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 10화
그리드의 예장은 무척 화려했다.
합병식을 앞두고 새로 만든 은색 왕관부터 남달랐다.
달빛을 머금은 듯이 푸르게 반짝이는데 몹시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드물게 인계에 강림한 숲의 선녀들 사이에서도 조화를 이룰 정도였다.
엘프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드에게 쏠렸다.
바닥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묵색 금의가 스르륵 움직인다 싶었을 때 그리드는 어느새 왕좌에 이르러 있었다.
“폐하.”
라우엘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넘칠 듯 찰랑이는 술을 혹 쏟을까, 커다란 술잔을 두 손으로 조심히 받친 채였다.
그리드가 술잔을 가볍게 낚아챘다. 넓은 소매가 다소 요란하게 펄럭이는 반면 술잔은 흔들리지 않았다. 잔에 가득 찬 투명한 술에 작은 파문조차 없었다.
수천 대의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전파되는 광경이었다.
시청자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작은 행동조차 신령하게 묘사하는 그리드를 보면서 자신들과 그리드의 격차를 새삼 되새겼다.
확실히, 그리드는 별세계의 인물이었다.
그가 술잔을 쥔 순간 고귀한 황제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으니까.
“신 바사라. 새로운 황제 폐하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자자손손 불멸할 이 충의가 폐하와 폐하의 적통을 지지할 것입니다.”
대륙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성스러운 행사다.
실수가 있어선 안 됐고 당연히 대본이 존재했다.
한데 바사라의 맹세는 대본과 많이 달랐다.
‘황제와 황실이 배신하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할 충성의 맹세가 무조건적인 맹세로 바뀌었다.
“...”
짐짓 당황하는 그리드를 올려보는 바사라의 가늘고 긴 눈매가 서서히 뜨인다.
매혹적인 눈동자가 우선 그리드의 모습을 한 번 담고, 이어서 그리드의 뒤편에 시립해 있는 피아로를 담았다.
“신 바사라는 폐하와 폐하의 충신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움찔.
피아로의 눈가가 경련했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의 의심.
피아로를 향했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천년제국의 쇠락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앞으로의 제국엔 없어야 할 거라고, 이 순간 바사라는 주장하고 있었다.
“질투하지 않을 것이고.”
바사라의 눈동자가 이번엔 아스모펠의 모습을 담았다.
피아로와 함께 제국의 황금기를 선도했던 인물.
하지만 현재 그의 위치는 피아로와 달랐다. 심지어 메르세데스보다 아래였다.
두 사람이 그리드의 곁을 지키는 반면 그는 한참 뒤에 머물렀다.
그러나 질투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뼈아픈 죄를 범했었기에 경건하다.
자신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바사라의 주장을 묵묵히 긍정했다.
아스모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싱클레드, 아멜다, 단테 등이 도리어 아스모펠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그 광경이 바사라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만들었다.
“설령 배반당할지언정 만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순간의 고통과 분노보다 오늘날의 맹세를 기억하고 우선하며 폐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바사라는 대본을 바꾼 게 아니라 변형을 가미한 것이었다.
새 시대를 함께 이끌 사람들이 공감하고 똑똑히 기억하도록.
그 마음, 그리드에게 확실하게 전달됐다.
“실망시키지 않겠다.”
긴 말이 필요할까.
그리드는 라우엘과 후로이가 공들여 만든 장황한 연설문을 기억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자신 역시 이성이 아닌 감정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 사실만 기억하면 돼.”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믿기 힘든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3자에 불과한 시청자들조차도 그리드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만약 그리드가 본인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흔한 사람 중 하나였다면.
여태껏 그가 보여준 행보는 앞뒤가 맞질 않으니까.
처음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그리드가 템빨단을, 템빨국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싸워온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심지어 지옥을 토벌하려는 이유조차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다.
위선 따위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의 그는, 영웅이 확실했다. 만인이 인정했다.
[사하란 제국이 템빨국에 종속되었습니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합니다.]
[새 제국의 시조는 ‘그리드’입니다.]
그리드와 바사라가 술잔을 나누는 순간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고.
[플레이어 최초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왕> 칭호가 <최초의 황제>로 진화합니다.]
그리드의 시야엔 별도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진화라는 표현은 적절했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가 크게 강화됐다.
대표적인 변화는 ‘최대 생명력의 70퍼센트’를 잃을 경우 발생하던 <보호막>이 ‘최대 생명력의 50퍼센트’를 잃을 경우 발생하는 것으로 변경됐다는 점.
그리고 레벨이 오를 시 추가 획득하는 스탯 포인트가 2개에서 6개로 대폭 상승했다는 점이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다섯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위대한 제국의 탄생과 함께 기록됩니다.]
서사시가 이어졌다.
[거리를 방황하는 패자들은 슬퍼하되 좌절하지 마라.]
[너희와 같았던 너희의 황제를 보라.]
[상처와 분노로 얼룩진 마음을 책임과 정의로 씻겨내라.]
[너희와 같았던 너희의 황제를 보라.]
[모든 시련과 고난은 너희의 탯줄이 잘려진 순간부터 예정 된 운명임을 자각해라. 불행은 필연이나 행복은 노력에 따른다.]
[너희와 같았으나 어느새 너희를 보살피는 황제를 보라.]
[그를 보고, 듣고, 배우고, 전파하라.]
[불행은 필연이나 행복은 노력에 따른다...]
그리드의 서사시는 산문이다.
서사적 형태를 띨 뿐, 특정한 형식 없이 매번 상황에 따라서 자유롭게 쓰였다.
이번엔 노래였다.
제국을 살아갈 사람들이 힘들 때면 읊게 될 희망 찬가이자 황제 찬가.
그러므로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서사다.
...
..
[서사시의 열다섯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당신의 백성들이 용기와 희망을 품습니다. 당신을 본받기로 다짐한 당신의 백성들은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템빨제국 소속 NPC의 성장 속도가 영구적으로 20퍼센트 상승합니다.]
[템빨제국 소속 NPC의 모든 스탯이 최대치까지 성장할 경우, 낮은 확률로 한계 돌파가 발생합니다.]
[템빨제국 소속 NPC의 충성심은 항상 높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템빨제국에서 네임드 NPC가 태어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템빨제국의 모든 내정 발전 속도가 영구적으로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당신의 격이 상승합니다. 이로운 효과의 발생 확률이 크게 상승합니다.]
“...”
그리드가 전율했다.
이로운 효과를 대표하는 패시브 스킬, 신장.
그것의 발동 확률이 무려 10퍼센트나 올랐음을 확인하고 ‘격’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다.
한편 라우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조금 전 떠오른 월드 메시지 때문이다.
[황제 ‘그리드’가 새로운 제국의 위대한 이름을 ‘템빨’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드의 알림창에 템빨제국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언급됐던 이유다.
그리드가 황제로 즉위함과 동시에 시스템은 국가명을 입력해 달라고 요구했고 그리드는 템빨을 입력했다.
제국이 된 템빨국의 이름이 템빨제국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그리드의 생각은 그랬다.
템빨단원들과 다른 사람들도 그러려니 했다.
다만 홀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라우엘만 슬퍼할 뿐이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악몽보단 현실이 낫다는 점.
템빨과 사하란의 이름을 혼합시킨 템빨사하제국보단 템빨제국이 월등히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참 훌륭한 이름이다.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것도 같아.’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라우엘의 모습을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담았다.
템빨국 2인자로서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냐는 앵커들의 설명이 덧붙었다.
감격의 눈물로 포장되는 것이다.
***
서대륙의 지도가 크게 바뀌었다.
사하란의 적색이 온통 푸르게 물들어 템빨국과 일치됐다.
이제 대륙 영토의 3분의 2 이상이 템빨제국이었고 그리드의 영토였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변화 과정에서 그 어떤 충돌도, 피해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이상적인 통일이었다.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상황이다.
‘내가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했다면.’
한반도도 통일시킬 수 있었을까?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그리드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시조의 인정을 받은 자> 칭호를 점검해보고 안도하는 것이다.
‘걱정했는데 잘 됐다.’
사하란 제국령에서 광산을 발견할 확률이 대폭 상승하는 칭호 효과가 무탈하게 유지됐다.
시스템이 전(前) 사하란 제국령을 대상으로 삼은 덕분이다.
템빨국에 흡수되기 전 사하란의 영토 말이다.
‘앞으로 마이너의 역할이 커지겠는데.’
마이너는 몇 년 전 좋은 반려를 만나 토끼 같은 자식을 셋이나 얻었다. 착한 며느리 덕분에 노모께서도 평안하시다고 들었다.
요즘 아주 행복에 겨워 지낼 텐데,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강제로 연행하기 보단 잘 설득하자. 출장 다니는 동안 가족을 타이탄으로 이주시켜준다고 하면 기뻐하겠지.’
타이탄의 교육 인프라는 무척 훌륭하다. 어떤 부분에선 라인하르트보다 나아서 자식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이너를 기러기아빠로 만들 계획을 세우는 그리드였다...
순수한 호의였지만 자칫 슬픈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템빨제국은 훨씬 더 부유해질 예정이었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라우엘이 단정 지어서 말할 정도였다.
이번에 흡수한 영토와 백성의 가치가 그만큼 컸다.
애초에 사하란 제국은 서대륙 제일 국가로 수백 년을 군림해왔다.
막말로 최고의 기반을 갖췄는데 그걸 고스란히 흡수한 것이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현대인의 관점과 지식으로 통치하면 전례 없는 경제대국이 탄생할 터였다.
“황제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라우엘의 안내와 함께 그리드가 홀에 입장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신들과 하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숫자가 족히 수만 명이다.
타국에서 온 손님이 태반이었다.
모든 국가의 왕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오크와 엘프, 드워프, 반용족 등의 이종족, 심지어 동대륙에서 건너온 십이지신도 자리를 빛냈다.
사실상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이 집결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들 모두 그리드가 만든 인연이었다.
그들 전부가 그리드의 제위를 인정하고 축복했다.
그러므로 오늘 열린 합병식과 결혼식에 손님으로 참석한 것이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그리드와 바사라였다.
당연한 흐름이다.
제국 신민들이 템빨국과의 합병을 반발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사하란 황가와 템빨 왕가가 하나가 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결합.
당연히 아이린도 동의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명문 귀족의 후계자 출신답게 정치를 잘 이해해서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그리드에게 여러 부인을 둘 것을 종용했었다.
“허...”
드레스 차림의 바사라가 그리드를 감탄시켰다.
위대한 사하란의 핏줄이기 때문일까.
그리드보다 한참 연상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동안인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여태껏 짊어져온 왕관을 내려놓은 덕분에 밝아진 표정이 미모를 한층 더 부각시킨 걸 수도 있다.
[템빨신 ‘그리드’가 ‘바사라’와 혼인을 맺었습니다.]
소중한 인연들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그리드와 바사라는 입을 맞췄다.
비록 사랑으로 맺은 결실은 아니지만 그리드는 그녀를 평생 아끼고 존중할 거라고 맹세했다.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미친 실화냐.
-부인이 2명인 한국인이 있다?
└제국인인데요?
-바사라 진짜 아름답던데...
└ㄹㅇ 예쁘다는 표현보단 아름답다는 표현이 딱 맞음.
└게다가 지혜롭고 마음씨도 곱지.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님들 저 방금 무서운 상상함. 왠지 현실에서도 똑같은 장면 보게 될 것 같음.
└나도 ㅋㅋㅋㅋ
└ㅋㅋㅋㅋㅋ
-한국 혼인법 빨리 개정 안 하고 뭐하냐. 그리드 중동으로 나르기 전에 어서 개정해라. 나도 그리드 덕 좀 보자.
└네가 부인이 없는 건 혼인법 때문이 아닐 텐데?
└그리드 무슬림 되는 거임?
실로 몇 년 만에.
그리드 안티카페의 회원수가 증가세를 보였다.
의외로 극적이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드와 바사라의 혼인을 납득하고 있단 증거다.
사람들은 그리드를 질투하되 저주하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메르세데스라면 어떨까.
그리드 안티카페의 성장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