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12화
“그들을 못 본 체 보낸 것이 잘 한 일인지 모르겠소.”
초왕은 이 땅의 수호신 주작과 흐릿하게나마 교감하고 있다.
초국 신민을 위해 존재하는 주작 의 천부적인 성질과 초국 왕가의
핏줄이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심지어 둘 사이엔 그리드라는 인연이 가교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드와 도움을 주고받아온 초왕은 주작의 호의를 샀다.
덕분에 역대 초왕 중 유일하게
가호를 얻었고 귀환한 병사들 중 일부가 인간이 아닌 악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순순히 보내줬다.
수맥을 타고 흐르는 주작의 신성에 피로워하며 도망치는 놈들을 끝까지 모르는 척 외면했다.
활빈당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근심 마십시오. 지 금쯤 당주께서 놈들을 일망타진하 셨을 겁니다. 무려 열닷새 전부터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으니까요.”
활빈당은 의적 집단이다.
양반의 권세에 기생하는 일부 몰 지각한 권력자들의 재산을 털어 민간에 뿌리고,이때 동대륙의 진 짜 신학를 전파하며 사방신이
수호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지 시켜왔다.
비록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그들에게 구원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십이지신 또한 그들에게 위안을 얻었을 정도다.
당주 황길동의 업적이 특히 대단했다. 환국의 계획을 몇 개나 수포로 만들며 양반을 여럿 죽였다.
최근엔 현무의 부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초왕은 활빈당을 신뢰했다.
“음... 길동 공께서 직접 나서신이상 안심해도 될 테지.”
초왕이 악마들을 직접 토벌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었다.
악마란 개체별로 능력이 달라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들었고,무엇보다도 초국의 무사들은 다수의 악마들을 제압할 정도로 고강하지 못했다.
반면 황길동은 천하를 주유하는강자였다.
악마 무리를 크게 가야와 파국,
두 곳으로 나뉘게 만들고 한 무리씩 고립시켜 퇴치하겠다는 계획이조금도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악마들을 궤멸시키지 않았을까.
초왕이 기대하는 그때였다.
“...?”
마침 날아온 전서구를 통해 급보를 받은 활빈당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왜들 그러시오?”
설마 뭐가 잘못 된 거냐는 물음을,초왕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말이 씨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일이 잘못 되었다고 하옵니다.”
활빈당원들은 최악의 답변을 내놓았다.
“악마들이 양반들의 손에 떨어질가능성이 생겨버렸다고...”
***
아그너스는 여전히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본인의 레벨이 크게 하락한 대신 란스티어가 집중적으로 성장했고,란스티어의 전투력은 하이랭커 여럿을 홀로 압도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게다가 아그너스는 마르바스의 힘을 일부나마 계승했다.
덕분에 한꺼번에 운영할 수 있는 소환수의 숫자가 이전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실패와 패배를 반복한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나빴기 때문이다.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 페이커가 너무 강했다.
그림자를 이용하는 솜씨와 무위가 하늘을 찌르는데,언데드 대군이 창칼로 세운 방벽을 제집 드나들듯 자유롭게 넘나드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숫자가 몇인지 가능조차 안 되는 템빨그림자단까지 활용해 댔으니 항시 천라지망을 펼친다고 박도 무방했다.
여러모로 상성이 나빴다.
과장 좀 보태서 그리드만큼 두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템빨단원들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템빨단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선 도무지 승산을 엿보기 힘들다…
이와 같은 결론을 아그너스는 빠르게 내렸다.
앞으로의 활동무대를 동대륙으로 정한 이유다. 아그너스에겐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바알이 마르바스를 사냥해 쥐어준 잠재력을 폭발시킬 그날까지 숨죽인 채 지낼 각오였다.
그리고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가장 처음으로 이룰 목표가 바로.
‘체파르데아의 혀를 뽑아버린다.’
원한을 갚는 것이다.
아그너스는 지난 몇 달 동안 체 파르데아에게 겪어온 수모를 좌시 할 생각이 없었다.
페이커에게 품은 원한보다 체파 르데아에게 품은 원한이 월씬 더 컸다.
당연하다.
페이커와 템빨단은 본래부터 아 그너스의 적이었다.
심지어 아그너스가 먼저 그들을 적대했다.
즉,페이커와 템빨단에게 겪은 수모들은 자업자득인 셈이 됐다.
반면 체파르데아는?
동료였다.
아주 드물지만 체파르데아는 아그너스에게 호감을 보인 적도 있다.
그래서 아그너스는 노력했다.
놈이 자신에게 몇 번이나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초조해서 놈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발버둥 쳤다.
초라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을 갈구했던 걸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체파르데아의 반응은... 최악이었다.
체파르데아는 아그너스를 멸시했다. 아그너스가 발버둥 칠수록 모욕을 일삼았다.
아그너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태도였다.
과거의 그를 괴롭혔던 무리와 크게 닮아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아그너스는 체파르데아에게 꽂힌 상태다.
그리고 옛 연인의 부활에 집착했던 세월이 증명하듯,그는 한 번 꽂힌 일 에 핑장히 집착한다.
체파르데아에게 수모를 되갚아주기 전까진 다른 모든 일들을 뒷전으로 미뤄둘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동대륙까지 건너와 조심스럽게 행동해온 것이다.
한데 노력이 무색하게도 피물에게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과창!!
란스티 어의 몸이 붕 떠 올랐다. 노검마의 검 에 깃든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즉시 그림자 이동술을 전개해 위치를 변경하고 노검마의 후위에서 등장했지만 그마저도 읽혔다.
노검마의 검 이 란스티 어의 늑골을 박살냈다.
“어쎄신의 습성을 내가 모를까.”
서슬 퍼런 안광을 내뿜는 노검얼핏 검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의 본질은 어쎄신이다.
묵직하게 내리꽂히던 중검이 불시에 기척을 감추고,학려한 쾌검이 불시에 둔검으로 변해 혼란을 유발해대는데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스킬 트리를 기이하게 탔다.’
이 순간 아그너스는 노말 클래스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100레벨마다 선택하는 ‘전직’에의해 갈리는 스킬 트리.
히든 클래스 전직자에겐 적용되지 않는 그 시스템을 잘만 활용하면 눈앞의 피물처럼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은신,암살 트리가 아니라 함정설치 트리를 타서 도구 사용에 보정을 얻는 식으로 검술을 강화한건가?’
아그너스는 노검마가 구사하는 검술의 특이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해골 병사들을 전직시킬 때 스킬트리를 다양하게 활용해 박야겠다고 생각하면서다.
개안한 심정이었다.
앞으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단서를 얻었다.
하지만 기뻐할 상황이 아니다.
파드득!
노검마의 우악한 손길에 아그너스의 로브가 찢겨져나갔다.
다행이었다. 만약 로브가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옷깃이 붙잡혀 바닥에 메쳐졌을 테니까.
‘싸구려가 도움이 될때도 있군?’
바알의 계약자의 약점 중 하나는 문명과의 괴리다.
저지른 악행이 워낙 많아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하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로부터 거부당했고 당연히 상점 이용권한도 사라졌다.
아그너스가 특정 아이렘을 구입하기 위해선 약탈 시스템을 활용하거나 플레이어와의 거래에 의존해야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그너스를 혐오했다.
그와 쉽게 거래하지 않았으며 설령 거래한다고 해도 과한 수수료를 요구했다.
상업 활동에 제약을 받아 학폐를 확보하기 힘든 아그너스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이용해서 현금으로 아이템을 구매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점점 힘들어졌다.
다른 랭커처럼 방송 등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사냥을 통해서 자급자족해야만 했는데 최근엔 사냥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재 아그너 스는 녕마를 걸친 채다.
떨어진 레벨대에 맞는 아이템을 새로 구매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기에 노말,레어 등급 방어구들을 무장한 상태였다.
노검마는 아그너 스의 그런 점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해쳐오고도 고작 그 모양 그 꼴인 거냐…? 네놈에게 죽은 사람들의 목숨을 최후의 최후까지 무가치하게 만들어 조롱하는 거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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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내는 부분이 미묘했다.
이쯤 되면 억지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그너스는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저 분노의 근원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
그 심정을 알기에 토를 달 의욕이 안 났다.
‘병신 새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온 주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앉았다.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느낀 아그너스가 조소했다.
스스로를 비웃는 것이지만 노검마가 알 리 없다.
아그너스의 악(惡)은 과거의 원한과 증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마저도 광증을 잃은 뒤엔 희미해졌다는 사실을,타인은 알지 못하기에.
“쓰레기 새끼!!”
“정답이군.”
비난을 겸허히 수용한 아그너스가 벤타오의 조롱을 전개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회심의 한수였다.
하지만 무용했다.
아그너스의 기술은 세간에 대부분 공개 된 상태다.
그간 겪어온 패배가 그를 너무 많이 노출시켰고 약학시켰다.
꽈아아앙!!
스킬의 전조를 정확히 읽고 스킬무효학 아티팩트를 활용한 노검마의 반격이 매섭다.
무릎으로 아그너스의 높은 콧대를 짓뭉갠 뒤,회전하며 휘두른 발로 아그너스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에 꽂아버렸다.
아그너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어느새 심장에 박혀 있는 노검마의 검을 흐릿해진 시야로 확인할 뿐이다.
‘...업보다.’
불특정 다수를 살육하는 바알의 퀘스트를 매번 거부하는 등,광증을 겪으면서도 어설프게나마 양심을 지켰다곤 하지만 전혀 무의미하다.
수십,수백만에 도달했어야 할 사상자를 수천,수만 선으로 억제했다고 해왔자 결국 자신은 살인귀다.
필요에 의해서, 기분에 따라서 타인을 해 쳐왔다는 사실을 부정 하지 못한다.
지금처럼 어디를 가나 내게 원한을 품은 사람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들로부터 나를 지킬 생각이었다면 어설픈 양심 따위 진즉부터 버렸어야지.
‘도대체 뭐하는 새끼지.’
아그너스란 어떤 인간인가.
스스로 자문해보지만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자신이 어질고 고운 심성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사실을,기억 깊은 곳에 끔찍한 과거와 함께 묻은 채다.
아그너스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혐오할 뿐,긍정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마침 5초가 끝나간다.
노검마는 긴장을 유지했다.
란스티어의 공격을 허용하면서까지 아그너스를 예의주시했다. 놈의 심장에 박아 놓은 검을 말뚝처럼 고정시키고 버렸다.
그때 였다.
“ 멈추어라.”
불시에 여러 기척이 나타나 노검마를 포위했다.
양반들의 개입이었다.
노검마가 아그너 스와 싸우는 사이 도망쳤던 악마들을 포승줄에 줄줄이 엮어온 채다.
“그놈을 우리가 살펴야겠다.”
노검마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제 고작 1초밖에 남지 않은 아그너스의 불사가 어서 끝나길 간절히 바라며 검을 쥔 손에 온 힘을 실었다.
하지만 버티지 못했다.
양반들의 협공을 받고 아그너스로부터 떨어져나갔다.
마침 불사가 끝난 아그너스에게 양반들이 손을 내밀었다.
“네놈이 품은 힘이 몹시 흥미롭구나.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네놈은 우리에게 협조해야 할 것...”
말하던 양반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푸학하하학...
아그너스가 내뿜는 선혈이 폭죽처럼 터져 그들의 얼굴을 적셨다. 기함한 양반들이 경쟁하듯 손을 뻗었다.
노검마는 물론이고 기껏 포박해 온 악마들에겐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
그럴 만도 했다.
노검마의 시 야에 비 치는 검은 구슬의 정체는 <바알의 힘의 파편>이었으니까.
‘이런 낭패가 있나.’
노검마는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구슬이 양반들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망하였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허망한 표정으로 죽어가는 아그너스와 노검마,그리고 그 곁에서 여전히 아귀처럼 다투는 양반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지닌 존재.
궁극의 초월종,드래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