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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36화 (1,426/1,794)

템빨 72권 - 3화

그리드의 인공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은사의 입자를 매개로 거미줄처럼 뻗은 마력의 한쪽이 출렁였다.

면적이 좁다. 크기를 정확히 가늠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사람이 아닌 병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속도로 보아 애초에 쏘아지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 같았다.

그리드가 즉시 발도했다.

Satisfy에서 도는 검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찌르기 공격력이 약한 대신 발도 후 ‘첫 번째 공격’의 속도와 위력이 우세 판정을 받는다.

하물며 구젤의 도다.

그리드가 발도함과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반월의 검광이 장막처럼 펼쳐졌다.

순간.

‘반대쪽?’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다른 방향의 마력이 미세하게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시간차 없는 양동인지라 위협적이었다.

쩌어어어엉!!

하늘에서 떨어진 병기와 구젤의 도가 충돌했다.

화살인 줄 알았던 그것의 정체는 의외로 창이었다.

투척된 것인데 굉장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맞물린 구젤의 도가 날카로운 소음을 토했고 그리드의 이가 악 물렸다. 한 손으로 쥐었던 칼자루에 다급히 한 손을 더했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없습니다.]

인공 감각이 무색하게도 초월경이 발동했다.

기척이 등 뒤로 닥쳐왔다.

그리드가 발악적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반격 할 계제가 아니었다.

두 손이 하늘에서 떨어진 창 한 자루에 묶인 상태다.

두 발은 충격으로 인해 지면에 못 박혔고, 갓 핸드는 넓게 펼쳐진 채 인공 감각을 유지 중이다.

덥썩!

탐욕 덩어리를 떨어뜨리거나 펫을 소환하는 등의 대응을 할 틈이 없었다.

분절 된 찰나 속에서 그리드의 목덜미가 무언가에 쥐어뜯기듯 붙잡혔다.

그리드의 시야는 이미 하늘을 담고 있었다.

꽈아아아앙!!

지면에 처박힌 그리드를 중심으로 직경 수십 미터의 크레이터가 형성됐다.

쾅! 쾅! 쾅!!

그리드의 몸이 몇 번이고 더 메어쳐졌다. 그때마다 일대가 무너졌다.

그나마 터나 뼈대의 흔적이라도 남겼던 타이탄의 건축물들이 잿더미가 되어 소멸했다.

끼긱.

구젤의 도에 튕긴 뒤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던 창이 갑자기 궤도를 비틀었다. 무방비하게 휘둘리고 있는 그리드의 심장을 향해서다.

이내 빛살처럼 쏘아진 그것을,

꽈창!!

진즉부터 달려온 크라우젤이 막아냈다.

“...!?”

창과 충돌한 크라우젤 역시 그리드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를 악 물며 칼자루를 급히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리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창에 깃든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자리에서 버텼던 그리드와 달리 그는 뒤로 수십 보나 밀려났다. 힘 싸움에서 압도당했다.

“후.”

뒷걸음치며 호흡을 고르는 크라우젤의 한쪽 어깨가 밑으로 꺼졌다.

그러자 백호검과 맞물려있던 창이 미끄러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때 마침 그리드가 저 멀리 날아갔다. 성벽에 처박히기 직전에 간신히 멈춰 섰다.

자신을 연속으로 메치던 누군가의 손길을 간신히 뿌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서서히 상공으로 떠올랐다.

크라우젤에게 가로막혔던 창이 그 뒤를 쫓았다.

철컥.

급기야 창을 거머쥔 누군가.

놈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등에 날개가 달렸다. 얼굴엔 짙은 음영이 드리웠는데 머리 위 광원의 고리 탓이다.

경악에 찬 모두의 시선이 놈에게 못 박혔다.

제 키보다 큰 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얹은 어린 천사.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하기 힘든 놈의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이름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리파엘.

제1위 대천사다.

작은 검과 방패를 무장한 아기 천사 둘이 놈의 주위를 맴돌며 나팔을 불었다. 개선장군의 행차를 알리는 듯이 위풍당당한 연주였다.

“안녕하세요, 템빨신 그리드님과 인간 여러분.”

방긋 미소 짓는 리파엘의 얼굴이 해맑다. 살의나 적의 따위가 전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리드를 패대기치던 모습은 우리가 잘못 본 걸까.

그런 의구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반가워요. 여신께서 빚으신 피조물 분들과 실제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사실 제가 지상은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거든요.”

리파엘은 길게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밝고 정중하게 인사한 뒤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그리드를 바라볼 뿐이다.

“용건이 뭐지?”

화신의 폭풍을 일으킨 그리드가 대화에 응했다.

가미긴을 레이드하느라 소모한 <주작 현현>의 쿨타임이 12시간이라는 사실에 좌절하면서다.

아기 천사들을 동원해 삼위일체를 이룬 제1위 대천사 리파엘.

그리드가 잠시 겪은 놈의 힘은 바알의 자아 파편 따위와 견줄 수준이 아니었다.

차원이 달랐다.

고작 2초 동안 정신없이 메쳐지고 생명력이 3분의 1이나 날아갔다.

‘여기서 싸우면 안 돼. 높은 확률로 전멸이다.’

우선 브라함은 천사에게 취약하다.

직계의 힘을 되찾았다지만 마법 외 전투 스킬은 전무한 상태. 전력 외로 쳐야 옳았다.

메르세데스도 부재중이다.

그녀는 바르바토스를 쫓아 무저갱으로 진입했다.

기사 소환으로 불러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효율적이지 않다. 그녀가 돌아오는 순간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자유로워진다.

결국 나머지 인원 중 저 속도에 반응할 수 있는 건 크라우젤과 카일 뿐.

그중 크라우젤은 불완전했다.

일단 스탯 차이에 발목을 잡힐 듯했다.

초감각에 어렴풋이 읽히는 궤도를 토대로 예측에 가까운 전투를 해야 할 텐데 잠시 버티는 게 고작일 터였다.

‘게다가 카일은 불사를 잃은 상태야.’

전설과 영웅들의 영혼에게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영혼들은 가미긴 사후 해방됐다.

왕에게 헌신하는 병사가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되었다.

형체를 잃고 빛이 되어 그리드의 주변을 맴도는 게 고작이었으니 싸울 수 없는 신세다.

‘사실상 크라우젤과 둘이서 감당해야 하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버티는 동안 나머지 인원이 피신할 수 있을까.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리파엘의 강림이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제1위 대천사의 격은 너무 높다.

세계가 감당하지 못한다. 실제로 놈은 자신이 지상을 방문하는 게 처음이라고 밝혔다.

처음엔 리파엘처럼 방긋 웃던 아기 천사들의 표정이 그새 힘겨워지고 있음이 명백한 증거다. 아마 녀석들이 울상을 지을 때쯤에 돌아가지 않을까.

추측하는 그리드의 좌우로 극검, 크리스, 후로이 등의 십공신과 유라, 루비가 도열했다.

리파엘이 등장 후 발생시킨 충격파에 휩쓸려 넝마가 되거나 죽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반되게 하나 같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리드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든든한 걸.’

인마대전 개시 후.

그리드는 각지의 전투를 대부분 파악해왔다.

템빨단원이 참여하지 않은 전장의 상황은 소식으로만 접한 반면 템빨단원이 한 명이라도 참가한 전장은 라우엘이 보내준 영상을 통해 직접 살폈다.

그러면서 동료들의 성장을 여실히 느꼈다.

특히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을 무장한 십공신 이상의 위계는 단독으로 하위 대악마를 레이드 할 정도였다.

실로 엄청난 전력인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의 그리드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뜻이니까.

각 지역, 종족의 정상급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십공신의 상대가 못 된다는 의미다.

심지어 십공신 중 상당수가 노말 클래스 전직자였다.

그리드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 컸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승전고가 울리길 바랐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의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다.

홀로 책임을 짊어진 채 매 순간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건 몹시 가혹했으니.

“전설들의 영혼을 회수하려고 방문했어요. 그들을 승천시키기로 결정했거든요.”

리파엘이 순순히 용건을 밝혔다.

쯔단의 영혼이 반응했다.

[승천!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며 쯔단이 기뻐합니다.]

Satisfy에서 아스가르드는 천상과 동의어다.

또한 자고로 천상은 천국으로 통했다.

본래 아스가르드는 선역이라는 의미다.

아주 긴 역사 동안 칠악성이 악당으로 인식되었을 정도다.

쯔단이 정확히 어떤 시대의 사람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에게 있어서 아스가르드는 천국이요, 천사는 구원자일 것이다.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서서히 리파엘에게 향하는 쯔단의 영혼을 학센의 영혼이 가로막았다.

[학센이 쯔단을 비난합니다. 분위기를 전혀 못 읽는다며, 원숭이 수준의 지능이라고 비웃습니다.]

[파일볼프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악한 악마를 멸한 그리드를 다짜고짜 공격한 상대를 신뢰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대마법사와 거인다웠다.

학센과 파일볼프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파악했다.

흠칫 놀란 쯔단의 영혼이 납득하며 그리드의 등 뒤로 숨었다.

영혼들의 반응 따위, 리파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전히 그리드를 주시한 채 그 작은 손을 서서히 내밀었다.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아스가르드는 당신과 인류의 적이 아니니까요. 순순히 전설의 영혼을 바치세요.”

“미친놈인가?”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그리드를 대신해 극검이 입을 열었다. 도끼눈을 뜨고 제1위 대천사에게 마구 삿대질했다.

“다짜고짜 기습한 주제에 이제 와서 뭐? 적이 아니라고? 심지어 악마들의 배후엔 쥬다르가 있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아냐? 이 천사 놈! 한국인의 신산귀모를 얕보지 마라!!”

리파엘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극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요점만 말했다.

“제가 그리드 님을 기습한 건 맞지만 적의가 있던 건 아니에요.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우선 제압한 후 영혼들을 탈취할 생각이었던 거죠.”

“뭐, 뭐? 저거 진짜 또라이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거겠죠. 아무래도 가정이 없을 테니.”

극검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는 반면 후로이는 침중하게 분석했다.

리파엘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태도가 사뭇 진지했는데, 리파엘의 마음에 낯선 감정이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왠지 기분이 나쁘네요. 어서 돌아가야겠어요. 자, 그리드님?”

리파엘이 그리드를 재촉했다.

사람들에게 묘하게 다가오는 광경이었다.

천상의 대변인이 지상의 신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듯했으니.

만약 이대로 그리드가 요구를 받아들이면 치욕으로 느껴질 것만 같았다.

지상이 아스가르드의 지배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리드를 인류의 대표로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국의 공작들도 그랬다.

그리드가 원하고 의도해서가 아니라 자연히 이루어진 결과다.

“영혼을 바라는 이유가 뭐지?”

그리드가 질문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를 유도했다.

시간은 인류의 편이니까.

리파엘의 존재감은 실시간으로 옅어지고 있었다.

“대답할 권한이 없는 질문이에요.”

“아스가르드가 인류의 적이 아니라는 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야 당연하죠. 당신들이 존재하는 게 증거잖아요? 인류가 우리의 적이었다면 진즉에 사멸했을 테니까요.”

“근데 왜 제라툴과 쥬다르는...”

“그 또한 제가 답할 문제가 아니에요. 신권이라는 게 있습니다. 신에게도 사생활이 있고 사생활은 존중 받아야 마땅하죠.”

‘칠대 죄.’

“그래서, 영혼은요?”

리파엘의 얼굴에서 어느새 미소가 걷혔다.

자신에게 시간이 없단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리 없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함께 기우는 광원의 고리 탓에 얼굴에 다시 짙은 음영이 드리운다.

마치 얼굴이 사라진 듯해서 기괴했다.

그리드의 생명력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대화는 짧았지만 화신의 폭풍을 유지하고 있던 덕분이다.

뚜둑, 목을 푼 그가 광역 버프를 전개했다.

[꺾이지 않는 당신의 의지가 아군을 감화시킵니다. 폭풍의 영역에 있는 모든 아군이 상태이상에 걸릴 확률이 크게 줄어듭니다. 최대 3분 동안 유지되며, 유지 시간 동안 초당 5천의 마나가 추가로 소모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3시간. 아군이 상태이상에 저항할 때마다 당신과 아군 전부에게 버프 스킬이 부여됩니다. 단, 같은 종류의 버프 스킬과 중첩되지 않습니다. 버프 유지 시간은 버프의 종류에 따라서 다릅니다.]

생각해봤다.

승산이 적은 싸움이라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곁에 수많은 아군이 함께이지 않나.

템빨단원 뿐만 아니라 현장의 모든 플레이어가 그리드와 함께 싸우길 소망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짊어져온 책임감이 새삼 다르게 와닿았다.

무겁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1위 대천사고 나발이고.’

이곳은 지상이다. 우리의 성역이다.

애초에 나는, 언젠가 천상에 올라 헥세타이아를 구출할 거라고 다짐했었다.

수백수천의 천사와 싸우기를 각오해놓고 이제와 한 명의 천사에게 겁먹는 것도 웃기다.

“내 걸 너한테 줄 리가 없잖아.”

리파엘을 노려보는 그리드의 투지가 불꽃처럼 일어났다.

날카롭게 벼려지는 살기에 호응하듯 구젤의 도가 포효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네요.”

리파엘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음영 속 두 눈은 차갑게 빛났다.

순간.

번쩍!

리파엘의 고리가 급격히 크기를 키우며 찬란하게 빛났다.

모든 풍경을 하얗게 탈색시킬 수준의 빛이었다.

[실명에 걸렸습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전설들도 저항 불가능한 물리적인 상태이상.

저항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높은 초월의 격을 지닌 그리드와 카일, 검으로 빛을 가른 크라우젤, 마법으로 반응한 브라함과 전체적인 저항력이 높은 유라, 그리고...

“...”

왠지 혼자 평온해 보이는 루비까지 포함해 단 여섯뿐이다.

“...!!”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친다.

의사소통을 통해 함께 어둠을 돌파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리파엘은 그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빛나며 부피를 확장시킨 광원의 고리를 기울여 전장을 조준하고 있었다.

“이건...!”

급격히 변화하는 마력의 흐름을 느낀 브라함이 사색이 되었고.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고리가 빛의 기둥을 뿜었다.

전장을 통째로 찍어 누를 크기의 기둥이었다.

이번엔 카일도 실명을 피하지 못했다.

초월의 격이 저항하는 물리적인 상태이상은 확률적인 것으로 완전하지 않다.

크라우젤 역시 눈이 멀었다.

그가 빛을 베는 속도는 쇄도하는 빛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브라함의 마법이 깨지고 유라가 무너졌다.

빛의 입자들이 마력을 역류시킨 까닭이다.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디스펠에 특화되어 있었다.

서걱!

혼란과 공포 속에서.

그리드의 낙월검이 빛의 기둥을 베었다.

반으로 갈라지는 기둥 너머, 리파엘이 모습이 보인다.

웃는 얼굴을 되찾은 상태다.

반면 그의 양쪽 어깨 위에 앉은 아기 천사들은 울먹이기 직전이었다.

그 모습이 그리드에게 희망을 주었다.

번쩍!

리파엘과 아기 천사들의 모습은 금방 다시 자취를 감췄다.

연쇄되는 빛의 기둥 탓이었다.

수십 킬로미터의 면적을 뒤덮는 빛의 기둥이 다시 한 번 그리드의 시야를 삼켰다.

피아로의 절구질을 수천 배로 확장시켜놓은 듯한 그것은 공교롭게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였다.

“큭...!”

그리드는 절망하지 않았다.

이십만대군 분쇄검으로 또 하나의 기둥을 베어냈다.

반동으로 찢어진 근육의 통증을 견디며 신격을 쓰고,

‘한 번 더.’

쿨타임을 초기화시킨 분쇄검을 재차 휘두른다.

“괜찮아! 내가 있어!”

육체가 호소하는 고통이 한층 더 커졌지만 루비가 지탱해주었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애써 힘껏 외치며 힐과 버프를 연계한다.

그래, 혼자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고작 몇 초 동안 그리드는 한계까지 분쇄검을 날렸다.

아기 천사들이 보여준 모습.

그 희망을 상기하며, 신격을 모조리 소모했다.

결과는,

“...”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드와 루비의 스킬 횟수엔 한도가 있는 반면 광원의 고리는 쉬지 않고 가동하고 있었다.

여전히 전장을 조준한 채 새로운 기둥을 계속 뿜어댔다.

전설이 아닌 플레이어는 전멸할 것이다.

카일과 제국의 공작들도 높은 확률로 죽을 거다.

가장 최악은 영혼들을 빼앗기는 것.

이렇게 된 이상 자존심은 접어두고 탈출을 고려해야...

‘...아니, 사리엘을 소환한다.’

현재 천사의 숫자는 셋.

여기에 사리엘이 추가되면 삼위일체가 깨질 가능성이 있다.

겹겹이 겹친 채 떨어지는 빛의 기둥들을 올려보는 그리드의 사고가 가속하는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푸른 전광이 요란하게 춤췄다.

카일의 뇌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크기와 기세를 자랑하는 그것은, 용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드래곤이 아닌, 여의주를 문 동쪽의 용이다.

꽈르르르르르르르릉!!

수십 개 청룡의 질주가 빛의 기둥을 부수며 돌파했다.

모든 기둥을 파괴하고 나아가 그 너머에 있는 광원의 고리마저 강타했다.

꽈아아아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과 함께 기둥의 생성이 멈췄다.

사람들의 시력이 서서히 회복됐다.

빛을 잃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본 광경은 하늘 위 리파엘의 굳은 얼굴이었다.

“저들은 미카엘의 대체제를 구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리드와 나란히 선 사내의 독백이 한 발 늦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영혼을 내어주지 않은 건 정말로 잘하신 일입니다. 당신껜 늘 경의를 표하게 되는군요.”

쏴아아아...

비단으로 짠 도포 자락이 폭풍에 물결친다.

옷깃이 너울거릴 때마다 흉터가 드러났는데, 신기하게도 흉하게 보이질 않았다.

사내의 아련한 눈빛과 맞물려 깊은 사연을 연상시켰다.

미르.

쫓겨난 신들이 리파엘에 대항하고자 빚은 존재.

모든 양반의 정점이며, 반신의 궁극인 그가 머나먼 서쪽 땅에 강림했다.

섬기는 신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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