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20화
무저갱의 지형은 방위에 적합하지 않다.
지상과 바다를 점거한 채 적이 출현하는 즉시 포위, 섬멸하는 진형을 구축시킨 번헨 열도와 사정이 달랐다.
일단 구덩이의 면적부터가 너무 컸다.
기사의 구보로 한 바퀴 쭉 도는데 족히 반나절 이상이 걸렸으니 철저히 포위하기 위해선 수십 만 단위의 병력이 필요했다. 그마저도 전력이 분산되는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심지어 빛이 들지 않아 어둠뿐인 구덩이다. 내부를 관찰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 거대한 구덩이에서 전조도 없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수천수만의 마물에 대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본래 무저갱은, 정확히 말해서 무저갱이 위치한 타이탄은 진즉에 지옥으로 전락했을 운명이다. 악마들의 전진기지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했을 터였다.
가미긴과 바르바토스, 거기에 바알의 자아 파편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존재들이 번헨 열도가 아닌 무저갱에 강림했던 이유다.
그곳을 수호 중인 주역이 바로 브라함, 카일, 유페미나, 그리고 연합군의 책사진이었다.
“온다.”
혼돈에 가까운 무저갱의 마력을 꿰뚫고 마물들의 기척을 읽어내는 브라함의 식별 능력.
“아디엔 계열의 꽃들이 시들었고 동쪽에선 여진이 일어났다고 하는군요. 자개는 녹색으로 변했습니다. 냉기, 생존, 대형입니다.”
환경의 변화를 토대로 출현하는 마물의 종류를 예측하는 책사진.
스카아아악!!
거대한 구덩이의 표면을 가득 채우는 브라함의 무지막지한 마력량.
“얼음 속성이래요. 이번엔 카일 공도 같이 나서주셔야겠네요.”
“음...”
브라함의 마력과 마물의 특성을 기반으로 상황에 맞는 대마법을 투척하는 유페미나와 전격 계열 마법의 달인 카일.
쿠와아아아아아앙!!
최고봉 인사들과 책사진의 협력이 무저갱의 불리한 지형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구덩이에서 튀어나오는 마물들을 매번 최소 절반씩 소멸시키며 전투를 개시했다.
마법의 세례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마물들도 ‘약점’을 노출하는 신세가 됐다.
마법에 피격당하지 않은 신체부위 중 하나가 약점이라는 뜻이 됐으니.
플레이어들과 병사들은 매우 편하게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쩔이군.”
무저갱 위 하늘에 나란히 올라있는 위대한 마법사들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는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밝다.
수월하게 마물을 해치우고 경험치를 축적했으니 기쁠 수밖에.
하지만 전쟁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자신들과 달리 고향의 가족을 걱정하며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인마대전이 발생시킨 가장 큰 변화다.
플레이어와 NPC는 진정한 의미의 동반자가 되었다.
“고, 고맙네.”
“별 말씀을.”
자신이 상처 입을 것을 감수하고 병사들을 우선 보호하는 플레이어가 흔할 지경이다.
그 변화를 현장에서 체감하는 템빨단원들의 마음이 하나 같이 뿌듯했다.
기뻐할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에게 과몰입한다고 비웃던 사람들인데 말이지.”
“이게 다 갓리드가 만든 변화다! 일본에서도 갓리드만큼은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며 분해하더군. 하핫!”
“또 일본 반응 찾아본 거야...?”
“극검 쟤는 대체 왜 안 변하냐?”
“요즘에도 은근히 카츠한테 시비 걸고 그러진 않겠지?”
“절대 못 걸지. 지금 싸우면 무조건 지는데.”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플레이어들과 병사들에겐 여력이 있었고 템빨단이 그들의 등을 지탱해주었다.
그래서 불쑥 찾아온 이변이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키에에에에에!!
무저갱을 기어오르는 마물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화염, 은신, 소형, 대량...! 흐, 흙! 비행! 초대형! 대량!!”
책사진이 혼란을 겪었다.
예측되는 마물의 종류가 워낙 많아서였다.
말이 상황을 쫓지 못할 수준이었다.
브라함과 카일, 유페미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있었다.
뒤를 생각지 않고 마나를 전부 쥐어짜 무저갱에 온갖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마물들의 기세가 죽질 않았다.
소멸하는 마물의 숫자보다 출현하는 마물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그야말로 총공세였다.
“마안족 왕을 불러오는 게 어떨까요?”
라인하르트와 연결 된 워프 게이트를 힐끔 본 유페미나가 의견을 냈지만 브라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마안족 왕의 마안은 너무 강력하다. 커다란 두 눈에서 멸살의 빛을 마구잡이로 뿜어대는데 마안족 왕 본인이 제대로 감당하질 못했다.
안 그래도 약한 육체에 필시 부담이 발생할 것이다.
지금 상황엔 독이었다.
마안족 또한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전 지옥의 주민인 바.
아무래도 악마들의 주목을 끈다.
육체 능력은 약한 반면 마안은 고강해서 표적이 되기 쉬웠다.
특히 마안족 왕쯤 되면 대악마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 확률이 높았다. 마안을 수집하려는 악마들의 욕구는 상상을 초월하기에.
제아무리 브라함이라도 지키기 힘든 상황이 올 거란 의미다.
“점점 상냥해지시네요.”
“무슨 헛소리지?”
“마안족 왕을 걱정하시는 거잖아요.”
“나는... 놈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놈 때문에 대악마가 몰릴 상황을 염려하는 거다.”
능청맞게 웃는 유페미나에게 브라함은 차마 욕을 하지 못했다.
옛 제자의 후계자 아닌가.
제자에겐 주지 못했던 친절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혈족에서 추방당해 홀로 고독하게 떠돌던 시절과는 다른 것이다.
이제 브라함이 독기를 품을 이유는 없었다.
제자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시절을 이미 오래 전부터 후회하기도 했었다.
쿠우우우우우웅...
“...!”
브라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란 건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태껏 보기 힘든 반응이었다.
특히 카일은 브라함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브라함은 가미긴과 싸우며 위기를 겪었을 때도 오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뭐가 오는 겁니까...?”
불안에 찬 카일이 물었고,
“신이다.”
브라함은 무시하지 않았다.
신?
두서없는 답변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황당하질 않았다.
템빨신과 무신.
카일은 이미 여러 신을 체험했다. 악마들과 천사를 보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막연하지 않고 현실감 넘치게 다가왔다.
“너무 크다. 원념의 덩어리에 가까운 듯한데...”
카일과 유페미나의 눈엔 무저갱이 새카만 어둠으로만 보였다. 빛을 투척해도 마찬가지였다. 빛을 삼키는 어둠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의 두 눈은 무저갱의 깊은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역대 최고 마법사의 마력 감지 능력을 고작 어둠 따위가 차단할 순 없는 것이다.
“...!”
“...!”
카일과 유페미나가 깜짝 놀랐다. 자지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무한을 논해도 손색이 없을 무저갱의 마력이 일제히 브라함에게 흡수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게, 마나 드레인이라고?’
‘괴물이다. 이자는 반드시 괴물이야.’
수많은 신 가운데 파괴신 또한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시 눈앞의 이 사내일 것이다...
카일이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이대로는 더 많은 마물이 저 원념에 호응하여 미쳐 날뛸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옳아. 이곳은 너희에게 맡기마.”
브라함이 말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그는 이미 무저갱 아래로 투신하고 있었다.
***
“내가 시간을 벌 동안 대열을 정비해라.”
크리스가 어김없이 선두에 섰다.
대지를 가르며 질주한 그의 대검이 폭풍을 일으킬 때마다 폭발음과 비명이 뒤섞였다.
베지 못하면 짓뭉개는 대검이다.
약점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무적에 준하는 마물들의 두개골이 대검과 충돌할 때마다 함몰되었고 두 눈은 뽑힐 듯이 튀어나왔다.
중량으로 위력을 만드는 대검술의 위력이었다.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매번 치명적으로 유발하는데 파괴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꽈아아아아앙!!
한 번의 참격이 수십의 마물을 전선에서 이탈시켰다.
붕 떠오른 마물들의 몸이 기껏 힘들게 기어 올라온 무저갱까지 날아가 추락했다.
키긱! 킥!!
선두의 마물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드물게 서로 소통했다. 그러더니 동시에 크리스를 무시하고 우회해서 진격했다.
무적의 권능을 무력화시키는 크리스의 무식한 전투방식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놓칠 크리스가 아니다.
대검술의 강점은 면적에도 있다.
그의 검은 가장 무겁고, 길다.
또한 크리스는 폭군이었다.
자신이 딛고 선 땅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한다.
꽈아아아앙!!
기울어진 기둥처럼 늘어진 대검에 경로를 차단당한 마물들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폭군의 기세에 짓눌려 주춤거렸다.
크리스의 허락 없이 이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순간 세상에 단 한 명, 그리드뿐이다.
키야아아악!!
비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비명을 지르는 마물들의 몸이 연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대형 마물들도 사정은 같았다.
크리스는 최대 만 톤의 힘을 휘두르는 괴력난신이었다.
“무슨 야구하냐...”
크리스의 연타석 홈런에 플레이어들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됐습니다!”
크리스가 통솔하는 진영의 사령관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진형을 무사히 재정비한 것이다.
마물들의 총공세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비행형 마물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빔을 응축시켰으나.
퍼엉!!
크리스는 룬의 소유자다.
보완의 룬.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는 초월적인 성능의 룬이었다.
본래 근접형 전사들, 특히 속도보다 힘을 중시하는 전사들은 비행형 원거리 몬스터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지만 크리스는 손쉽게 요격했다.
“오오...”
“다재다능하다. 과연 템빨단의 2인자라는 건가...”
최근 몇 년 동안 크리스는 통합랭킹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리드와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라 세간에선 명실상부 템빨단의 2인자로 꼽혔다.
실제로 지금 크리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체에 가까웠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라는 점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대규모 전투가 시작됐다.
진즉부터 마물 군단과 얽혀있던 다른 진영과 마찬가지로, 크리스의 진영 또한 마물들과 정면에서 충돌을 개시했다.
처음엔 기세가 좋았다.
크리스가 활약해준 덕분에 충분히 정비할 수 있었고 사기도 충분히 올랐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생겼다.
안 그래도 숫자가 많은 마물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졌다.
본능적으로 약점을 보호하는 습성을 버리고 짐승처럼 날뛰었다. 안 그래도 적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폭주했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이런.’
진영이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약점을 숨기지 않아 도리어 약점이 드러나지 않게 된 마물들.
병사들은 놈들을 공략하기 힘들어졌고 플레이어들의 부담이 가중됐다.
전투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셈이었다.
크리스가 고립되길 반복했다.
아군이 점차 뒤로 밀려나자 그가 홀로 감당해야하는 마물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마물들 틈에 섞인 악마의 숫자가 무려 수십이라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였다. 수준을 가늠컨대 고위 대악마의 권속까지 포함된 듯했다.
놈들이 크리스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한 눈치였다.
“큭!”
전투가 심화될수록 클래스의 한계가 드러난다.
노말 클래스.
4차 전직을 기점으로 히든 클래스와 비견되는 유틸성이 부여됐다지만 스탯의 차이는 아직 명확했다.
레벨이 오를 때 상승하는 능력치의 폭은 클래스의 등급으로 결정되게 마련이니까.
물론 아주 특수한 칭호나 엘릭서 등의 편법을 이용해서 차이를 좁힐 수 있고, 아마도 크리스는 가장 많은 엘릭서를 복용한 플레이어일 확률이 높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 탓에 근본적인 스탯의 차이를 메우기엔 손색이 있었다.
그리고 스탯의 차이는 대부분 전투 지속력의 차이로 직결됐다.
스탯이 높을수록 적을 더 빨리 처치하고 체력이 덜 소모되므로 당연히 스탯이 높은 쪽이 더 오래 싸울 수 있었다.
‘분하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크리스는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보통’의 벽을 허물지 못한 무능을 책망했다.
그 옛날 그리드가 파그마의 기서를 찾아 헤매던 시절.
자신은 뱀파이어 한 마리에게 집착해 성에 틀어박혔었다.
고작 엘릭서 따위에 눈이 멀어 시야가 협소해진 셈이었다.
가능하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그 시절이 후회 막급했다.
[생명력 회복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끝인가.’
아니, 끝이 아니라 한 번의 패배일 뿐이다.
마음을 다스리며,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짜 대검을 휘두른 크리스가 악마 두 놈을 동시에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온갖 감탄과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분투였다.
탄성과 비명이 빗발치는 가운데.
푸욱!
크리스의 대검이 지면에 꽂혔다.
기우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바닥나기 시작한 스태미나를 느낀 그가 같은 진영의 랭커들에게 말했다.
“병사들을 데리고 극검의 진영으로 합류해. 이야루그트가 있으니 우리보단 잘 버티고 있겠지.”
크리스는 오직 전우들을 살폈다.
자신의 몸에 꽂히는 악마들의 발톱과 이빨은 개의치도 않았다.
몇 명의 플레이어가 그를 챙기려고 나섰지만 크리스가 일갈했다.
“차라리 죽고 부활하는 게 낫다.”
두 번의 죽음은 24시간을 소멸시키지만 한 번의 죽음은 기회다.
만전의 상태로 부활해서 전선에 곧바로 다시 합류할 수 있다.
급기야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된 그가 대검에 기댄 채 차츰 쓰러졌다.
그의 곁으로.
“어서 이거 배워.”
어느새 다가선 그리드가 한 권의 낡은 책을 건넸다.
“어서.”
화신의 폭풍은 당연히 발동시켰다.
하지만 화신의 폭풍이 아군에게 행사하는 생존 관련 효과는 치유력 상승과 상태이상 저항률 상승이다.
이미 큰 피해를 입고 온갖 중독과 출혈에 걸려 생명력이 0에 수렴하기 직전인 대상을 극적으로 살려내진 못한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리드를 신뢰했다.
단순히 동료라서, 친구라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그랬다.
책의 정보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사용한 이유다.
[쯔단의 후예로 전직합니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관련 능력치와 스킬이 전부 초기화되었습니다.]
“...?”
보통 랭커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경험치의 하락을 걱정해서다.
특히 하이랭커일수록 아이템을 손실할 가능성보다 레벨 다운을 더욱 걱정했다. 랭킹 하락과 직결되는 문제인 까닭이다.
말인 즉, 살기 위해서 레벨이 초기화되는 선택을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으아아아악!!”
크리스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만큼 너무 당혹스러웠다.
여태껏 한 손으로 휘둘러온 대검이 태산처럼 느껴질 정도로 약해진 몸이 꿈 같았다.
당장 눈앞에 수천의 마물과 악마가 있는데 레벨이 1이 된 것이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꽉 잡아. 버스 출발한다.”
오늘, 최단기간 레벨 업 기록이 새롭게 갱신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