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72화 (1,461/1,794)

73권 17화

[최상급 회복 물약을 복용하였습니다.]

[해주의 물약을 복용하였습니다.]

[지혈제를 복용하였습니다.]

[진정제를 복용하였습니다.]

“크으윽..."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노검마의 하관이 다양한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급히 물약을 마신 흔적이다. 광대의 분장을 연상시켰다.

노검마는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갑자기 드래곤이 나타난다 싶더니 수십 대의 로봇이 날뛰고,급기야 폭발이 발생해 도시가 반파된 것이다.

상황을 헤아리고 대응하기엔 사건의 규모가 너무 컸다. 황당무계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다.’

그리드와 드래곤.

어지간한 양반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초월자들이다.

수준이 너무 높다.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 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이다.

부상자를 한 명이라도 더 수습하기 위해서다.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거다...’

노검마가 자랑해온 가죽갑옷이 넝마가 됐다.

온갖 종류의 상처를 입은 몸 또한 신세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검마는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 전 폭발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을 사람들.

대부분 중상을 입었을 그들을 한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피로 물든 시야를 닦아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러 추억이 떠올랐다.

장장 10년 이상을 머무른 이 땅에서 만나온 사람들과 나눈 고난과 시련,친절과 기쁨,감동,사랑,슬픔...

혼자 남은 현실에선 겪지 못할 추억들이다.

노검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비웃을 지 몰라도 그들에게 고맙고 감사했다.

신을 자처하며 온갖 폭거를 자행하는 망나니들에게 평생토록 속고,고통 받아온 그들이 심지어 개죽음까지 당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메마른 사막이 노검마를 훼방 놓았다.

상처에 짓눌려 무거워진 그의 두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마치 너는 영원히 혼자여야만 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와 네가 누구를 지키겠느냐고 비웃는 듯했다.

노검마가 뒤늦게 인지했다.

복부의 반이 뜯겨나가 있었다.

출혈이 몇지 않았다. 생명력이 너무 빠르게 소모됐다. 물약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흐흐.”

이까짓 상처 별것 아니라는 듯,이를 악 물고 웃어보지만 허세에 불과했다.

결국 크게 기운 노검마의 얼굴이 모래에 처박히기 직전이었다.

덥썩!

누군가가 다가와 노검마의 팔을 붙잡고 지탱해주었다.

“못된 놈일수록 명이 질긴 법이거늘. 과연 그대는 못되기보다 못났구려.”

알미운 목소리다.

노검마의 뿌연 시야에 패랭이 쓴 놈팡이의 얼굴이 가득 찼다.

“천하제일의 쌍놈은... 내가 아니라 그대임을 인정하는 게요?”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하오?”

“중요하오.”

“뭐...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구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황길동이 노검마의 복부에 금창약을 잔뜩 발랐다. 몹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천하를 다 뒤져도 구하기 힘든 약재를 때려 넣어 만든 영약인 것이다.

노검마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뒤척였다.

“지금 뭐하는 거요? 내게 죽음은 끝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이토록 귀한 약을 왜 내게...”

“죽으면 손실이 크다고 말한 건 그대이지 않소?”

무심하게 대꾸하는 황길동의 등 뒤로 수많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활빈당.

동대륙의 백성들을 위해 암약해 온 의적집단.

황길동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그들 수백 명이 저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개중에는...

“앗! 할아버지!!”

노검마가 아그너스와 함께 구출했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폭발의 순간 노검마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아이들.

필시 죽었으리라 여기고 자책했건만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다.

“다시 ”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노검마가 물기 젖은 눈으로 황길동을 올려봤다.

황길동은 패랭이를 깊이 눌러 쓴 채였다.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잊지 마시오. 오늘 이들이 위기를 겪은 이유는 전부 노검마 그대 탓이 외다.”

“...명심하겠소.”

아그너스는 악마들과 함께 가야에 진입했다.

굳이 노검마가 나서지 않았어도 결국 황길동의 손에 죽었을 거란 의미다.

즉,용이 날뛰고 도시가 불타는 작금의 상황은 똑같이 연출됐을 것이다.

하지만 노검마의 잘못을 부정할 순 없다.

그는 한 순간의 분노를 주체 못해 시가지에서 전투를 일으켰다.

더 많은 백성이 전투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깊이 반성하는 노검마를 황길동이 재촉했다.

“뒷일은 부하들에게 맡기고 우린 어서 템빨신을 도우러 갑시다.”

“...!”

노검마가 반색했다.

황길동은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한다.

스스로 주장하길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까닭이며,노검마가 봤을 땐 비겁해서였다.

한데 오늘 보니 황길동은 결코 비겁한 인물이 아니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백성들을 도운걸로 모자라 이젠 심지어 그리드까지 돕겠다고 나섰으니까.

'내가 그동안 이 자를 오해했구나.’

하긴,인격적으로 하자가 심해서 그렇지 착하긴 착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함께해온 것이다...

새삼 상기한 노검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물었다.

“혹시 템빨신에게 승산이 있겠소?”

“힘들다고 보오. 신의 형태는 신앙에 따라서 다르고,그 힘이 천차만별인 반면 서쪽 출신의 용들은 타고나길 싸움을 잘하니까.

하물며 학룡이라. 지금의 템빨신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박도 무방하겠지.”

“근데 웬일로 돕겠다는 거요?”

“그야 템빨신이니까. 나와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할 가치가 있다,이 말이외다.”

그렇다.

황길동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그리드가 짊어져 주리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리드가 자신보다 낫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다.

현무 사건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황길동은 활빈당의 정보력을 이용해 그리드를 예의주시해왔다.

“...나 또한 동의하는 바요.”

고개를 끄덕이는 노검마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황길동.

동대륙을 지탱해온 전설이 단 한명의 플레이어를 위해 희생하려는 것이다.

감회가 깊었다.

콧대 높은 네임드 NPC들이 플레이어를 지배하고 통제했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비교하며 감격했다.

‘채 한 줌도 안 되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그리드는 홀로 세상을 바꾸며 증명하고 있다.

몇 번이나 감탄하게 만드는 실로 대단한 인물이다.

“서두릅시다.”

노검마와 황길동은 더 이상 대학를 나누지 않았다.

한 순간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이 달리고 또 달려 무너진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뒤늦게 이변을 감지했다.

폭발 전까진 느끼지 못했던 기척.

측정불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존재가 현장에 난입해 있었다.

“미르...?”

“첩첩산중이로다.”

황길동은 미르가 아닌 미르가 등지고 선 결계를 주목했다.

신력으로 세운 결계였다.

“삼사가 강림했구려. 작정하고 용잡이를 하려는 게요.”

“용잡이...? 그럼 지금 저 결계 안에서 드래곤하고 삼사가 싸우고 있단 말이오?”

아마도.

“삼사는 드래곤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 거요?”

“당연하오.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렘빨신과 달리 그들은 태초에 가까운 시절부터 존재해온 신이외다.

하물며 셋인데다가 이곳은 한울의 영역이오. 승산이 차고도 넘치지.”

“아무튼 잘 된 일이군. 삼사와 드래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우리는 어서 템빨신을 구출합시다.”

미르는 최강의 양반이다.

‘매일 단련한다.’는 특성을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력을 겸비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완전한 신격까지 쌓아 신이 된다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다.

당장은 드래곤보단 몇 수 아래일 거라는 게 노검마의 생각이었다.

한데 황길동의 반응이 영 꺼림칙했다.

“이게 과연 잘 된 일일까 싶소.”

“왜 그러시오?”

“미르의 기운이 옛적에 봤을 때 완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구려.

삼사가 용잡이에 성공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과연 저자를 떨쳐낼 수 있을까 의문이오.

미르에 삼사까지 합류하면 희망이 전혀 없어지는 셈인데...”

황길동의 말문이 서서히 닫혔다.

노검마는 진즉에 입을 다문 채였다.

부릅떠진 두 사내의 눈동자에 막 시작 된 전투의 흐름이 영사된다.

단 한 번의 진각을 밟아 그리드를 위협하고,속이고,동시에 돌진하며 도약한 미르의 무력은 가히 초월적이었다.

돌진의 기세가 채 사라지기 전에 족히 수십 회의 검격을 그리는데 그리드의 주변으로 새카만 안개가 짙게 깔렸다.

그리드가 흘린 피가 뇌전에 타들어가며 번지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무시무시하군.”

황길동이 탄식했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대량의 상처를 입은 그리드의 모습을 토대로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리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제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선 채,오직 '한 손’으로 도를 휘둘러 미르에게 맞섰다.

고수가 하수를 상대할 때나 보일 법한 태도였다.

연신 피를 쏟지 않았다면.

온갖 소환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 1대1로 싸웠다면 정말로 고수처럼 보였을 것이다.

푸시식...

직계들이 발동시킨 혈마법이 암전됐다.

주문의 원천을 베어내어 무력학시킨 미르가 뒤로 고개를 젖혀 렘빨골1의 기습을 피했다.

어깨 위로 지나가는 템빨골1의 검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손을 뻗는데,그 손에 역살을 붙잡힌 렘빨골1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미르도 대가를 치렀다. 손에 달라붙은 룬어 탓에 잠시 신속을 상실했다.

렘빨골2의 흑마법이 미르의 다음 행동을 강제했고,그 틈을 노린 랜디의 협공을 미르는 예측했다.

왼손에 역수로 련 칼집을 세워 연살의 검무를 파훼함과 동시에 청룡도를 교차시키자 랜디의 두팔이 잘려나갔다.

과아아아앙!!

그리드의 도가 대지를 갈랐다.

망치질을 하며 기회를 엿보다가,렘빨골과 랜디의 유인책에 걸려 범위까지 들어온 미르의 빈틈을 노리고 극을 전개한 것이다.

아쉽게도 큰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주황색으로 번지는 기파를 목격한 시점에 이미 뒤로 물러난 미르의 판단력이 옳게 작용했다.

스르륵.

복부를 열게 베인 미르의 허리끈이 반으로 갈라져 떨어진다.

풀어헤쳐진 청색 도포가 한 발 늦게 발생하는 풍압에 의해서 요란하게 나부꼈다.

“...?”

달리는 속도를 높이던 황길동이 문득 의문을 느꼈다.

미르는 청룡도의 주인이다.

청룡도는 사방신의 신물 중 가히 최강의 공격력을 지녔다는 보검이다.

한데 그리드와 맞대결을 피한 것이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억지로 회피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청룡도 이상의 보검이라는 건가?’

황길동의 시선이 구젤의 도에 못 박혔다.

청룡도를 압도하는 보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측해보다가 이내 경악했다.

‘용살도...!’

퍼어어엉!!

폭음이 이어졌다.

룬어가 소멸하자마자 다시 신속을 탄 미르에 의해 번진 폭발음이었다.

황길동이 놓친 미르의 모습이 몇 초 뒤에야 그리드의 정면에 다시 나타났다.

푸화하하하학!!

그리드의 몸 곳곳에서 재차 선혈이 솟구쳐 올랐다.

미르가 자취를 감춘 동안 족히 수십 회를 베인 눈치였다. 미르의 속도가 그리드의 속도를 아득히 웃돈다는 뜻이 됐다.

한데.

푸화하하학!!

미르의 가슴에서도 선혈이 솟구쳤다.

그리드가 온몸에서 쏟아낸 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인공 감각.

갓 핸드를 이용해 거미줄처럼 펼쳐놓은 은사와 마력의 입자들이 미르의 신속을 한 순간이나마 포착해낸 것이다.

“앵앵거리며 나대는 꼴이 꼭 파리 같다. 파리는 결국 잡히게 마련인데 말이지.”

그리드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전투의 양상과 상반되게 차분한 태도였다.

땅땅! 따땅땅! 땅땅땅땅땅!!

반면 망치질 소리는 무지막지하게 빨라지고 있어서,분위기상 그리 멋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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