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84화 (1,472/1,794)

74권 7화

"감사합니다.

시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다섯 정령왕을 호출하겠다는 세계수.

진실 된 의지를 느낀 그리드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었던 일말의 의심마저 거뒀다.

‘확실해. 세계수는 아스가르드와 우호 관계가 아니야.’

사실 당연한 거다.

세계수가 신들과 교류했다면 야탄의 정수에 병드는 일 따위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템빨단과 정령을 이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세계수를 경계해온 이유는 세계수의 근본이 신목이기 때문이다.

민간에선 세계수를 신이 심은 나무로 여겼다.

레베카가 세상을 창조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세계수를 심은 것이라는 설화가 있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세계수가 레베카의 지배하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동료들이 정령과 나누는 교감과 별개로 세계수가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다행히 기우에 불과했다.

이 순간 세계수는 그리드를 위해 수명까지 바치겠노라 선언했다.

빈말 따위가 아니라 즉시 실행에 옮겼다.

어떤 문학권에서도 보기 힘든 도형들이 세계수를 중심으로 떠올라 규칙을 형성했다.

규칙은 새로운 형태를,색을,성질을 낳았고 각기 다른 4개의 마법진으로 변모해갔다.

“어머님...!”

엘프들이 탄식했다. 당장 오열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들이다.

세계수의 진심을 증명하는 반응이었다.

정령왕 소환.

지금의 세계수에겐 부담이 큰 의식일 거라는 파일볼프의 예측이 적중했다.

무한을 논하듯 헤아리기 힘든 영역까지 뻗어나갔던 가지들이 메말라 우그러졌다.

푸르렀던 잎사귀는 한 계절을 보내고 떨어지기 직전의 단풍처럼 초췌해졌다.

그리드는 느낄 수 있었다.

세계수의 ‘격’이 떨어졌다.

그리드를 위한 희생이었다.

우지끈!

급기야 섬뜩한 소리와 함께 뒤틀린 순백의 껍질들이 윤기를 잃고 후두둑 떨어진다.

속살을 드러낸 세계수의 몸통에서 흐르는 투명한 진액이 비반과 미르가 흘렸던 피와 겹쳐보였다.

온갖 위험을 불사하고 그리드를 위해서 싸워줬던 존재들.

세계수는 그들과 같다.

이내 완성 된 4개의 마법진에서.

[불의 정령왕이 출현하였습니다.]

[물의 정령왕이 출현하였습니다.]

[땅의 정령왕이 출현하였습니다.]

[바람의 정령왕이 출현하였습니다.]

지옥,지상,천상과는 다르게 나뉜 차원.

바로 ‘정령계’의 지배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해요. 지금의 저에겐 여기까지가 한계로군요.

쿠륵! 쿠르륵!

빛으로 빚어진 도형들은 헛되이 허공을 맴돌며 소음을 흘릴 뿐,마법진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빛의 정령왕을 소환하려던 흔적으로 보였다.

빛의 정령왕은 유라가 담당할 거란 이야길 듣고도 굳이 무리한 것이다.

무의미한 고집은 아닐 터였다.

‘유라가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거겠지.’

숲으로 찾아오는 길.

여정 내내 유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파일볼프의 변태적인 행각 때문인 줄 알았는데,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빛의 정령왕과 소통하는 게 힘들어 걱정이 앞섰던 게 아닐까 싶다.

마침 유라가 다가왔다.

“정령왕들께서 언제까지 현현하실까요?”

그녀가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자신이 빛의 정령왕을 소환하는게 먼저일지,다른 정령왕들이 떠나는 것이 먼저일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세계수가 대답했다.

-그리드님께 달렸습니다. 이번 소환을 성사시킨 건 그리드님의 바람이니까요.

정령왕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쏠렸다.

[템빨왕. 무릉도원의 신선들로부터 네 명성을 익히 들었다.]

청령왕 중 누군가가 말했다.

세계수가 나무이듯 그들은 불이며,물이며,땅이자,바람이었다.

입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의지로 구현했다.

4차 전직 무도가와 어쎄신의 보조 스킬 <육합전성>처럼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리드는 말의 근원을 빠르게 파악했다.

초월자의 감각과 신격을 겸비한 그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

등장 후 점차 비대해지고 있는 불꽃

닿는 모든 수풀을 장작으로 삼는 태도가 폭군과 다름 없다. 세계수 마저 불태울 기세였다.

[주작의 심장을 이식하고 불꽃을 다스리게 됐다지. 하지만 아느냐?

지상만물 중 상당수가 정령계의 원소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불씨의 근원은 내가 품고 있으니 주작 또한 나의 분신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네겐 내 불꽃을 견딜 자격조차 없을 진데 어찌 감히 나의 강림을 요구하고 도움을 청하느냐?]

불의 정령왕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만큼이나 성정이 난폭했다.

세상을 발밑에 둔 것처럼 도도하게 굴었다.

‘불씨의 근원이 정령왕에게 있다고?’

사방신 중 하나인 주작을 자신의 분신에 불과하다고 말하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고 놀란 그리드가 질문했다.

“그럼 염룡 트라우카도 당신의 분신인 겁니까?”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한 질문이었다. 딱히 다른 의도가 없었다.

한데 불의 정령왕은 격하게 반응했다.

[굳이 규격 외의 존재를 언급하여 나를 깎아내리려는 수작을 부리느냐.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로다.]

숫제 도발로 받아들인 눈치다.

황당해서 눈을 껌뼉이는 그리드에게 파일볼프가 속삭였다.

“레베카가 지상을 창조할 때 청령계의 원소를 이용했다는 신화는 분명히 존재하네.

하지만 정령계가 태초부터 존재했냐는 질문에는 그 누구도 해답을 내놓지 못해.

반면 고룡들은 레베카를 비롯한 태초신과 확실히 연배가 같지.”

“...정령왕들이 고룡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단 말입니까?”

“바로 그거야.”

“아니,그런 건 빨리 말해주셔야죠.”

“자네가 난데없이 트라우카의 이름을 꺼낼 줄은 몰랐지. ”

[월 그리 숙덕거리느냐?]

불의 정령왕이 어느새 더욱 몸을 부풀렸다. 해일처럼 솟구쳐 올라선 그리드를 집어삼킬 듯 위협했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테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바람결에 음성을 싣는 엘프 고유의 전음이다.

그녀들의 고운 음성은 오직 그리드의 귓전에서만 울렸다.

-기본적으로 정령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문명이 자연을 훼손하는 탓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인데,

정령왕쯤 되면 자신이 인정하고 계약한 인간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을 정도죠.

-템빨신께선 잘못하신 게 없어요. 정령왕들은 처음부터 당신의 자격을 시험할 생각이었을 테니

당신께서 어떤 태도를 보이셨든 트집을 잡았을 겁니다.

자격을 시험한다?

확실히,세계수 또한 정령왕들이 머무는 시간이 그리드에게 달려있다는 듯이 말했다.

‘싸우자는 거지?’

정령.

타 차원의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는 존재들.

인간을 기피하여 차라리 적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들을 그리드라고 해서 좋아할 리 없다.

다만 빛돌이를 포함해 동료들과 계약한 정령들이 있으므로 존중하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는 명분까지 생긴 마당에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좋다.’

이참에 화풀이 좀 하자.

악마가 활개치고 신들이 음흉한 수작을 부리든 말든,저들끼리 숨어 지내는 놈들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콧대를 높이는 걸까.

정령계의 지배자들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애써 존중하려고 노력했던 호의를 거두고 솔직한 감정을 표출했다.

차라리 적의에 가까웠다.

[이놈이?]

불의 정령왕이 크게 일렁거렸다.

[고개를 조아려도 부족할 판국에 지금 감히 나를 노려보는 것이냐?]

“말을 좀 예쁘게 하자. 그래야가는 말도 곱지.”

[뭣이? 말본새가 꽤나 고약하구나. 설마 네놈은 스스로가 나와 대등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이냐?

내 제법 많은 인간을 만나왔지만 너처럼 주제 파악을 못하는 인간은 처음 보는구나.]

‘역시. 내가 신이 됐다는 걸 모르는구나.’

그리드는 정령왕들이 세상사에 어둡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불의 정령왕이 자신을 ‘템빨왕’이라는 이명으로 불렀을 때부터 눈치 했다.

지상에서 활동하는 정령들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파악해왔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인간계에 어지간히 무관심하거나,영생을 누리는 탓에 시간 감각이 없어 생긴 문제 같았다.

아무튼 그리드에겐 잘 된 일이었다.

정령왕들이 파악한 그리드의 수준은 막 주작의 심장을 얻었던 무렵의 그리드일 테니까.

철컥!

네 자루의 신검을 두 자루로 합친 그리드가 양손에 무장했다.

정령은 물질이 아닌 현상에 가깝다.

베기 위해선 낙월검 등의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추정됐지만,낙월검은 10분에 한 번밖에 휘두르지 못한다.

우선 공격력을 최대한 증폭시켜서 베어볼 생각이다.

‘물리 공격이 먹히면 승산이 높아.’

그리드는 양질의 경험을 쌓아왔다.

인마대전 시점부터만 기록해도 바알의 분신,무신 제라툴,제1위 대천사와 미르,삼사와 이프리트 등을 만나고 싸웠다.

태초신의 강함을 1티어로 뒀을때,2~3티어쯤 되는 세계관의 주력들을 연달아 체험했다는 의미다.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하는 안목이 더 크게 길러졌고,그러므로 정령왕들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리드가 봤을 때 정령왕의 격은 그리 높지 못했다.

이프리트나 제1위 대천사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됐고,미르보다도 한참 뒤떨어졌으며,

높이 쳐줘야 바알의 분신과 비슷한 수준 같았다.

이프리트의 분신을 보고 착각했을 때처럼 페이크에 걸렸을 확률은 낮다.

정령계는 세계관의 중심에 속하지 못하니까.

애초에 정령왕은 그리 강할 근거가 없는 존재다.

‘빛의 정령왕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빛의 정령왕이 완전하게 현현 할 경우 대악마와 비견 된다는 말이있다.

그리고 지금의 그리드에게 대악마란 ‘태초의 3악’을 제외하고 전부 피라미에 불과했다.

[주작의 심장을 신뢰하여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구나. 오만한 녀석.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말이 많아.”

그리드가 턱을 까닥였다.

“덤벼.”

그리드는 명성이 커질수록 예의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다.

도윰을 구하는 입장을 약점 잡아 싸가지 없게 지껄이는 놈에게까지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었다.

[교육이 필요한 놈이로다!]

화르륵!!

파도처럼 범위를 키운 불의 정령왕이 그리드를 덮쳤다.

수십만의 대군에게 포위당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는데 별 감흥은 없었다.

그리드의 검술은 모든 방위를 감당한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우선 시야에 들어오는 학염을 모조리 베어낸 후,

콰앙!!

“초연살파극.”

한 번의 걸음으로 5융합 검무를 구현했다.

마주하는 입장에선 수십 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한 걸음이자 검술이었다.

쿠콰콰콰콰콰쾅!!

불꽃이 수백 갈래로 갈려나갔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며 숲을 붉게 물들여갔다.

베였다는 의미다.

불의 정령왕은 이름 그대로 불이라는 현상의 집합체였으나,영구한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드래곤의 비늘조차 베는 그리드의 공격력이 발생시키는 온갖 물리적인 현상에 의해서 찢겨지고,약해지고,형체를 잃어갔다.

[무...슨!!]

급격히 작아진 불꽃이 핵을 드러냈다.

불의 파도가 검풍에 휩쓸려나가는 와중에 홀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그것이 그리드의 표적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낙룡극살파.”

검성 비반 앞에선 겸양했지만,그리드의 기술은 충분히 훌륭하다.

초연살파극의 마무리 보폭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은 뒤 낙룡극살파로 연계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신속했다.

처음 상대하는 입장에선 반응하기 쉽지 않은 속도였고,예측하기 힘든 위력을 내포한 연계기였다.

화르륵!!

재차 다가오는 검을 불태워 녹이고자 체온을 급격히 높인 정령왕이 푸른 불꽃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탐욕으로 빚은 그리드의 검은 녹지 않았다.

시리도록 섬뜩한 예기를 유지하며 푸른 불꽃을 관통했다.

꽈르르르릉!!

천등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무지막지한 핑음이 연쇄되었고 불의 정령왕은 기세를 완전히 잃었다.

곧 재가 될 성냥에 붙은 불씨처럼 미약한 존재로 전락해 다른 정령왕들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다음.”

이참에 제대로 서열을 정리해놓자.

날 잡은 그리드가 재차 턱을 까닥이자 정령왕들이 서서히 부피를 줄였다.

폭포수를 쏟아내며 대지를 적시던 물의 정령왕은 작은 이슬이 되었고,

폭풍을 일으켰던 바람의 정령왕은 포근한 미풍이 되었으며,태산처럼 세를 키워가던 땅의

정령왕은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돌행이가 됐다.

[불의 정령왕은 우리를 대변하지 않소.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는 놈에게 생각할 기관이

존재할 리 없잖소?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뇌란 말이외다.]

[빛의 정령왕이 소환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게요.]

[나는,인간,좋아요우.]

흡족한 반응이었다.

무기를 거둔 그리드가 유라를 다독여줬다.

“천천히 해.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까. 소풍 나온 셈 치자.”

“네.”

유라는 미소를 짓는 반면 엘프들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정령왕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놓고 소풍 운운하는 것이다.

여러 의미에서 두려웠다.

그리드가 인류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역사상 가장 큰 축복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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