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4화
그리드는 양반을 혐오한다.
자연히 살심을 품는 수준으로, 인간의 탈을 쓴 거대한 해충으로 여겼다.
가람의 탓이 크다.
아니, 거의 모든 양반이 그리드를 실망시켰다.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 추악한 본성을 숨기지 않고 현시하는 놈들.
놈들은 인류의 바람으로 존재하는 동쪽 신들을 해치고 빈자리를 꿰차려 했다.
배려와 자애의 개념조차 모르면서 신을 꿈꿨고, 인간들의 신이 되고자 하면서 인간을 한낱 제물 취급했다.
흉포하고, 음흉하며, 몰지각하고 모순 된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금수보다 못한 놈들이었다.
악마들과 비교해서 나은 부분이라곤 쉽게 살인하지 않는다는 점.
딱 그거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선의로 여길 순 없다.
신이 되기 위해선 인류가 필요하므로 살인하지 않을 뿐이다.
자신에게 꾸준히 도전하는 크라우젤과 그리드를 격려하고 존중했던, 미르의 ‘호의’에 가까운 태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다.
“미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자신의 곁에 선 사내.
그토록 혐오해온 양반들의 정점.
그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뇌리로 몇몇 장면이 불현듯 스쳤다.
우선 첫 만남이 기억났다.
미르는 최대한의 예의로 그리드를 마중했다.
자신이 오랜 세월 지켜왔을 청룡도를 빼앗겨도 괜찮다는 눈치였다.
물론 순순히 내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그리드의 자격을 논하면서다.
동시에 신에 대해 말했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며, 그리드가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너무 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의 그리드는 불쾌하기만 했다.
음흉한 양반 놈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지껄인다고 여겼다.
나의 다짐을 무너뜨리려는 수작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미르의 눈빛엔 어떤 회한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에게 상처를 입고 감탄하며 은근히 기뻐하던 모습에 거짓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 재차 도전을 받았을 때도 태도는 같았다.
마냥 경계하기 보단 자극하며 격려했다. 차라리 대련에 가까웠다.
“...”
그리드가 미르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얼굴과 몸 곳곳에 남은 검흔들.
대부분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새겨놓은 것들이다.
주작의 권능으로 당장 없앨 수 있음에도 마치 훈장처럼 남겨놓았다.
“너...”
찰나 속에 만발하는 생각들을 정리한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를 좋아하나?”
미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언젠가 예음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구하시려고 노력 중인 청룡 신을, 저는 동정하되 좋아하진 않습니다.”
가야의 만년설은 청룡의 원한이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과 동물을 해친 눈이다.
사막 위에 세워진 가야의 백성들은 본래 추위를 모른다.
추위에 대비해놓지도 않았고 방법도 몰랐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눈과 살을 째는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어 죽거나 고향을 버린 이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동물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자신의 원한이 자신이 지키던 이들을 해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청룡은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제게 있어서 신이란 어린아이에 가깝습니다. 강하여 편협하고, 스스로를 전능하다고 믿어 떼를 쓰는 경향이 있어서인데...”
하늘 위 리파엘을 올려보는 미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의 낙월검에 허리를 베였을 당시, 생존본능을 느끼고 일대의 모든 것을 베어버렸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다.
“저나 천사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는 없겠지요. 저희를 직접 체험하신 당신께서 가장 잘 아실 겁니다.”
“나도 똑같다. 괜한 환상을 품은 거라면 관둬.”
“당신께서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인간의 삶부터 시작하신 당신은 스스로가 무결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죠. 당신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실로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저는 당신께서 다른 신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존재로 거듭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많은 걸 바꾸어 나가시겠죠.”
“...”
“애초에 당신은 제 희망입니다. 당신은 저 또한 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존재니까요.”
미르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제 목표는 무신입니다. 치우께 안식을 선사하고 힘을 얻어 신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허황한 꿈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낱 천사의 대체품으로 태어난 저 따위가 품기엔 너무 과한 꿈이죠. 평생을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당신을 응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다른 신들을 바꿔놓으신다면... 제 꿈도 바뀌게 될 테니까요.”
무너진 빛의 파편이 아스라이 번지는 와중이다.
고백하는 미르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작은 목소리는 폭발의 연쇄가 자아낸 폭풍에 집어삼켜졌다.
하지만 바로 곁에 선 그리드는 똑똑히 보고 들었다.
미르는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채 목소리를 떨었다.
그는 아는 것이다.
꿈을 논하기엔 자신의 자격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리드에게 고백하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미르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란느 증거다.
그는 오직 진실로 그리드를 대하고 있었다.
“그게 나를 돕기 위해 달려온 이유인가. 나를 늘 지켜봐온 거고.”
“제게는 당신을 지켜볼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저 또한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제게는 리파엘의 기척을 읽는 능력이 있더군요. 운명의 실로 엮인 느낌이었습니다. 덕분에 덩달아 당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찾아온 것이죠.”
“...신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려는 이유가 뭐지?”
그리드는 미르를 신뢰하고 싶어졌다.
하여 던지는 질문이었고,
“안 그래도 짧은 필멸자들의 시간이 보다 가치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미르는 작은 새들에게 좁쌀을 뿌려주던 나날을 회상하며 답했다.
청룡에 의해 만년설로 뒤덮인 가야의 수도.
차마 떠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보살펴온 존재가 다름 아닌 미르다.
신들의 다툼으로 희생당하는 작은 존재들이 그는 늘 가여웠다.
하지만 공감해주는 이가 없기에 고백하지 못하고 홀로 무심히 챙겨왔을 뿐이다.
“...”
그리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면서다.
그를 괴롭힌 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신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꼭 신 때문만이 아니야.”
당신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 전하는 그리드에게 미르가 웃어보였다.
어쩌면 평생토록 바라왔던 상냥함을 느끼면서다.
“알고 있습니다. 하여 더욱 더.”
미르 등장 후 고작 몇 초가 지났다.
하지만 그리드와 미르는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깊이 교감하고 있었다.
“신이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라는 겁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여건도 안 됐다.
촤르르르륵!
하늘 위 리파엘의 창이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신속. 순식간이었다.
천사의 날개를 형상화한 듯한 순백의 활이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꽈아아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빛으로 벼른 화살 수천 개가 대기를 난도하며 지상으로 쇄도했다.
사람들이 경악하면서도 대응했다.
스킬과 마법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요격을 준비했다.
하나 같이 훌륭했다.
각자의 판단으로 즉시 시너지를 유도하는 광경이 플레이어들의 실력과 협동심이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강하다.
리파엘의 파괴력은 보통의 플레이어가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대부분 죽을 거다.
판단보다 행동이 빨랐다.
그리드는 이미 원덕구를 전개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판덕공을 근간으로 발전해온 템빨신의 권능이다.
쿠콰콰콰콰콰쾅!!
수천 종의 무구가 쏟아져 리파엘의 화살을 상당수 요격했다. 전부는 아니다. 그리드는 동료들을 믿었다. 무구의 비 중 절반은 리파엘에게 쏟아졌다.
처음과 비교해서 존재감이 옅어진 리파엘은 전체적으로 약화 된 상태였다. 표적으로 삼고 노려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꽈아아아앙!!
무구의 비를 조준한 광원의 고리가 빛을 포화하는 그때.
“이후에 다시 만날 때의 우리는 역시 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당신을 응원하는 마음과 별개로 저를 움직일 권한은 대개 제가 섬기는 신께 있으니까요.”
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의 편입니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음성이었다.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미르는 이미 리파엘에게 접근해 있었다.
파직!
미르의 강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방신의 권능을 체화한 그의 움직임은 매 순간 순보에 가까운 신속을 발휘하며 들불 같은 열기와 독무를 일으킨다. 대지처럼 단단하기도 했다. 카일의 명백한 상위 호환이었다.
“불쾌해요. 치우님께서 제라툴님을 만날 때 기분이 이럴까요.”
리파엘의 활은 칼과 방패로 변해있었다. 접근해온 미르와의 공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는데 공교롭게도 몇 번이나 베였다.
칼을 넘기고 방패를 파고드는 미르의 도술이 워낙 출중해서다.
아기 천사들을 노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리파엘의 행동을 강제하는 게 컸다.
이상과 자격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늘 배움을 열망해온 미르의 실력은 그리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고강하고 실전적이었다.
강제 승천 직전의 리파엘이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
뒤따라 도약한 그리드가 미르의 배경을 되새겨보았다.
쫓겨난 신들이 아스가르드를 되찾기 위해 만든 존재.
타고난 재능만으로 치우의 시련을 최단시간에 돌파했으며, 그 기록은 아주 먼 훗날의 그리드가 도전하기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후 꾸준히 단련하여 가람 등의 다른 양반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실력자로 명성을 떨쳤고, 급기야 사방신의 권능마저 체화했으며, 오랜 세월 동쪽 땅을 지키며 검성 뮐러 등의 강자에게 도전을 받아왔다.
치우에게 안식을 선사하겠다는 목표를 품은 것으로 보아 치우의 인정까지 받았을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어.’
미르는 바알, 리파엘과 동급의 존재다.
다만 태초부터 살아온 둘과 비교해서 살아온 세월이 극히 짧고, 그로 인해 격이나 실력이 떨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잠재력만큼은 손색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태초신 한울이 리파엘에 대항하고자 만든 존재이지 않은가.
세계관의 기둥 중 하나가 지금, 스스로의 의지로 내 편에 섰다.
그리드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감사하게도 벌써 몇 번이나 겪어온 일이지만, 매번 똑같이 기쁘다.
게다가 큰 수확을 얻었다.
천사의 정체를 알게 됐다.
아마도 여태껏 존재했던 세계에서 선별해낸 인간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존재들.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리드는 머릿속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콰르르르릉!!
청룡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수백 갈래의 번개를 일으키며 리파엘을 전방위로 덮쳤다.
수백 회의 공방 끝에, 결국 리파엘이 아기 천사들의 보호를 포기했다.
감전되어 눈이 뒤집힌 놈들을 버려두고 미르에게 집중했다.
다시 창으로 변환 된 무기가 미르의 미간을 노리고 솟구쳤다.
스카악!!
삼위일체를 잃기 직전, 마지막 회심의 한 수였다.
하지만 그조차 간파한 미르가 창을 피했다.
창날 측면에 반월처럼 달린 극이 왼쪽 눈으로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면서다.
뒤로 물러나 피하려던 미르는,
푸우욱!!
리파엘의 후위에 나타난 그리드를 보고 버텼다. 눈을 내어줬다. 대가로 리파엘의 가슴에 청룡도를 박아 넣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덕분에 그리드가 리파엘의 목을 벨 수 있었다.
“그거 히드라의 독이에요. 제가 알기로 양반의 육신은 우리와 달리 하나뿐일 텐데요.”
목이 베여 떨어지고도 지껄이는 리파엘이었다.
천사와 악마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성녀 루비의 기적은 당연히 발동하지 않았다.
리파엘은 살아있었으니까.
고작 목이 잘린다고 해서 죽을 존재가 아니었다.
쏴아아아아...
하늘에서 쏟아진 빛이 리파엘을 거두어간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을 격퇴하였습니다.]
보상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드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왼쪽 눈의 상처로부터 번진 독에 질식하여 곤두박질치는 미르를 붙잡느라 바빴다.
“이후에 다시 만날 때의 우리는 역시 적일 수도 있습니다.”
미르가 했던 말.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현실이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품에 안은 미르와 지상의 루비를 번갈아 보는 그리드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