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81화 (1,469/1,794)

73권 4화

“워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위치가 발각 당했다고?”

“기척이 잡히질 않아... 설마 굴절통(屈折龍)은 아니겠지?”

탑을 기울일 정도의 충격이 결사들의 반응을 다양하게 이끌었다.

83종의 비가시성 술식으로 위장한 탑이 습격당한 상황.

여태껏 없던 대사건이다.

결사들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태를 상정했다.

습격의 주체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을 특히 큰 위험으로 받아들였다.

굴절룡.

보이지 않는 탓에 ‘투명룡’이라고도 불리는 실버 드래곤을 떠올렸을 정도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번식하지 못하는 실버 드래곤의 삶을 향한 집착은,다른 드래곤도 혀를 내두르는 수준이니까.

레어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그가 탑을 짐략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무한의 검기다. 하야테 공께서 진즉에 침입자를 고립시키셨군.”

“그래서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거네.”

나선형 계단을 날듯이 주파하는 결사들.

창밖에 물든 서광을 발견한 그들이 표정을 풀었다.

굴절룡의 출현이라는 최악의 가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물론 달리는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드래곤이 습격해온 건 명백한 현실인 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뿌리치고 도망쳐야한다.

"...!"

탑의 정상에 오른 결사들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때마침 걷히는 무한의 검기 너머로,

“구에엑!!”

대량의 피를 토하는 비반의 모습을 목격했기에.

“말도 안 돼...!”

“비반 공!!”

비반의 정서가 불안정한 건 사실이다.

비반이 처음 탑에 올랐을 당시,그를 본 라드볼프는 혹시 정박아냐는 질문을 대놓고 던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사들은 비반을 흔쾌히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의 성격과 감각에 비록 큰 결함이 있을지언정 신념과 무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비반이 탑에서 말석인 이유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만약 탑의 좌석을 실력 순으로 배치했다면,비반의 자리는 4번째,혹은 3번째였을 것이다.

그런 비반이.

“게에엑!!”

연거푸 피를 토해댔다.

결사들이 습격을 인지한 건 고작 13초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탑을 대표하는 실력자가 중상을 입은 것이다.

“6좌를 제외한 전원,기습에 대비해서 마장기에 탑승하라.”

켄과 함께 앞으로 나선 2좌 프론잘츠가 명령했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까진 결사들의 안전 확보를 최우선으로 두겠다는 판단이었다.

결사가 마장기에 탑승한다고 해서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고유 기술을 쓰지 못할 뿐,마장기 자체의 전투력이 워낙 높으니.

스아아아아!

프론잘츠의 두꺼운 손목을 감싼 팔찌가 파랗게 물들자 일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거인족 마도공학의 총체,<신의 원>이 마력을 빙결시킨 여파다.

거인족 멸망의 날.

프론잘츠와 라드볼프 형제를 탈출시키는 용도로 쓰인 신의 원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후 지금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대로 수리하지 못해 상당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고의 아티팩트’라고 단언할 수 있다.

템빨신의 <탐욕>과 비견해도 좋을 만큼.

까차차차차창!!

대기가 비명을 질러댔다.

지진 같은 울림이 번지는 가운데 투명한 얼음으로 세공 된 마력이 언월도의 형상을 갖췄다.

자연히 프론잘츠의 손에 쥐어진 채다.

프론잘츠가 딛고 선 땅이 빙판으로 변모했다.

“감히.”

분노를 짓씹는 프론잘츠의 거체가 미끄러지듯 쏘아지는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비반이 마주보고 있는 방향.

비반의 검기 파장이 잔재로 남아 시야를 가렸던 그곳에서 그리드가 튀어나왔다.

침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급히 지면에 언월도를 꽂은 프론잘츠가 가속을 멈췄다.

탑의 질서를 책임지며 늘 체통을 중시하는 인물답지 않게 입을 살짝 벌린 채였다.

다른 결사들 역시 황망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뭡니까? 설마 방금 전 소란이 선구자에 의한 거였다고요?”

일대의 마력을 얼리다가 도리어 자신이 얼어붙은 프론잘츠.

그를 대신해서 6좌 켄이 물었다.

막 그들 곁에 다가온 하야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소. ”

“워매 미친.”

켄이 격하게 반응했다.

반신반의하고 있던 결사들 또한 경악했다.

선구자란, 당대 최고의 인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리드는 신이 된 인물이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고작 몇 초 만에 비반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완전히 압도했다는 의미다. 섣불리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비반은 검성이다.

세상 모든 도검과 교감하며,통제할 수 있다.

도검 불침.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걸 허락하지 않는 수준이다.

한데 그리드의 양손에 쥐어진 검과 도엔 비반의 피로 추정되는 붉은 액체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비반 저자가 설마.’

선수를 양보하거나 방심한 수준을 넘어서 일부러 약점을 내줬나?

비반은 기인이다. 성질이 워낙 괴팍해서 쉽게 의심하게 됐다.

웅성거리는 결사들에게 비반이 진실을 알렸다.

“공정한 승부였소. 그냥 내가 실력에서 진 게요.”

“비반...”

비반을 부축하는 그리드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실 두 사람은 단 한 번의 공방을 나눴을 뿐이다.

검술에 대한 내성이 워낙 높은 비반은 쏟은 피에 비해 상처가 그리 깊지도 않았다.

적어도 죽을 정돈 아니었다. 더 싸울 수 있었다.

한데 깔끔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결사들에게 혹시라도 그리드의 실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듯이,차라리 경고에 가까웠다.

그리드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비반은 검성.

‘순수한 검술 대결’에서 패배할 경우 자칫 격의 하락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오직 그리드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비무에서 격이 하락할 리는 없지만.’

아무튼 나를 참 어여삐 봐주고 계시구나.

비반의 호의를 읽은 그리드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는 그때.

‘설마 베티 할멈의 기술까지 쓸 줄이야. 조금 열 받지만... 꼰대처럼 보일 순 없지.’

비반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는 그리드와 부쩍 가까워진 베티를 통해서 세대 차이를 실감하고 말았다.

노인네가 저런 주책도 없구나 싶었다.

젊은이들이 윗세대를 종종 꼰대라고 비하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여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래 뵈도 자신은 결사들 중 막내 아닌가.

적어도 나만큼은 꼰대로 보여선 안 된다는,그런 사명감마저 품었다.

그래서 꾹꾹 참았다.

‘검술’을 논하는 비무에서 네 자루 칼을 두 자루로 합치는 대장장이의 수법과 증폭의 권능까지 사용한 그리드가 다소 치졸하다고 느끼면서도.

요즘 세대가 생각하는 ‘검술 대결의 기준’은 예전과 다른가 보다 싶어서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괜찮다. 한 번의 뼈아픈 경험으로 세대 차이를 극복했으니 오히려 얻은 게 크다.’

꼰대들만 모인 탑에서 유일하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

자신은 그리드에게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비반의 입가가 뒤틀렸다.

격통으로 인해 크게 꺾인 미소였다.

‘졌다고 인정하는 게 어려운 상황도 아니고.’

수평을 이룬 그리드의 좌검이 자연히 검로를 가로막던 광경이 비반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은 돌파였다.

검로를 물리기엔 그리드의 우검이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치밀하고 정교한 수를 내포한 건 아니지만 맹렬했다.

정수리를 관통하는 하늘 위 금속의 차가운 기척이 영 거슬리기도 했다.

베이기 전에 베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벴음에도 먼저 쓰러진 게 문제일 뿐.

참으로 멋진 승부였다...

“후훗... 쿨럭! 쿨럭쿨럭!!”

“...”

연신 각혈하면서도 웃는 비반의 모습이 결사들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승부는 공정했고,비반은 패배했다.

저 미련 없는 표정이 증거다.

“비반! 비반!!”

기겁하며 비반을 부축하는 그리드의 뒷모습이 이프리트와 교감하던 순간과 겹쳐 보인다.

결사들은 확신했다.

그리드는 속세의 희망이 아닌,우리 모두의 희망임을.

* * *

“대청소를 하느라 정신적 피로가 쌓인 듯하오.”

“부상 때문에 지친 게 아니라요?”

“글쎄. 상처야 진즉 나았소.”

비반을 병실에 눕혀놓고 나온 프론잘츠의 소견이었다.

드르렁!

비반이 코를 고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그리드는 비반의 튼튼한 육체가 너무 감사했다.

안도하는 그에게 프론잘츠가 조언했다.

“귀하께 귀한 백도를 얻고 살아난 몸이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죽지 않을 친구지.

걱정 말고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샌드백으로 써먹으시오.”

“하하...”

2좌 프론잘츠.

그는 천외천 하야테를 대신하는 존재다. 결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탑의 운영을 도맡았다.

굳이 비교하면 라우엘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인물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오산이었다.

투명한 얼음으로 빚은 언월도를 손에 쥐었던 그의 기도는 비반을 초월했었으니까.

거인족의 거구와 맞물려 무지막지한 기세를 자랑했다.

‘적어도 2좌만큼은 무력 순으로 뽑은 게 확실해.’

지혜의 탑은 무력 단체다.

탑주대행을 단순히 짬이나 내정능력만 보고 뽑는 건 부적절했다.

그리드의 시선이 프론잘츠의 두꺼운 손목에 걸렸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낡은 팔찌가 신경 쓰였다.

특별한 물건일 거라고 예측하기 힘든 생김새다.

흠집이 가득했고 녹슨 부분까지 군데군데 눈에 티었으니.

단지 추억이 깃든 물건일 거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저건 엄청난 아티팩트다.

섞일 수 없는 금속과 보석 수십 종류가 혼합되어 있었다.

고대의 마법과 공학의 힘이겠지.

“지혜로운 거인족이 몇 세대에 걸쳐서 연구하고 완성시킨 지고의 보물이오. 완전하다 하여 신과 원(圓)의 이름을 붙였소”

앞장서 걷기 시작한 프론잘츠가 설명했다.

워낙 신장이 크다보니 한 번의 보폭으로 성큼 거리를 벌렸다. 그리드의 걸음이 바빠졌다.

“이것은 마력의 형질을 원하는 대로 바꿔서 활용할 수 있소.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의미요.

우리 형제가 멸망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오. 하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요. 지금은 마력을 빙결시키는 게 고작...”

거인족이 멸망한 날.

그날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던건지,프론잘츠와 라드볼프 형제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파일볼프는 아예 몰랐다.

본인 말대로 부분 기억 상실증에 걸렸거나,멸망의 날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제가 당장 손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군요.”

그리드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마법공학에 관해선 문외한에 가깝다.

트라우카도 동면에 든 마당.

당장 탈리마에 가서 배울 순 있겠지만 효율이 나쁘다. 습득 자체에 시간이 걸렸다.

전수 시스템의 한계다.

그리드가 원하는 건 퀘스트를 통한 습득이다.

언젠가 탈리마 관련 퀘스트가 발생하면 마법공학 기술을 보상으로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흣날 마법공학 기술을 마스터해서 반드시 수리해드리겠습니다.”

“하하,마음은 고맙지만 불가능하오. 드워프의 기술은 거인족의 마도공학이 퇴행한 것에 가깝소.

그들이 고대의 기술을 펜히 숭상하는 게 아니지.”

“프론잘츠 님과 라드볼프 님께서 직접 해결해야하는 문제인 겁니까?”

“우리에게도 힘든 일이오. 이 기술을 연구하고 완성시킨 건 선조들의 업적이니까.

우리 세대엔 이미 관련 기술이 실전된 상태였소.”

“아예 방법이 없는 거군요…”

“그렇소. 어느 정신 나간 드래곤이 협조하거나 죽은 선조들께서 살아나지 않는 이상은 방법이 없소. 불가능한 게지.”

‘선조? 에이,설마…’

라인하르트에 남겨두고 온 마장기.

지금쯤 스틱세이와 함께 <지옥엘리베이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파일볼프를 떠올린 그리드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했다.

“혹시 파일볼프라고... 아십니까?”

“당연하오. 거인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자 선지자이신 그 분을 내 어찌 모르겠소.

실제로 된 적도 있소. 노환 탓인지 제정신이 아니셨지만... 음...? 귀하가 어찌 그분의 존함을 아는 거요?”

“...”

제4위 대악마 가미긴.

그는 사실 인류 최대의 우군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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