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9화
아모락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Satisfy를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도 서열 제2위 대악마의 이름 정돈 알고 있었다.
더욱이 야탄교의 설립자 아닌가.
아모락트는 대악마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신실한 신자였다.
즉,인류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쳐온 존재다.
인마대전 전까지만 해도,지상에 강림한 대악마는 대부분 야탄교의 의식에 의해서였다.
사람들에게 사악한 교리를 전파해서 지상을 혼돈으로 물들인 원흉이 바로 아모락트인 것이다.
“이런 미친...?”
처음엔,신이 강림한 줄 알았다.
순백의 육신을 지닌 존재.
거대하나 가녀린 여성은 몸에서 새하얀 광채를 발했다.
절로 우러러보게 만드는 12미터의 신장과 맞물려 신성하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기 전까진 그랬다.
여성은 얼굴에 윤곽이 없었다.
눈,코,입,귀 등의 기관이 존재하질 않았다. 신체 역시 밋밋했다.
튀어나온 흉부와 잘록한 허리만이 그녀가 여성임을 상징했다.
쉽게 말해 마네킹과 같아 오싹한 느낌을 줬다.
화룡점정으로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은 아모락트다.
신성과 비슷한 것을 두른 악마가 하물며 제2위의 대악마였다니.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더 큰 거부감이 생겼고,끔찍했다.
여태껏 기세등등했던 원정대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긴장하고,두려워하고,혐오감을 느끼면서,그들은 무기를 고쳐 쥐었다.
아모락트가 유발하는 ‘기이한’ 종류의 디버프들이 온갖 자유를 침해하고 있었지만,지옥 원정대는 정예 중의 정예다.
비록 최강은 아닐지언정 최고의 플레이어들을 선별해서 만든 집단이란 말이다.
고작 이 정도로 전의를 상실할 리 만무했다.
스아아아아!!
원정대원들의 몸을 각양각색의 빛이 감쌌다. 공포를 이겨내고 발동시킨 버프 스킬들이 그들의 육체와 마력을 강화시켰다.
나무지팡이를 움켜쥔 성녀 루비의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성역을 확장시켜서 아모락트의 마기를 밀어낼 의도였는데,삽시간에 진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성역이 아군을 감싸지 못한다.
루비의 언저리에 맴돌 뿐 영역을 키우지 못했다.
아니,도리어 밀렸다. 점차 열어져갔다.
악마들을 상대로 절대적인 효력을 자랑했던 성역이, ‘악을 불허한다.’는 존재 이유가 무색하게도 무력했다.
‘마기가… 아니야?’
성녀는 인류의 버팀목이다.
루비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굴강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의지할 수 있게끔,위기에 동요하지 않아왔다.
때때로 책임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고,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지만,그녀는 오빠 그리드의 등을 보고 배웠다.
강해진 대가로 짊어진 책임을 원망하지 않고 의무로 받아들였다.
한데 이 순간.
루비의 커다란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무력감을 이토록 철저하게 느껴본 경험은 처음이라서,아모락트가 발하는 정체모를 광채에 서서히 침식되어갔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가 당신의 스킬 사용 권한을 빼앗았습니다.]
[전개 중이던 모든 스킬이 비활성화 됩니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가 당신의 스킬 구조를 바꿉니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가 피아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세희야!”
가장 먼저 이변을 감지한 사람은 지슈카였다.
그녀는 성녀 루비와 함께 아군의 후방을 책임져왔다. 게다가 남다른 ‘시야’를 지녀서 아군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정통의 리더다.
이번 원정만큼은 지옥이라는 특수한 환경 탓에 유라에게 총대장 자리를 양보했지만,자신이 동료를 보살펴야 한다는 자각을 습관처럼 갖고 있었다.
지슈카는 루비의 성역이 영역을 키우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현상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곧 닥칠 위기를 직감했다. 즉시 파마의 화살로 결계를 세워 루비를 보호할 방편을 마련했다.
급기야 루비가 전개 중이던 광역버프 스킬이 소멸했을 때.
파작! 파자자자자작!!
지슈카는 파마의 결계를 작동시켰다.
모든 해로운 효과를 제거하고 화살의 가호를 내리는 결계.
아모락트에 의해 변질되어가던 루비의 스킬 구조가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루비의 주위로 떠오른 8개의 푸른 화살이 뒤이어 작렬한 아모락트의 포격을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괜찮니?”
“어,언니...”
지슈카에게 루비는 성녀가 아닌 세희 였다.
벌써 몇 년째 옆집에 살면서 가족처럼 지내온 아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그녀가 겉보기와 달리 철인은 아님을 알았다.
워낙 마음씨가 착해서 사람들을 잘 돌보고,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곤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희는 성인도 아닌 소녀였다. 내색하지 않을 뿐 의지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자,심호흡 하자. 주변을 잘 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네 도움이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들이 아니야.”
루비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감싸안고 속삭이는 지슈카의 품에서 긴장감과 부담감을 서서히 떨쳐냈다.
굳었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갔다.
“...제 생각에 저건 아모락트의 본체가 아니에요. 특별한 방법으로 만든 의태 같은데,아마 대부분의 스킬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루비는 절망을 말했다. 자신의 한마디,한 마디가 아군의 사기를 꺾을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전해야만 했다.
지슈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그리드가 이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생각하면서.
“그래,그럼 우리가 이기겠네.”
지슈카는 루비를 안심시켰다.
대부분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의태?
그게 뭐 어쨌는데?
본체보단 약할 거 아니야.
끼릭!
거대한 활의 시위를 당기는 지슈카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깊이,더 깊이 가라앉아갔다.
피부를,살을 파고든 시위가 그녀에게 새로운 고통을 기억시켰지만,이 순간 지슈카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감정은 공포 따위가 아닌 열정이었다.
지킨다.
내가,소중한 사람의 동생을,그리고 동료들을.
남미의 태양처럼 밝고 뜨거운 지슈카의 심장이 불꽃의 차륜을 일으켰고,
-유라. 한때 야탄 신을 섬겼던 나의 아이..야?
주변을 개의치 않고 오직 유라에게 속삭이던 아모락트의 소름 돋는 음성이 처음으로 멈췄다.
이목구비가 없는 그녀의 얼굴이 지슈카를 향해서 돌아갔다.
-너…
푸화하하학!!
지슈카의 오른쪽 팔이 허공에 솟구쳤다.
어느새 접근해온 아모락트가 단 일격으로 그녀의 어깻죽지를 날려버린 것이다.
원정대원들이 봤을 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빛이 번쩍인다싶더니 이미 결과가 발생해 있었다.
하지만 궁성의 눈은 아모락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지슈카의 활은 최단의 거리를 주파하고자 직진으로 쏘아진 아모락트의 얼굴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었다.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아모락트의 수도에 의도적으로 오른쪽 팔을 내줬고,그녀의 팔이 잘려나감과 동시에 시위는 놓아졌다.
시위를 떠난 학살.
템빨신 그리드가 만든 그것엔 주작의 불꽃,파마의 기운,그리고 궁성의 의념과 진원진기가 모조리 담겨있었다.
다른 전설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근접전에 취약하여,비교적 쉽게 사선을 넘나드는 궁성의 예민한 감각이 빠르게 개방시킨 진원진기 시스템.
계정당 단 3회밖에 허락되지 않는 그 힘을,지슈카는 일말의 미련없이 사용해버린 것이다.
...물론 미련이 없다면 거짓이지만,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옥 원정대는 전원 하이랭커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자칫 죽게 될 경우,플레이어 세력이 입는 피해의 규모는 너무나도 클 것이었다.
지옥 원정 일정 자체가 지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그리드에게 민페다.
-...!
아모락트가 뭐라고 외쳐댔지만,놈의 목소리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화살이 내는 핑음에 산산이 부서져 흘어졌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주술의 작동이 멈췄다는 의미다.
아모락트가 속삭일 때마다 발생했던,보이지 않는 마력의 사슬은 더 이상 유라를 옭아매지 못했다.
자유를 되찾은 유라가 즉시 무돌이와 교감했다.
정령 갑주.
그리드의 신성을 닮은,주황색의 반투명한 기운이 무장(武裝)이 되어서 유라의 전신을 감쌌다.
유라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모락트의 얼굴에 박힌 채 회전하며,마치 블랙홀처럼 아모락트의 육신을 빨아들이고 있는 지슈카의 화살을 시야에 담은 채.
“지옥 규제.”
지옥이 사냥꾼의 영토가 되었다.
지옥에 서식하는 모든 존재가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멸악의 빛.”
옥색의 빛줄기가 아모락트를 관통했다. 하지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모락트가 두른 광채가 마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을 재차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유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모락트를 허무하게 관통하고 지나간 열악의 빛을 지슈카의 화살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껴서다.
멸악의 빛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전개한 스킬과 마법도 여전히 맹렬하게 회전중인 지슈카의 화살에 빨려 들어갔다.
지슈카의 화살은 빠르게 부피를 키워갔다. 급기야 아모락트의 상반신을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가 되었다.
-너…느…은…
길게 늘어지는 아모락트의 음성 일부가 굉음 사이로 흘러나왔다.
판단이,빠르군.
너 또한,탐이,난다.
따위의 개소리들.
꽈아아아아앙!!
아모락트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 폭발을 일으킨 지슈카의 화살이 아모락트를 산산 조각냈다.
나부끼는 파편들은 유라가,카츠와 페이커를 비롯한 원정대원들이 일일이 베어나갔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푸하…!”
원정대원들이 벅찬 숨을 토했다.
아모락트의 온갖 디버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우리가 제2위 대악마를 퇴각시켰다고?
안도하고 환호하는 그들을 지슈카가 재촉했다.
“당장 떠나야 돼...!”
지슈카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진원진기를 소모한 대가로 스태미나가 바닥난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등에 업은 유라가 사람들을 인도했다.
“어서 성으로 가요!”
크리스탈 성.
지상과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설치 된 곳으로,지옥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다.
급히 이동을 개시하는 원정대를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아 또 뭔데. 왜 매번 내가 뒤처리를 감당해야하는 거야.”
로제.
플레이어 최초로 대악마가 된 존재.
아모락트의 부하가 되기를 자처하여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은 그녀가 수십 개의 마법진을 허공에 띄었다.
불을 뿜는 지팡이를 위시해 원정대의 발을 묶...
“웩!”
...지 못했다.
그림자를 타고 귀신 같이 날아온 페이커에게 역이 따이고 마법의 캐스팅이 막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모락트의 새로운 의태가 도착할 때까지 3분만 버티면 될 일이 처음부터 꼬였으니.
“에잇…!”
로제의 근성도 대단했다. 무너지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고 일어나 육탄전을 벌였다.
지광이를 봉처럼 휘둘러서 유라를 노렸다. 지슈카를 업고 있는 그녀가 가장 빈틈이 많아보였으니까.
하지만.
“꺅!”
그녀의 지팡이가 유라에게 닿기전에 카츠의 검이 먼저 그녀를 베었다.
무시무시한 공격력.
로제는 황홀함마저 느꼈다.
“멋져...! 이게 바로 태초의 3악과 직접 연결 된 고대 클래스...!”
나도,나도 언젠간...!
열망하는 로제의 몸 위로 수십개의 스킬 포화가 떨어졌다.
고작 30위대 대악마의 힘으로 원정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불가항력이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년.”
챗빛으로 소멸하는 와중에도 깔깔 웃는 로제의 모습에 지슈카가 혀를 내둘렀다.
잠시 후.
-내가 몰라봤구나.
이미 모든 인간들이 떠난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아모락트가 중얼거렸다.
-태양을 떨어뜨릴 활... 설마 대별왕의 힘을 품은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지슈카는 포비아의 힘을 계승하지 않고 궁성이 됐다.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했고,동대륙의 정체모를 사당에서 파마의 힘까지 얻었다.
궁(弓)이라는 글귀가 새겨진,몹시 허름한 사당이었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고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잊힌 신들 중에서 활을 쏘는 신은 단 둘뿐이다.
대별왕과 소별왕.
그중 지혜롭고 어질며 인간에게 호의적인 신은 대별왕이었다.
소별왕의 함정에 빠져 지옥에 떨어지고 윤회의 강에 갇힌 신세였지만,최후의 힘과 의지를 지상에 남겨두었고 그것을 지슈카가 계승한 듯했다.
-이번 세계에서 모든 인과가 이어진다...?
아모락트가 어럼뭇이 눈치 했다.
이번 세계가 마지막 세계가 될 수도 있음을.
아버지께서 더 이상 슬피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찌면,인간들을 순순히 바알에게 보내줘도 괜찮지 않을까.
이번에야말로 바알이 죽지 않을까.
...아니,안 된다. 이럴 때야말로 신중해야 한다.
바알이 당대의 인간들마저 집어삼키고 전례 없이 강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했다.
애초에 지옥이란 인간이 올 곳이 못 됐다.
아버지께서 바라신 지옥은 죽어 천국에 오르지 못한 자들의 안식처이지,산 자들이 넘볼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옥에 찾아오는 인간들은 모조리 악마로 만들어야 옳다.
아모락트의 사고가 광기로 뒤틀리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아무래도 제 힘이 부족한 것 같아요. 더 강해지는 방법이 없을까요? 네? 위대하신 아모락트님! 저를 좀 봐주세요!”
-...
아모락트의 밋밋한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부활하자마자 달려온 로제가 산통을 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