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15화
체파르데아의 혀는 몹시 길다.
통나무 수십 그루를 둘둘 말아 감싸고도 한참 남아 길게 늘어진다.
레라지에의 목을 옥죄는 한편 채찍처럼 휘두르던 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 뜻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개골.”
체파르데아의 둥그런 눈이 잘려나간 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레라지에의 발밑에 떨어진 그것은 분하다는 듯이 펄떡이며 융단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커다란 거머리 같기도, 메기 같기도 했다.
“고고한 검성이 지옥을 왕래하는 세계를 보게 될 줄이야. 개골.”
바알의 권속 체파르데아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태초의 3악이나 한 자릿수 대악마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전 세계’의 멸망과 ‘이번 세계’의 시작 정도는 체험했다.
자연히 여러 명의 검성을 목격했고 공통 된 성향을 파악했다.
검에 미친 연놈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검으로 삼고, 쥘 것이 없을 땐 자기 자신을 검으로 벼린다. 급기야 마음으로 검을 빚겠다고 수십 년을 두문불출한다.
또 검술의 극의에 도달한 뒤엔 형(形)을 버리겠답시고 수련을 처음부터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상 구도자에 가까웠다.
세간에서 말하는 용사, 영웅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역대 검성 중 최강이라는 뮐러가 헬가오 등의 대악마를 토벌한 것도 ‘검이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론이었다.
물론 속내를 모르는 인간들은 뮐러를 영웅으로 칭송했고 진실은 뮐러 본인만 알겠지만, 아무튼 지옥은 그렇게 해석한다.
검성은 오직 자신의 경지에 집착하는 미친 종자다.
검술 외에 모든 무도를 하찮게 여기며, 하찮은 무도조차 익히지 못한 악마들에겐 생리적으로 흥미를 품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옥을 침략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지옥의 관점에서 보는 검성이었다.
지옥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검성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지옥 입장에서 당대의 검성은 돌연변이에 가까운 셈이다.
“검성이 추구하는 이상은 허황하여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들었다. 평생 폐관수련만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늙어죽기 일쑤라지. 개골. 한데 네놈은 설마 그 경지에 도달하기라도 한 거냐? 그래서 이토록 설치고 다니는 게야? 네놈이 뮐러보다 잘났다고?”
체파르데아의 관심은 오직 크라우젤에게 집중되었다.
풀려나 숨통이 트인 레라지에와 그녀를 부축하는 페이커, 카심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그너스가 보기엔 신기한 반응이었다.
검성의 가치와 크라우젤의 실력이야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업적을 놓고 봤을 때 레라지에와 비교해서 초라하지 않은가.
하물며 레라지에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패의 업적을 쌓아온 존재다.
비록 쇠약해졌다고 하나 충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한데 그녀보다 크라우젤을 신경 쓰는 체파르데아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검성이 그리 특별한가?’
의문을 감춘 채, 아그너스는 은밀히 란스티어를 운용했다.
크라우젤이 등장한 시점부터 불사를 소모한 상황.
체파르데아와 달리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남은 생존기는 언데드화와 벤타오의 조롱 정도가 고작.
그 안에 어떤 성과를 거둬야만 했다. 이번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간 안 그래도 약해진 입지가 소멸할 것이다.
‘적어도 바알의 퀘스트를 다시 받을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
인마대전 개전 후.
아그너스는 바알이 내린 학살 퀘스트를 대부분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했다.
그러던 차에 그리드를 경험하고 돌아온 바알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아그너스를 대놓고 냉대했다. 숫제 무시에 가까웠다.
아그너스는 언젠가 체파르데아에게 들었던 ‘베티’라는 실패작의 최후를 자연히 떠올리게 됐다.
바알은 흥미를 잃은 장난감을 쉽게 버린다고 했던가.
‘버려지는 거야 상관없다만.’
아니, 오히려 바라는 바다.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아그너스는 세상에 품은 원한들이 희미해진 상태다.
지칠 대로 지쳤고, 옛 연인의 죽음과 함께 잊었던 따스함을 유페미나를 통해 다시 느껴버리고 말았다.
이제 아그너스가 바라는 건 세상과 홀로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따위가 아니다. 불가능한 옛 연인의 부활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시작점은 자신과 닮았으나 다른 끝을 향해가는 그리드의 눈높이를 체험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도 페이커에게 접혔다.
다만 자유롭게 지낼 힘, 제 한 몸 건사할 힘이 있으면 족하단 바람을 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아직 버려져선 안 된다.
현재 아그너스에겐 최소한의 힘조차 없다.
지금 버려졌다간 과거처럼 무력한 채 세상에 노출되어서 처참히 짓밟힐 것이다.
‘당장 버려지지 않기 위해선.’
눈곱만큼이나마 남은 입지를 지킬 활약이 필요하다.
크라우젤이 딱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성.
그리드의 활약을 지켜봐온 플레이어 입장에선 딱히 특별하지 않은 울림이다.
유구한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이 검성을 추켜세운다 한들 파그마의 후예보다 뛰어날까.
아그너스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여태껏 크라우젤이 보여준 활약들은 필시 대단했으나, 그리드와 비교해선 한없이 초라한 게 사실이기에.
아그너스는 검성이, 크라우젤이 두렵지 않았다.
그를 경계하는 체파르데아의 태도를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크라우젤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순간 체파르데아의 호감을 다시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호감? 애정을 갈구하는 애새끼가 된 기분이군.’
실소를 흘린 아그너스가 그림자를 잠영하는 란스티어와 교감했다.
자신의 모든 걸 희생시켜 성장시킨 보검.
바알의 도움으로 연마 된 그것으로 크라우젤의 심장을 노린다.
‘무리할 필요 없다. 어차피 지금의 난 크라우젤을 못 이겨. 치명상을 입히면 그걸로 족하다.’
──!
크라우젤의 등 뒤로 검은 물감이 크게 번졌다.
란스티어가 그림자를 꿰뚫고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소리와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검을 세워서 목덜미를 파고드는 단도를 방어했다.
아니, 방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크라우젤의 검과 충돌하는 순간 란스티어의 단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
데스나이트의 감정은 눈구덩이의 안광으로 표현된다.
얼마나 놀란 건지 란스티어의 안광이 들불처럼 일렁거렸다.
아그너스는 그 이상으로 놀랐다.
‘자동 반격?’
아그너스는 크라우젤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여 눈치 챘다.
크라우젤의 반응엔 란스티어의 공격을 ‘감지’하는 과정이 생략돼 있었다.
체파르데아에게 고정 된 두 눈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증거다.
체파르데아가 쯧, 혀를 찼다.
“검성은 검성이군. 개골.”
검의 영역.
칼날이 닿는 거리 내의 공격을 높은 확률로 감지하고 요격하는 패시브 스킬.
사실 기술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비단 검성뿐만 아니라 궁극의 경지에 오른 무도가들은 종종 자신만의 영역을 만드니까.
하지만 검성의 영역이 유독 위협적인 이유는 ‘무엇이든 베는’ 권능과 맞물려서다.
검성을 상대로는 공방을 교환한다는 개념이 성립하질 않는다.
검성의 검은 충돌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므로 검성과 공방을 나눈다는 건 즉 손해로 직결됐다.
내구력이 무한하여 베이지 않는 물질이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겠지만, 그런 물질은 세상에 드문 탓에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아그너스의 사고가 정지됐다.
란스티어의 단도를 가른 크라우젤의 검이 그대로 란스티어의 손목까지 잘라버리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다.
경악 속에서.
“템빨이다.”
크라우젤이 고백했다.
그가 예상보다 빠르게 검성의 극의에 도달해가고 있는 이유,
[템빨신 그리드의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템빨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검성 크라우젤이 이번 신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의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소드 마스터리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지금 막 신화 등급으로 성장한 백호검 덕분이었다.
푸화하하학!!
아그너스의 목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란스티어가 꽤 위협적인 반면 본인은 약하니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게 당연했다.
***
고목처럼 메마른 손.
아득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듯 달라붙는 그 손길을 그리드는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오랜 존재에게 자연히 예의를 갖추게 됐다.
그때였다.
[새로운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당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검성 크라우젤이 당신의 신화에 포함된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당신은 검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효과는 크라우젤과의 유대가 지속되는 한 유지됩니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말했다.
“악마들의 침략을 눈치 채고도 산 속에 홀로 숨어있던 건가. 지상이 악마들의 손에 넘어간 뒤엔 이 산 또한 위험에 처할 거란 사실을 알고도?”
분명 산군은 오래토록 존재해왔다. 오직 산을 위해, 산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다. 타인의 용기를 존중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가?
아니다.
산속에 홀로 틀어박힌 겁쟁이에 불과하다.
그리드는 산군을 존중하기를 관뒀다. 마땅하게 비난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고향을 지키고자 타지에서 목숨을 바치고, 가족을 지키고자 타인을 지킨다. 그들이 과연 당신보다 강해서 그런 용기를 발휘하는 걸까?”
“...”
“눈앞의 세상에만 집착하지 마.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당신이 정녕 그레니어를 지키고 싶다면 타인을 위해 싸워. 타인으로 하여금 그레니어를 존중하게 만들라고.”
그리드가 그레니어를 방문한 목적은 2개다.
첫째, 쯔단의 전직서를 얻는 것.
둘째, 산군을 쓰러뜨리고 힘을 취하는 것.
아직 산군을 몰랐기에 세웠던 계획이다.
하지만 이젠 산군을 안다.
그러므로 계획을 바꾼다.
“내가 오히려 청하지.”
덥썩.
이번엔 그리드가 산군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이린의 모습을 빌렸음에도 손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아이린이 쌓아올린 흔적이다.
그녀처럼 가녀린 여인조차도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매일 노력하는 중이다.
그녀를, 지옥과 세상 곳곳에 흩어진 채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그리드는 알기에 산군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가자. 당신이 영원토록 그레니어를 수호하고 싶다면 응당 그래야 옳아.”
“...”
그리드를 바라보는 산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차라리 황당하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산을 위해 태어나 산을 위해 싸워온 몸이다.
산 밖의 세상을 위해 싸우자는 그리드의 주장을 터무니없게 느껴야 정상이었다.
한데 왠지 올바르게 들렸다.
그래서 당혹스러웠다.
“...수백 년 전, 격을 크게 잃었던 시절이 있다.”
아득히 먼 과거가 그리드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대로는 그레니어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져 세상 밖으로 나갔다. 격을 사냥하기 위함이었지.”
지상을 헤매는 산군의 모습은 볼품없었다. 메마르되 단단한 지금과 달리 초췌할 뿐이다.
그 상태로 조우한 사내를, 산군은 그레니어보다 높은 태산처럼 느꼈다.
뮐러.
당시의 검성이었다.
산군은 처참히 패배하였다.
격을 잃은 상태로 산을 내려온 그는 너무 약했던 반면 상대는 역대 최강의 검성이다.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하며.
산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음을 기다렸다.
그에게 뮐러가 내민 것은 검이 아닌 손이었다.
“산을 지키기 위해 산을 내려온 건가. 용기가 가상하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뮐러는 산군에게 자신의 격 일부를 양도했다. 심지어 무패의 전설을 쥐어주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무패신화로 진화한 것이다.
‘젊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세간에 알려진 뮐러는 산군에게 격을 양도한 이후의 뮐러인 건가? 그런데도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고 불렸다고?’
“템빨신이여.”
망막에 영사되던 영상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산군의 부름이 그리드의 의식을 현재로 되돌렸다.
“나는 그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말대로 산을 떠났었기에 뮐러로부터 존중 받은 경험이 있기에 잘 안다. 하지만 봤다시피 산을 떠나는 순간 나는 산군이 아니게 된다. 한없이 약화되어 그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게다. 그러니 나를 대신해 그대에게 도움을 줄 만한 인간의 행방을 알려주마.”
“...!!”
그리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정황상 산군이 말하는 인간은...
“검성 뮐러...?”
“...? 아니다. 그와의 만남은 너무 오래 전 일이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전혀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탓에 나로서도 행방을 알 도리가 없다. 죽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만한 존재가 죽음을 겪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럼 누구를 말하는 거지?”
“크레이슐러라는 인간이다. 내가 풍문으로 들은 인간 중 뮐러를 제외하면 아마도 가장 고강하다. 물론 이미 그대 곁에 있는 인간들과 완전히 소멸한 인간들은 제외하고 내리는 평가다.”
“크레이슐러? 전 교황?”
“그래, 알고 있구나. 지금의 그는 고귀한 사명을 품고 어떤 물건에 봉인 된 상태이나 나는 그를 부활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됐어.”
단칼에 거절하는 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