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13화
삶의 궤적이 평탄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아갈 것이다.
그리드가 유독 그랬다.
그의 삶의 궤적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최악과 최고를 모두 겪었다.
온갖 상황을 매번 다른 입장에서 체험했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을 매번 다른 입장에서 마주했다.
통찰력이 자연히 단련됐다.
‘산군의 성품은 의외로 온화하구나.’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며 그리드는 생각했다.
암벽으로 쌓은 산.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다.
결핍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한데 수천 명의 원주민이 이곳에서 천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다.
산의 지배자가 그들을 착취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앞서 걷는 수호자들이 탐욕어린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 또한 힌트가 됐다.
산군은 저들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이딴 길로 안내하는 거겠지.’
산소가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감각적으론 같은 장소만 맴도는 것 같아도, 일행은 틀림없이 고지대로 올라서는 중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향하는 곳에 산군은 없다.
쯔단이 그레니어에서의 기억들을 회상할 때 산소 결핍을 논한 적은 없으니까.
‘이 녀석들... 랜디를 산군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들이 먹어치울 작정이군.’
탐욕을 부려도 후환이 없다는 뜻.
그리드는 여러 정황을 근거로 산군의 성격을 추측한 것이다.
뭐 크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산군의 성격이 어찌됐든 간에 그리드의 목적에 변함은 없다.
그리드는 더 큰 힘을 원하고 있으며, 산군은 전설과 신격을 포식하며 살아온 존재다.
둘은 싸울 수밖에 없다. 마주치는 순간 서로를 포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랜디는 곧 한계인가.’
랜디의 호흡은 진즉부터 가빠졌다.
그리드와 함께한 뒤로 당당히 인간들의 땅을 밟아온 그녀는 은둔자들의 터전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당신의 펫 ‘랜디’의 호흡수가 증가합니다. 집중력, 판단력, 근력이 저하되고 지속적인 생명력 하락을 겪습니다.]
급기야 랜디의 증세가 악화됐을 무렵.
“후우, 이제 좀 편하군.”
벼랑 앞에서 걸음을 멈춘 수호자들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구름은 벼랑 저 밑바닥에 깔려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 또한 시선의 아래다.
원주민들은 아니, 인간이라는 종 전부가 감히 넘보지 못할 해발 수만 미터의 영역.
바로 이곳이 수호자들의 세계였다.
눈빛, 호흡, 근육의 이완과 자세 등.
수호자들은 모든 면에서 변화를 보였다. 원주민들이 살아가던 장소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굉장히 달랐다.
‘저지대에선 제약을 받고 있던 건가.’
극적인 변화는 아니다.
아마 능력치의 차이는 적을 거다.
호흡을 더 쉽게 조절하고 몸이 더 가벼워진 수준이 된 듯한데, 랜디의 약화와 맞물려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랜디가 체감하는 변화가 엄청 크겠어.’
역시나.
콰앙!!
등 돌리자마자 쇄도하여 발차기를 날리는 수호자의 기습에 랜디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검을 미처 뽑지 못한 채 팔뚝을 세워 방어했고 고스란히 충격을 받았다.
“말했지! 종이 한 장 차이였다고!!”
수호자가 희열에 차서 외쳤다.
뻗었던 다리를 회수한 상태다. 지면을 박차 허리를 사선으로 비틀며 단단한 어깨를 밀치는 모양새가 마치 방패병의 돌격을 보는 듯했다.
랜디의 전면 시야가 차단 됐다.
한쪽 발을 축으로 삼고 회전하여 자리를 이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호자들은 예측했다.
좌측과 우측, 혹은 상단.
랜디가 어느 곳으로 피해도 타격을 입게끔 미리 도끼를 투척했다.
퍼억!!
왼쪽으로 회전해 빠져나온 랜디의 가슴에 손도끼가 날아와 박혔다. 이를 악 물고 충격을 견디지만 몸의 균형이 무너진다. 온전치 않은 상태로도 어찌나 굳건히 버티는지 아주 미세했다.
하지만 수호자를 상대로는 그 미세한 흔들림조차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했다.
덥썩!
랜디의 뒤통수를 움켜진 수호자가 그대로 랜디의 얼굴을 땅에 꽂았다. 다른 수호자들은 도끼를 마구 쑤셔 넣었다.
넷의 협격이 매끄럽게 연계됐다. 넷이서 한 몸이 된 듯했다.
‘저건 단순히 환경이 바뀌어서라기 보단.’
학습의 힘이라고 봐야 옳다.
랜디와 한 차례 싸우고 패배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장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양반과 동격인 존재다웠다.
‘그래봤자 소용없다만.’
쩌어어엉!!
“...!?”
“...!!”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랜디.
처참한 몰골로 끝까지 저항하는 그녀를 비웃으며 걷어차던 수호자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형제 한 명의 정수리에 꽂힌 까닭이다.
흑금색 금속 덩어리였다.
우주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목이 기이하게 뒤틀린 형제의 모습을 보며 당황하는 그들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겼다.
불쑥 솟아나와 칼과 망치를 휘두르는 서른 개의 ‘손’에 의해서다.
랜디가 그렇듯 그리드의 능력치를 일부 구현하는 갓 핸드들이 출전했다.
“이런... 대단한 권능이구나.”
급히 물러난 수호자들이 긴장을 금치 못했다.
갓 핸드들의 비호를 받는 랜디를 괴물 보듯이 봤다.
‘저 휘황찬란한 무기들은 뭐지?’
갓 핸드가 거머쥔 무기들은 하나 같이 보검이다. 염룡검이나 무아검처럼 그리드가 애용하는 신검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반면 수호자들이 쓰는 도끼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레니어의 문명은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산군의 보고에 있는 보물들보다 훨씬 더 대단한 듯한데.’
수호자들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눈에 더 큰 탐욕이 깃들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손들을 권능으로 부리는 인신.
저놈을 먹어치워 신격과 보물들을 모조리 손에 넣을 거라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짜릿했다.
“역시. 산군께 바치지 않길 잘했군.”
“산의 주인이 바뀔 때도 되었지.”
반역을 대수롭지 않게 논한다.
인간과 산군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들은 자유분방했다. 부모이자 주인을 향한 공경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단순히 문화가 다른 걸까. 아니면 산군의 온화한 성품이 만든 비극일까.
‘산군은 어떤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지?’
이 작은 세계에서, 금수보다 못한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신화 찬탈자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다.
타인의 격을 빼앗아 자신의 격을 불려온 존재라고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의 행동 원리와 목적은 전혀 모른다.
“...”
상념에 잠긴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불현듯 스친 의문 탓이다.
과연 산군이 온화한 게 맞을까?
그가 원주민들을 착취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관대한 이유가 단순히 무심해서라면...?
레베카를 떠올리게 된다.
천사들의 죽음과 사람들의 염원 앞에서 늘 무심하고 수동적인 절대신.
만약 산군이 그녀와 닮은 존재라면, 산군의 격은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괜한 억측이다.’
설령 절대신과 성격이 닮았다고 해서 절대신과 비슷한 격을 지녔다고 추측하는 건 너무 나갔다. 과도한 걱정이다.
마음을 추스르던 그리드가 랜디의 비명을 들었다.
갓 핸드들의 비호를 받음에도 그새 새로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고지대에 진입하고 컨디션을 되찾은 수호자들은 반신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줬다.
동대륙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양반들처럼 갓 핸드의 공격 궤도를 간파하고 돌파하며 랜디를 압박했다.
랜디의 디버프가 심화된 점이 치명적이었다.
산소결핍이 심해질수록 랜디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리드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뜨개질은 멈추고 휴대용 용광로와 모루를 꺼내 망치를 두드렸다.
템빨골1이 쓸 망토를 만들었으니 이번엔 새로운 검을 만들어줄 계획이었다.
‘지크의 육신을 얻고 아이템 슬롯이 늘어난 게 좋네.’
템빨골의 최대 강점은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다는 부분에 있다. 대신 아이템 슬롯이 한정돼 있는데 이번에 슬롯이 2개나 추가됐다.
그리드제 아이템의 성능을 감안하면 엄청난 가치였다. 급격히 강해질 것이다.
랜디처럼.
쿠와아아아앙!!
“뭣...!”
그리드는 랜디를 방패로 써먹는 경우가 잦다.
힘든 싸움일수록 그랬다.
적의 수준에 비례해서 랜디의 사망 빈도도 늘어났다.
그리드의 마음이라고 해서 편할 리 없다. 랜디는 펫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죽음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만, 허무하게 죽을 때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랜디가 되도록 안 죽길 바랐다. 죽음의 위기에 처할수록 저력을 발휘하길 바랐다.
그래서 저 갑옷을 만들어줬다.
착용자의 생명력이 특정 구간에 돌입했을 때 누적 된 데미지의 일부를 스탯으로 치환하는 갑옷.
비교적 흔한 옵션이다. 광전사들이 애용한다.
그리드제 무기를 무장한 아스카가 데미지를 최대한 누적했다가 단 일격에 보스 몬스터를 격살한 영상이 한때 글로벌 인기 동영상 1위에 올랐었다.
그리고 랜디의 스탯은 아스카의 스탯을 초월한다.
랜디가 무장한 그리드제 무기와 갑옷이 아스카의 무기와 갑옷의 성능을 압도하기도 한다.
“꺼...어억...”
앞서 탐욕 덩어리를 정통으로 맞고 중상을 입은 수호자.
랜디의 검에 심장을 도려내지고 잿빛으로 산화하는 놈의 최후는 결코 요행이 아니다.
그리드가 바라고, 그리드가 만들어낸 랜디의 저력이었다.
“이런 미친...!”
반신은 결코 무적이 아니다.
그 사실을 수호자 본인들이 가장 잘 안다.
무려 천 년 동안 산군의 곁을 지켜온 그들은 신의 죽음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레니어의 산군이 출현하였습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산이 지배자의 의지에 호응합니다.]
쿠구구구구궁...
지진이 일어난다 싶더니 유독 높이 솟은 산봉우리 3개가 서서히 꺾였다.
휘청거리는 랜디를 갓 핸드들이 부축해 그리드 곁으로 데려왔고 수호자들은 암벽에 매달려 추락을 피했다.
용광로와 모루, 망치 등을 비롯한 장비들을 주섬주섬 챙겨 품에 넣은 그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꺾인 산봉우리가 교차하며 만든 거대한 석좌에 백발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뺨에 살점이 없고 피부는 갈라졌다. 메마른 입술은 당장이라도 찢어져 피를 흘릴 듯했다.
찬탈자, 포식자 등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였다. 오히려 배를 곯는 게 익숙해보였다.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그랬다.
그리드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산군의 시선이 당신을 관조합니다.]
[당신이 습득 중인 스킬과 마법의 정보 일부가 산군에게 노출됩니다. 산군에게 입히는 스킬 데미지와 마법 데미지가 80퍼센트 감소하고 약점 공격과 치명타 확률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대상의 격이 당신보다 높습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템빨신인가. 반드시 찾아올 줄 알았다.”
[산군의 음성이 메아리를 일으킵니다. 균형 감각에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속성 저항력과 방어력이 하락합니다.]
[산군은 온갖 종류의 전설과 신화를 포식해 왔고 그중 일부를 체화하였습니다.]
[깨지지 않는 불패신화의 권능이 산군을 무적으로 만듭니다. 산군은 모든 종류의 피해를 무효화합니다.]
“그대는 어떤 바람을 품고 나를 찾아왔지?”
[산군의 질문에 포식자의 권능이 깃들어 있습니다.]
포식자의 권능은 무엇일까.
유독 불친절하게 설명이 없다.
그리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유추하기 쉬웠다.
기세에서 밀리는 즉시 잡아먹히는 거겠지.
이 자리까지 찾아온 수많은 인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특별히 대책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리드는 평소처럼 말했다.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그야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이건 안 된다. 승산이 적다.
애초에 인류에 해악이 되는 존재도 아니고, 굳이 싸울 필요가 있나 의문이기도 하다.
신화를 포식하는 존재이니만큼 어떻게 보면 아스가르드의 적 아닐까? 적의 적은 아군으로 삼는 게 현명한 법이다.
‘저놈이 미쳤나?’
수호자들이 그리드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하수인 따위가 산군의 대화에 끼어드는 거로 모자라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게 당연했다.
전설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센이 당신을 황당하게 바라봅니다.]
[파일볼프가 마장기나 만들지 왜 괜한 시간 낭비를 했냐고 핀잔을 줍니다.]
[쯔단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혼돈 속에서.
“몹시 괘씸한 놈입니다! 산군께 데려가기 전에 철저히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수호자 한 놈이 소리쳤다.
이 괴상한 전개를 기회로 여긴 눈치다.
사냥감을 빼돌리려다가 일이 꼬여서 난감하던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리드에게도 기회였다.
스릉.
그리드는 일부러 낙월검을 뽑았다.
불패신화의 권능도 자신 앞에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횟수 제한이 있는 권능일 테지만.’
가끔 무적인 존재들이 있다.
‘죽어선 안 되는’ 자들인데 대표적인 예시가 초보자 가이드 역할을 수행하는 시작마을의 NPC들이다.
신화 찬탈자들에게 그들과 같은 가치가 있을까?
그리드는 없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속세에 나서지 않으며 세계관에서도 비중이 크다고 보기 힘들었으니까.
직설적으로 말해서 ‘죽어도 괜찮은’ 자들인 셈이다.
“...!”
수호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신의 하수인인 줄로만 알았던 여성이 단 일검에 형제의 목을 갈랐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고절했다.
산군의 메마른 입술이 비틀렸다. 끝이 위로 솟구쳤으니 미소에 가까웠다.
“기세가 좋다. 바람이 싣고 온 서사시의 구절들이 떠오르는구나.”
[산군의 시선을 느낀 쯔단이 얼어붙습니다.]
“그대가 당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고... 좋다. 그대가 이 석좌에 오를 수 있다면 한날의 말벗 정도론 삼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