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1화 (1,460/1,794)

73권 16화

그리드는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속 불길에 매료되었다.

작고 볼품없는 휴대용 용광로.

그 안에 담긴 열기가 뜨겁다.

드래곤의 뼈와 발톱을 손쉽게 녹일 정도다.

한데 흉포하지 않다.

초대형 용광로조차 녹이고,폭발시킬 학력이 휴대용 용광로에 동조하고 있었다. 자신의 열기에 소멸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느낌이 강했다.

상냥하게 다가왔다. 온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프리트의 의지에 호응하는 건가.’

마치 불꽃이 살아서 숨 쉬는 듯하다.

연소,소멸,파괴를 궁구하는 다른 불꽃들과 결이 달랐다.

명확한 의지를 품고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모습이 주작의 불꽃을 닮았다.

비록 주작의 불꽃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건 아니지만 흠결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신 주작의 불꽃을 상회하는 파피력이 핵의 내부에서 꿈틀거렸으니까.

말인 즉,이프리트의 불꽃과 주작의 불꽃은 강점이 다르되 서로 우열을 논하기 힘든,동격이란 의미가 됐다.

사방신이 동대륙을 대표하는 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사실이다.

오랜 세월 봉인됐던 사방신의 무력은 전성기와 비교해서 부족할지 몰라도 의지만큼은 건재하지 않은가.

한데 고룡이 아닌 보통의 드래곤도 그들과 대등한 의지를 지닌 것이다.

‘이게 드래곤...’

그리드는 고룡 외의 드래곤을 네펠리나와 구젤밖에 몰랐다.

무의식중에 그들을 기준으로 드래곤의 수준을 가늠해왔다.

큰 실수였다.

그리드가 체험한 구젤은 죽은 뒤 남은 사념의 잔재에 불과했고,네5델리나는 해출링일 뿐이니까.

기준으로 삼기엔 손색이 컸다.

‘진심 엿될 뻔했다...’

주제파악이 안 되도 너무 안 됐었다.

드래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내 시야가 협소했던 면이 있어.’

바알을 목표로 쫓다보니 초조해졌던 게 사실이다.

놈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렸었다.

쉽게 말해 냉정을 잃었다.

자책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위축 될 필요는 없다.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니까.

이번 일은 단순히 교훈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앞으론 드래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자.’

레이더스를 접대했을 때만큼.

딱 그만큼만 정중하면 충분할 것이다.

‘애초에 나를 싫어하는 눈치도 아니고.’

이프리트는 그리드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었다. 용살의 위험성을 일깨워주고 협력을 요청해왔다.

심지어 자신의 한쪽 팔을 스스로 잘라 내어주며 신뢰를 보였다.

물론 드래곤에게 있어서 팔이란 퇴화한 기관이다.

육중한 두 다리와 비교해서 수십 배 이상 작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라도 하지 않는 이상 평소 쓰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신체의 일부를 내어준 것은 사실이다.

안 그래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새로운 상처를 감수했다. 결코 약소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본인이 아쉬운 입장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다른 드래곤은 이프리트와 태도가 다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그리드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단 점을 주목해야한다. 다른 드래곤 역시 그리드를 잘 알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 어떤 드래곤도 그리드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최소한 중립이라는 뜻이다. 향후 그들과의 관계는 그리드의 태도에 달려있었다.

‘기왕이면 잘 지내야지.’

그리드는 결사들의 임무를 되새겼다.

그들의 목적은 드래곤을 해치는 게 아니다. 드래곤이 발생시킬 사건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기서부터 눈치 했어야 한다.

드래곤과 적대하는 건 금기다.

“화룡이라. 용중에서도 귀한 몸께서 이 땅에 숨어계셨군.”

마침 삼사가 입을 열었다.

이프리트를 바라보는 셋의 시선이 날카롭다.

당연하다.

그들 입장에서 이프리트는 침략자다.

자신들의 영토에 멋대로 숨어들어 사고를 치고 학살을 벌인.

그 여파로 양반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사건의 원인은 바알의 힘의 파편이고,양반들을 죽인 범인은 그리드였지만...

아무튼 이프리트가 오해를 받고 책임을 뒤집어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렇군. 내 신세가 너희와 다르지 않구나.]

분위기가 심상찮다.

그리드는 이프리트와 삼사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타임어택 퀘스트가 뜬 상황이다.

곧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드는 언제라도 위험에 대응할 수 있게끔 집중해야만 했다.

손을 쉬진 않았다.

이프리트의 팔에서 벗겨낸 가죽을 무두질하며 청각만 곤두세웠다.

그리드는 반드시 드래곤 웨폰을 완성시킬 각오였다.

퀘스트 보상이 ‘생존’에 국한 된 것으로 보아 드래곤 웨폰은 결국 이프리트의 손에 들어갈 것 같았지만.

그리드 입장에선 드래곤 웨폰을 만드는 경험 자체가 이익이고 보상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도,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도 드래곤 웨폰을 완성시켜야했다.

스윽!

무두질한 가죽을 거침없이 잘라내는 그리드의 손놀림이 빠르다.

뼈의 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칼 손잡이에 감을 가죽을 완성시킨 것이다.

오토 제작과 퀘스트 보정 시스템의 힘이었다.

"..."

그리드는 미르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미르 또한 그리드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싸웠던 과거를 가슴 깊은 곳에 묻었다.

미르는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었고,그리드는 그런 미르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주작의 깃털로 만든 것일까.

화염처럼 일렁이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풍사가 쯧,혀를 찬다.

이프리트의 말투가 영 거슬리는 눈치였다.

“바알의 힘에 눈이 돌아가 짐승처럼 날뛴 놈 따위가 감히 우리와 같음을 논하느냐. 과연 두꺼운 가죽만큼이나 염치없는 놈이다.

내 네게 반신들을 해친 죄와...”

[내 비약이 심하긴 했다. 하위종의 약점을 파고들어 현혹하고 힘을 쌓는 저급한 무리와 내가 어찌 같을까.]

“위대한 신들의 땅에서 날원 죄를 물어...”

[의문이다. 이 땅의 주인은 따로 있을 진데 어찌 너희 따위가 주인 행세를 하는 건지.]

“...쓸데없는 도발은 삼가라.”

[네놈도 그만 닥쳐라. 내 육신이 탐나서 숨 쉴 틈도 없이 달려왔노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끝날 것을 월 그리 장황하게 지껄이느냐.]

“이놈이...”

“풍사,관둬라.”

풍사를 제지한 우사와 운사가 앞으로 한 걸음씩 나섰다.

그들을 중심으로 천지가 움직였다.

하늘이 그들의 손짓에 따라서 기울어졌고 대지가 그들의 발짓을 따라서 이동했다. 세계가 그들의 의지에 동조하는 느낌이었다.

모루와 용광로가 90도로 기울어지자 경악한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삼사의 심상세계인가? 언제 펼쳐진 거지?’

셋의 신이 협력해서 펼친 주술이다.

초감각이 이변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신속하고 강력하게 전개됐다고 해도 납득이 됐다.

“오만하기가 하늘을 찔러 신을 존중할 줄 모르는 족속이여...”

[너희들 본인부터가 신을 존중하지 않으므로 이 땅을 강탈한 거 아니더냐.]

“...예부터 늘 말해왔듯이 너희는 반드시 파멸하게 될 것이다.”

[자꾸 그런 힛소리를 지껄여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나고도 여전히 바뀌지 않았구나.]

“네놈에겐 숨 쉴 자격이 없다.”

한 마디 할 때마다 책을 잡히는 삼사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풍사의 얼굴은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주문을 외우는데 찰나에 수십 종류의 주문이 완성 됐다.

하늘을 가득 채우며 떠오른 주술진의 광경이 마치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연상시켰다.

‘이거 너무 어지러운데.'

천지가 삼사의 행동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삼사가 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한 바퀴 뒤집혔다.

한데 삼사는 셋이다.

셋이 손을 한 번씩만 움직여도 천지가 세 번을 뒤집히는 것이다.

초월자의 감각이 무색하게도 점차 멀미가 밀려왔다. 몸과 정신 양면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

뜨겁게 달아오른 용광로에 늘어지듯 달라붙어 어떻게든 풀무질을 반복하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코앞에 떠오른 이프리트의 두 눈을 목격한 까닭이다.

그리드의 몸집보다 월씬 더 거대하고 매서운 눈이다.

자연히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위축된 그리드의 뇌리에 선명한 목소리가 새겨졌다.

[삼신의 심상은 너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이프리트가 대량의 피를 토하며 완성시킨 말.

그것은 용언이었다.

점차 가속하며 회전하던 천지가 불시에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흠칫 놀란 그리드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내부를 엿볼 수 없는 반구 형태의 결계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삼사의 심상세계다.

바로 저 안에 삼사와 미르,그리고 이프리트가 있는 것이다...

“의외로 빠른 재회로군요.”

...아니,미르는 현실에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리드를 긴장시켰다.

“미르…”

그리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발은 여전히 바삐 굴리면서다.

풀무질을 서둘렀다.

본래 꽤 볼품없게 비출만한 모양새지만,위엄 스탯이 워낙 높은 까닭에 흉하지 않았다.

“혹 염룡 트라우카를 아십니까.”

미르가 천천히 칼을 뽑았다.

차가운 도신이 푸른빛을 어지럽게 나부끼는데 폭풍이 유형화 된 느낌이었다. 몹시 날카로워서 위협적이었다.

“용 중 용이라고 합니다. 고룡들 사이에서도 특히 강력하고 흉포하여 신을 장난삼아 사냥했던 시절도 있다더군요.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용들이 서로에게 간섭하지말자는 협정을 맺은 계기라고 들었습니다.”

"..."

“이프리트는 그런 트라우카의 핏줄입니다. 그러므로 화룡이죠. 트라우카에게 잡아먹혔어야 정상이나 기어코 살아남아 이 땅까지 당도했다는 것은...

당장의 수준과 별개로 잠재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신들껜 살아있는 영약 덩어리로 보이겠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리드는 아이템 오토 제작을 활성화시켜놓은 상태다.

쇳물로 녹아내려 하나로 혼합된 이프리트의 뼈와 발톱을 틀에 넣은 뒤 담금질을 준비했다.

도무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생사결을 앞둔 무인처럼 결연했다.

그러므로 미르는 잠시 망설였으나,이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떠나십시오. 지금 신들벤 당신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이대로 떠나신다고 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드래곤 웨폰의 제작을 포기하고 떠나십시오. 양반 미르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당신의 생존을 보장할 것입니다.]

[퀘스트 수락 시,30분 내에 드래곤 웨폰을 제작해야한다는 선행퀘스트가 취소됩니다.]

[퀘스트 수락 시,이프리트가 사망하고 <환국>의 전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아주 지랄 났네.’

갑자기 뒤틀린 전개로는 부족했나?

이러랬다가,저러랬다가,두서없이 난리다.

이쯤 되면 시스템이 조울병 걸린건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시간을 확인했다.

9분이 흘러있었다.

앞으로 21분 뒤엔 시스템의 강제력에 의해서 드래곤 웨폰이 완성될 것이다.

뼈와 발톱뿐만 아닌 가죽과 피까지.

재료의 조건이 엄청나게 좋긴 하지만 제작 시간이 너무 짧아 퀄리티는 떨어지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퀘스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웨폰을 만드는 것.

그것을 활용하는 건 의뢰자의 몫이다.

아마 괜찮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싫다.”

그리드는 일고의 고민 없이 거절했다.

새롭게 떠올랐던 퀘스트 창이 허망하게 흩어졌고 미르의 눈빛은 흔들렸다.

“삼사와 이프리트의 대학까지 들은 마당에 환국 잘 되라고 물러날 순 없지.”

삼사의 저변엔 드래곤을 향한 모멸과 혐오가 깔려있었다.

쫓겨난 신들이 아스가르드에 반기를 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드래곤인 것으로 추정됐다. 드래곤의 처우에 불만이 컸던 눈치였다.

만약 쫓겨난 신들의 세력이 지금보다 강해진다면.

환국은 아스가르드뿐만 아니라 드래곤과도 전쟁을 벌일 확률이 높았다.

당연히 지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간들은 감당하지 못할 재해가 마구잡이로 발생할 터였다.

그리드에겐 반드시 상황을 막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네겐 미안하지만 여기선 이프리트의 편을 들어줘야겠어.”

철컥.

구젤의 도가 모습을 감춘 채 그리드의 오른손에 쥐어진다.

노에,랜디, 템빨골들이 그리드의 좌우로 도열했고 직계 뱀파이어들이 후위를 지켰다.

진즉 도착해 있던 갓 핸드들은 빛돌이와 함께 전면에 섰다.

따앙,따앙,따앙...

그리드의 왼손에 쥐어진 망치가 모루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기이한 풍경이다. 현실과 사뭇 동떨어져 있었다.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적이니까요.”

미르가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자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순간.

파지직!

청룡도가 전광을 일으켰다.

순보가 봉인 된 영역에서 더욱 불합리하게 작용할 미르의 신속이 예열하는 것이다.

20분.

그리드와 이프리트가 버터야 할 시간이다.

단지 바알의 힘의 파편을 부수러 왔을 뿐인데,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당했지만,그리드는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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