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9화
[꼴 보기 좋구나!! 크핫! 크하하핫!!]
화염이 요란하게 일렁인다.
불의 정령왕의 감정과 동조하여, 정령왕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범위를 확장해나갔다.
다행인 점은 물의 정령왕이 스프링클러의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주변 수풀이 챗더미가 되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어지럽게 뒤섞이는 불과 물 사이에 선 그리드가 정령왕들의 성향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빈 말로 현혹하는 성격은 아니군.’
지난 5일.
그리드는 정령왕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 차원의 지배자들이다.
부탁하지 않아도 물로 술을 빚어주고,바람으로 돗자리를 펼쳐주고,흙으로 식탁과 식기를 만들어주는 등.
굳이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푸는 그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호의 속에 감춘 비수 같은 적의야말로 위험한 법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 확신한다.
정령왕들은 꿍꿍이속을 감추는 성격이 아니었다.
유라의 손에 끌려온 빛의 정령왕을 보고 좋아 죽는 불의 정령왕의 태도가 증명했다.
‘빛의 청령왕을 싫어한다더니 진짜였어.’
이제 보니 감정에 솔직한 존재들이었다.
내게 향하는 호의 또한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수의 호출은 강제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주목해야했다.
세계수가 말하길, 정령왕들이 지상에 남는 기간은 그리드의 자격에 달려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은 언제라도 원할 때면 정령계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떠나지 않았다.
지난 5일 동안 그리드 곁에 머물렀다.
그리드가 불의 정령왕을 쓰러뜨리고 자격을 증명한 시점부터 호의를 품고 접근해왔다는 뜻이다.
[어디서 월 하고 있나 했더니 단체로 수모를 겪고 있었군?]
번쩍!
빛의 정령왕이 환하게 빛났다.
두 눈을 시리게 만드는 강력한 빛이 일대를 하얗게 밝혔다.
그리드와 엘프들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때, 빛의 정령왕은 이미 그리드의 코앞에 바짝 다가와있었다.
유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당황하는 유라와 태연한 기색의 빛의 정령왕을 번갈아 본 그리드가 검파에 손을 얹었다.
정황상 ‘고의로’ 붙잡혀 온 빛의 정령왕의 의도를 경계했다.
‘빛이다. 베는 게 가능할까?’
화염을 베는 것보다 월씬 더 난이도가 높을 터.
심호흡하는 그에게 빛의 정령왕이 말했다.
[템빨신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빛의 정령왕은 불의 정령왕과 달랐다.
그리드가 신이 됐음을 알고 있었다.
‘유라와 계약한 상태니까 유라의 시점에서 나를 지켜박온 건가?'
아니면 빛돌이의 시점에서 지켜봐온 걸까.
빛돌이를 의식하는 그리드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빛돌이의 빛이 빛의 정령왕의 빛에 흡수되어갔기 때문이다.
빛돌이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드의 시선을 느낀 빛돌이가 고개를 돌려온다.
빛의 명암으로 만든 눈과 입.
아마도 그리드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만들었을 얼굴을 반달로 그리는 모양새가 꼭 웃는 모습을 닮아있었다.
"빛돌...”
그리드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너는 왜 어머니를 배신했지? 네가 지금의 힘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호의 덕분이었을 텐데.]
스아아아...
빛돌이가 완전히 흩어지고 말았다.
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빛의 정령왕에게 낱낱이 흡수됐다.
[당신과 계약한 상급 빛의 정령 ‘빛돌이’가 소멸합니다.]
[‘빛돌이’가 활성화시키고 있던 스킬 <빛의 검〉이 소멸합니다.]
그리드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사라지기 직전 빛돌이의 미소가 우는 듯 일그러지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직후다.
[저,저,저 사악한 놈이...!!]
정령의 소멸을 목도한 불의 정령왕이 분노했고,
[아아… 가여운 아이가.]
물의 정령왕이 탄식했다.
땅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흔들리기 시작하는 대지와 거세지는 바람이 그들의 분노를 대변해주었다.
빛의 정령왕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모든 정령왕이 자신에게 악의를 품어도 문제없다는 태도였다.
어머니.
빛의 여신 레베카를 칭하는 단어가 알려준다.
놈의 자신감의 근원은 ‘레베카의 적통’이라는 자부심이다.
다른 정령들과 달리 자신만큼은 특별하다고 여기는 듯한데,양반들의 선민의식을 연상시켰다.
[항변해보아라. 대답 여하에 따라 너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재촉하는 빛의 정령왕이 날카롭게 번졌다.
수백,수천 개의 칼날이 백열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드는 의외로 냉정했다.
빛돌이를 잃은 분노를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상황을 분석했다.
‘굳이 이 시점에 나타난 이유가 뭘까.'
빛은 불과 다르다. 물리적인 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
유라가 빛의 정령왕을 붙잡...아니, 소환하는데 성공한 것은 유라의 의지보다 빛의 정령왕의 의지가 작용한 거라고 봐야 옳았다.
실제로 빛의 정령왕은 유라의 손에서 손쉽게 벗어났다.
빠르게 회전하는 그리드의 두뇌가 이내 해답을 내놨다.
‘내 분석을 끝낸 거구나.’
빛의 정령왕은 유라와 빛돌이를 이용해서 그리드를 관찰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드의 능력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아마 신중히 분석한 끝에 승산을 점치고 눈앞에 나타난 게 아닐까?
이는 즉.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데.’
빛의 정령왕이 그리드의 능력을 전부 파악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산을 확신하는 상태라면....
당연히 그리드에겐 이 상황이 불리했다.
불의 정령왕과 겨뤘을 때처럼 무턱대고 싸우는 건 하책이었다.
그리드의 표정에 감도는 긴장감을 엿본 빛의 정령왕이 우쭐거렸다.
[상황을 눈치 했나 보구나.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네겐 위기를 극복 할 기회가 있으니까. 자,템빨신이여. 어머니를 배신한 이유를 고하라.
정확히 어떤 욕심을 품고 죄를 범했는지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라. 혹시 아느냐?
자애로운 어머니께서 네게 새로운 기회를 주실지.]
죄의 고백,그리고 용서.
빛의 정령왕의 노림수는 명백했다.
그리드가 신들의 실체를 알린 행위.
즉,레베카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레베카교를 멸망시킨 모든 행위가 한낱 욕심에
의한 거짓이었다고 조작하려는 의도였다.
그리드가 여태껏 자신이 해온 일을 ‘죄’라고 인정하는 시점부터 그가 밝힌 모든 진실들은
거짓으로 전락할 것이며,‘용서’를 구하는 순간 추락한 신들의 위신이 다시 회복될 테니까.
[조심하세요. 빛의 정령왕의 기세가 전과 다릅니다.]
바람의 정령왕이 속삭여왔다.
안 그래도 정령왕 중 최강이라는 빛의 정령왕이 더 강해졌음을 경고했다.
[빛의 정령왕은 아스가르드와 소통해왔어요. 정령계를 숫제 신들께 바칠 속셈을 품고 있었죠.
어떤 신이 그의 뒤를 박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리드는 깨달았다.
정령왕들이 그리드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
어찌면 아스가르드의 마수로부터 구해지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정령왕들이 신들의 실체를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인류에게 굳이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
정령만 특별하게 존중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태초신들은 주기적으로 세계를 파피하고 재창조해왔다.
정령왕들이 비록 겉으론 신들을 존중한다지만,속내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지에 반하는 멸망이 달가울리 없으니까.
‘이들 또한 나를 의지하고 싶은거였어.’
눈치 채는 그리드의 사고가 더욱 거대해졌다.
그가 인식하는 ‘세계’에 정령계가 포함되며 확장 된 여파다.
‘정령들과 확실한 우호를 맺을 기회다.’
그리드는 정령의 능력을 잘 안다.
템빨단원들과 계약한 수백의 정령들과 트라우카의 레어에서 홈쳐온 인공 정령들이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지 않았나.
하물며 정령왕들과 직접 소통하며 상호 협력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템빨단원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정령과 계약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면,인류의 전력은 대폭 강화될 것이다.
‘서로 의지할 상대가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롭다.’
판단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정령왕을 투영하는 새카만 눈동자에 억눌렀던 살의가 피어올랐다.
[어리석은... 두 번 다신 없을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냐?]
그리드의 결심을 눈치 챈 빛의 정령왕이 재차 설득했다.
[신중하게 선택해라.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어머니께서 너를 어여삐
봐주실 것이다. 아스가르드에 오를 기회란 말이다. 진정한 신이 되어 영원토록 군림할 기회!]
“너의 바람인가 보지?”
[뭐?]
“나를 설득하는 대가로 아스가르드에 오를 기회를 얻은 듯한데,자격을 증명해야만 신들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네가 레베카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다.”
[워라고 지껄이는 거냐? 주둥아리가 달린 생물들은 대개 쓸데없는 말이 많구나.]
“지금쯤 레베카는 고개를 가웃거리고 있지 않을까? 내가 언제저런 새끼를 낳았었지, 하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유라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드의 말투에서 후로이의 그림자를 엿본 까닭이다.
실제로 그리드는 후로이에게 실시간으로 조언을 얻고 있었다.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하며 대사를 읊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 빛의 정령왕이 싫었다.
승산을 점친 뒤에야 나선 야비함도,아스가르드에게 아첨하는 치졸함도,빛돌이를 삼켜버린 포악함도.
특히 마지막 이유로 용서할 수 없었다.
빛의 정령왕을 죽이면 유라에게 손실을 끼칠 수도 있었지만,그리드는 빛의 정령왕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불의 정령왕에게 일시적으로 품었던 호승심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으로,완전한 적의이자 살의였다.
한편 빛의 정령왕 또한 그리드에게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빛.
자신은 레베카 여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스가르드에 오를 자격을 여태껏 얻지 못했다.
세상 곳곳에 널린,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빛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다른 정령왕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나는 특별하지 못한 게 아닐까,그런 의구심을 늘 품어왔다.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똑바로 마주하기 두려웠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 때문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간 억눌러온 불안감과 열등감이 폭발하고 말았다.
[너는 차라리 죽어라. 이미 한번 신의 호의를 배신한 네놈이 용서를 구해봤자 언젠가
반드시 배신을 되풀이할 텐데 살려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레베카 여신이 가없다. 너를 낳은 날을 떠올리기 위해 족히 수만 년의 세월을 되짚어
보고 있을 텐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괴롭겠어. 치매가 걸린 게 아닐까 싶어서 자괴심마저 느끼겠는 걸.”
[노옴!!]
후로이의 입을 빌린 그리드와 말싸움을 해봤자 상대방만 손해다.
빛의 정령왕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즉시 섬광으로 변해 쏘아져서 그리드를 관통했다.
그리고 대가를 치렀다.
그리드를 꿰뚫고 나오자마자 끔찍한 어둠에 붙들려 존재감이 옅어졌다.
어둠으로 그를 압박하는 존재들의 정체는 대마법사 브라함과 칠악 지크였다.
“죽는 건 너겠지.”
퉤,입 안 가득 차오른 핏물을 뱉어낸 그리드가 사늘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그리드는 일대일 승부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정정당당한 대결을 숭상했다면 애초에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빛.
상성상 불리한 빛의 상대로 그리드가 꺼낸 패는 매우 적절했다.
모든 속성의 마법을 다루는 브라함에게 빛이란 어둠으로 뒤덮으면 그만일 뿐인 개념이고,
신과 대적해온 지크에게 빛이란 궁극의 적으로 늘 파훼책을 강구해 왔으니까.
빛의 정령왕 또한 자신이 불리해졌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즉시 정령계로 향하는 포털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정령왕들이 그 포털을 닫아버렸다.
[빛의 왕이여. 우리는 그대의 귀환을 거부한다.]
[네놈들이 미쳤구나...! 나를 적대한다는 것은 아스가르드를 배신하는 행위와 같음을 모르느냐!!]
[아스가르드하고 배신을 운운할 사이가 아닌데? 우리가 아스가르드를 섬길 거였으면 신선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도 않았겠지.]
[이놈들이...!]
수세에 몰린 빛의 정령왕이 급격히 비대해졌다.
브라함의 마법과 지크의 룬이 엮은 짙은 어둠을 밀어내며 숲 전체를 밝혔다.
명암이 사라진 세계.
다만 새하얀 세상의 풍경은 생각보다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동귀어진 할 기세로군.”
그리드 곁으로 다가온 브라함이 말했다.
“네 금제를 풀자.”
“예?”
금제?
내가 무슨 금제가 걸렸었다고?
황당해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힌트를 주었다.
“데미안이라는 녀석이 말하기를 템빨신의 신성은 물리력이라지.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더군.”
“?”
“그리고 물리력의 속성을 굳이 논하자면 무(無)다.”
“...아?”
그리드가 떠올렸다.
검무에 귀속 된 브라함의 마법들이 온갖 속성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파직!
브라함이 그리드의 이마에 손을 얹음과 동시였다.
그리드로부터 빠져나온 수십 종류의 마법진이 유리처럼 조각나 흩어졌다.
그리고 억눌려있던 진화가 발생했다.
[<그리드의 검무>가 <템빨신의 검무>로 승급합니다.]
[여섯 개의 검무를 하나로 융합할 수 있습니다. 현재 1회만 가능.]
[앞으로 신위가 20개가 오를 때마다 6융합 검무의 창조 가능 횟수가 1회씩 추가됩니다.]
신이 되고도 신성력이 발생하지 않았던 그리드.
늘 의문을 품어온 그에게 드디어 완벽한 해답이 찾아왔다.
템빨신의 신성은 물리력이라는 교주 데미안의 주장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