의 검광이 하늘을 갈랐다.
단 한 번의 참격이 광선을 모조리 소멸시킨 것으로 모자라 그 너머에 선 바알에게까지 도달했다.
“뭐냐! 훌륭하잖냐!!”
허리를 뒤로 젖혀 참격을 피한 바알의 대소가 더욱 더 커졌다.
그리드는 무려 수만 개의 스킬을 분쇄한 대가로 50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었지만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화신의 폭풍을 전개해 온갖 효과를 발생시키며 물약을 먹고 체력을 빠르게 회복시켜나갔다.
쿠콰콰콰콰콰쾅!!
지옥 달이 광선을 쏘았다.
이번에도 베어낼 수 있겠느냐고 도발하듯 폭격이 빨랐다.
그리드가 즉시 응수했다.
[성장한 주작의 9번째 심장이 동방의 주작과 공명합니다.]
[주작의 의지를 강림시킵니다.]
화르르르륵!!
불의 비가 내렸다.
닥쳐오는 광선들과 지상의 마물들을 처참하게 불태우는 반면 아군의 상처와 체력을 크게 회복시키는 기적의 비였다.
푸슉! 푸슈슉!!
지옥 달의 수만 개 눈에서 검붉은 피가 용암처럼 폭발했다.
“크하하하핫!!”
바알이 배까지 잡고 웃었다.
어지럽게 경련하는 눈들을 간신히 고정시킨 지옥 달이 발악적으로 광선을 분사했다.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수만 줄기가 아닌 수천 줄기에 그쳤다.
굳이 그리드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브라함과 마법사들의 마법이, 아스모펠과 기사들의 검술이, 수천 플레이어들의 스킬이 광선을 모조리 쳐냈다.
“...”
전장이 고요에 잠겼다.
궤멸한 마물 군단과 눈을 감은 지옥 달이 불러온 적막이었다.
화르륵...
전장 전역을 뒤덮은 화신의 폭풍만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폭풍 속에서 상처를 회복하고 그리드로부터 꺾이지 않는 의지를 부여 받은 연합군 병사들.
급변한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멀뚱멀뚱 있던 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환호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만인의 숭배로 신위가 1 오릅니다.]
단 한 명.
단 한 명이 전쟁을 지배했다.
그야말로 신의 위용이었다.
마침 흘러나오고 있는 2번째 트랙 ‘위세’가 시청자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질주하는 듯한 선율이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벨리알부터 시작 된 대악마들과의 혈전, 천외천 시절 크라우젤과의 쾌속한 공방, 수백 명의 랭커들을 살육했던 마왕 토벌전, 대천사의 날개를 찢고 영혼을 소멸시켰던 교황청 사건 등등.
여태껏 그리드가 보여줬던 전투 장면들이 음악을 듣자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올랐다.
“...”
달이 잠든 하늘에 표표히 선 그리드는 지상에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음악 뭐냐.’
물론 기쁘다. 감격에 몸이 떨릴 정도다.
오직 나를 위한 테마곡이라니.
지난 노고를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걱정도 많았다.
앞으론 내가 뭔 짓을 할 때마다 이런 웅장한 배경음이 깔리는 거라면... 24시간 내내 무게를 잡고 있으란 뜻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