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권 12화
“어,어떠세요? 편안하신가요?”
“아…”
바닷속으로 뛰어든 그리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했던 까닭이다.
잠수 전에 한껏 몰아쉬었던 숨을 토해낸 그가 젊은 수인족 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햇빛이 녹아들어 선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바다의 중심에서,마주친 눈동자를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린다.
“너, 혹시 예전에 세이렌에서 ?”
“기,기기 기억해주시는 건가요? 맞아요! 어릴 때 저는 폐하와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렸었어요!
헤헤,사실 그땐 삼지창을 들 힘도 없어서 멀리서 소라껍데기를 던지는 게 전부였지만...”
“많이 컸구나.”
그리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 본인도 놀랄 정도로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기뻤다.
내가 지켜냈던 아이가 어엿한 성인이 됐다는 사실이.
‘심지어 바다의 가호를 써주다니.’
수중에서의 호흡을 돕는 이 절대적인 가호는,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수인족 왕족과 일부 베테랑 전사들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젊은 전사가 증명하듯 세월이 흘렀다.
이젠 대부분의 수인족 전사가 타인에게 가호를 자유롭게 써주는 실력자로 거듭난 눈치였다.
“매일 폐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왔어요. 우리가 오늘도 살아숨 쉬며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고,맛있는 해초를 요리해 먹을수 있는 건 전부 다 폐하 덕분이니까.”
“...”
내가 너희를 도운 횟수보다 너희가 나를 도운 횟수가 아득히 많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치 않고 옛 은혜를 말하는가.
기쁘기도,민망하기도,미안하기도 해서.
그리드는 더 빠르게 헤엄을 쳤다.
헐레벌떡 뒤쫓는 젊은 전사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아! 얼마 전엔 로드 황자님께서 세이렌에 방문하셨었어요. 실력이 몸시 고강하시다고 왕께서 감탄하셨죠.”
‘어느새 거기까지 갔구나.’
부친이 걸어온 길을 답습하는 것을 첫 번째 모험으로 삼은 로드.
몇 달 못 본새 또 부쩍 컸겠지.
‘기특한 녀석. 보고 싶네.’
점차 바다가 어두워진다.
그리드와 수인족 전사들은 바다가 새카맣게 물들 때까지 심연으로 가라앉아갔다.
“자.”
그리드가 문득 품에서 원형 방패를 꺼냈다. 꽤 오래 전에 기사들의 장비를 만들어주다가 마음에 들어서 보관해온 물건인데,가벼워서 무기를 휘두를 때 제약이 없다. 몇 년 동안 2번쯤 서브장비로 이용했었다.
"엇...?"
젊은 수인족 전사가 얼떨결에 방패를 받아 쥐었다.
갓 핸드가 그녀의 몸을 측면으로 돌려주었다.
순간.
쿠웅!
암석 뒤에서 튀어나온 상어형 몬스터가 방패로 돌진해 머리를 박았다.
젊은 전사는 기민했다. 즉시 상황을 이해하며 삼지창으로 적의 배를 찔렀다.
“꽤 쓸 만하지? 선물이다.”
“가보...! 아,아니! 왕께 진상해서 국보로 삼을게요!!”
“너한테 준 걸 왜 왕한테 바치겠다는 거야?”
피식 웃으며 전사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그리드의 시야에 새로운 광경이 가득 찼다.
[플레이어 최초로 고대의 도시 ‘벨리토리누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거대한 녹색의 도시였다.
낮고 작은 집도,높고 웅장한 건물들도.
무너진 제단과 계단,형체를 알수 없는 파편들까지도.
도시의 모든 것이 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저곳은 성터였을까.
도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유독 규모가 크고 황폐한 구역이 그리드의 시선을 끌었다.
성터 곳곳엔 석판의 잔해가 나뒹굴고 있었는데,물고기가 뜯어먹은 이끼 틈새로 낯선 글씨와 그림들이 문득문득 보였다.
[벨리토리누자 최초 발견 보상으로 필리토리누자의 석판>을 해독합니다.]
쏴아아아아.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석판의 잔해들이 찬란한 빛을 뿜었다.
빛이 한 점으로 모이며 과거의 한 장면을 영사했다.
성벽처럼 높은 석판이 보였다.
그 뒤로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고대 거인족의 성체가 우뚝서있다.
‘해와 달과 별... 아니,3개의 태양인가?’
석판의 가장 위쪽엔 3개의 태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각자 크기가 달랐고 하나가 유독 작았다. 그래서 별인 줄 알았는데,자세히 보면 형태가 모두 같았다.
그림 아래엔 인상적인 글귀가 적혀있었다.
-선조들께서 달에 오르셨으니 우리는 해에 오르리라.
"...?"
달에 올랐다고?
고대의 거인족은 우주선이라도 만들었단 말인가?
‘아니,우주선을 만들 정도였으면 태양에 오르겠다는 터무니없는 소린 안 했겠지.’
여기서 말하는 달과 해는 천상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고대의 지식 일부를 얻은 대가로 모든 스킬의 경험치가 30퍼센트 상승합니다.]
[<무신의 최후를 그리는 그리드식 전투술>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피어 샷>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 응집(강학)>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 방사(강학)>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혼투격>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천지 뒤집기>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
..
어마어마한 보상이 발생했고 파일볼프의 설명이 뒤따랐다.
“아주 먼 옛날... 태양이 3개이던 시절엔 지금보다 더 많은 신들이 아스가르드에서 더불어 살아갔다네.
본인들은 평화의 시기로 추억할 테지만 우리에겐 아니었지. 그때의 신들은 지상에 너무 쉽게 간섭했다네.”
옛 기억을 더듬는 파일볼프의 음성이 묵직했다.
“내 이웃이,혹은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신의 자식을 배고 돌아온다거나,양들이 갑자기 들소 떼로 변해 어린 양치기 소년을 짓밟아 죽인다거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서 그런 짓들을 벌였다고요?”
“신이 너무 많았던 게지. 별에 별 군상이 다 있었던 게야. 가벼운 장난을 일삼는 그들 탓에 온갖 문제가 발생했네.
인간들의 틈에서 자란 반신들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천상의 신들을 원망하기 시작했고,신들은 그들의 하찮은 복수심을
한낱 유희로 삼았지. 복수를 돕겠다는 빌미로 시련을 내려 반신들을 뜻대로 움직여댔는데,이때 드래곤을 자극하기도 해서 신들이 도리어 사냥을 당하는 사태도 벌어졌어.”
“아...?”
“질서가 무너졌네. 신들의 권위는 실추 된 반면 시련을 극복한 반신들은 강해졌어. 인간들이 반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한 것이 치명적인 문제였지. 초조해진 신들은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다네.”
“그런 과정 속에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파벌을 나눠 전쟁을 치렀고,칠악성도 탄생한 거군요.”
“ 맞네.”
반신을 신성시하던 인간들이 날벼락을 맞고 죽었다.
신성을 잃은 반신들은 일신의 무력이 무색하게도 소멸해갔다.
천상의 신들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지상엔 해일이 범람했고 화산이 폭발했다.
오직 인간들만이 울부짖는 혼란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거인족은 인간의 편에서 싸웠다.
온갖 병기를 만들어 인간들을 지원했다. 대가는 컸다. 거인족의 왕국 전체가 통째로 바다 깊숙이 수장됐다.
이후 인간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신도,반신도,거인족도 의지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지혜와 기술을 익혔다.
몇몇 신들이 그들을 경계하고 시기했다.
신들의 지지를 얻은 악마들이 지옥에서 기어올랐다.
신들의 편에서 싸웠던 일곱 선인이 신들의 추악한 죄를 눈치채고 뒤늦게나마 다시 인류의 편에 섰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고,끝났다.
일곱 선인이 칠악의 오명을 뒤집어 쓴 채로.
...그리고 현재.
나름의 질서를 되찾은 세계는 과거에 비해서 형편이 나았다.
반으로 쪼개진 채 드래곤과 협정을 맺는 수모까지 겪은 신들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못했다.
거인족과 칠선인 같은 협력자들 덕분에,혹은 신들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상처를 잊은 인류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스스로 설수 있게 됐다. 수많은 전설과 인신을 배출했다.
그 중심에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함에 있어 그리 어려운 입장이 아니란 의미다.
당대의 인류는 강하다.
파일볼프는 명정하게 파악했다.
그러므로 바다에 묻힌 도시를 찾아냈다.
다시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이 도시가 천상의 신들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 거란 사실을 알고도 개의치 않았다.
“신들의 전쟁이 한창 심화됐을 당시. 이대로는 지상이 흔적도 없이 소멸할 거라고 염려한 거인족은 어떻게든 천상에 오르기 위해 노력했다네.
우리의 지혜로 만든 보물들을 진상해서 전쟁을 중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그런 순수한 희망을 품었던 게지. 초월성을 지닌 존재들은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건거야."
석판에 새겨진 글귀.
해에 오르겠다는 다짐은 즉,천상에 오르겠다는 다짐이 맞았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천상에 오르지 못했네. 우리의 평생을 바쳐 만든 크고 단단한 비행정도 태양의 열기를 감당하진 못했으니까.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지. 허망할 정도로 쉽게.”
"..."
“좌절하고 있는 우리 앞에 한 신께서 강림하셨네. 대별왕. 오래전부터 홀로 인류를
돌봐주셨던 그분께서 활을 싹 가장 큰 태양을 떨어뜨리셨지. 덕분에 세상엔 2개의
작은 태양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천상에 오를 수 있었네.
뭐,그걸로 끝일세. 협상 따윈 불가능했지. 안 그래도 신들에겐 눈엣가시였던 우리
거인족은 얼마 뒤 바다에 수장되었고 거기까지가 내가 겪은 일일세.”
“대별왕...”
지크와 레이더스 아니,지발과 함께 환국을 방문했던 날.
그리드는 쫓겨난 신들을 보았고 개중엔 소별왕이 있었다.
태초신 한울의 아들.
삼사와 달리 점잖은 성격이었다.
지크가 허리 숙여 인사한 대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별왕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죠?”
대별왕이 인류를 위해 싸웠었고 소별왕의 성향 또한 대별왕과 닮았다면.
두 형제를 같은 편으로 회유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는 그리드에게 파일볼프가 잔혹한 현실을 전했다.
“지옥에 떨어지셨네.”
“…네?”
“우리를 도운 대가를 혹독히 치르신 게지. 그때만큼은 천상의 신들이 모두 협력했다네.
신성해야 할 존재들이 대별왕 한 분께 아귀처럼 달려드는 광경은... 죽어서도 악몽에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네.”
“신들이 모두 협력했다고요? 한울이나 소별왕도요?”
“신들의 면면이 일일이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렇겠지.
대별왕을 비호하는 신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당시 대별왕의 행동은 마지막 선을 넘은 것과 같아서 모든 신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 싶네.”
"...역겨운 놈들."
신이란 인류를,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유로 숭배 받는다.
그런 주제에.
자비를 바라고 아스가르드를 방문한 거인들을 통째로 바다에 수장시키고 그들을 도운 신을 지옥에 떨어뜨렸다고?
그게 어딜 봐서 인류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놈들이란 말인가.
‘기생충이라고 해야 믿겠다.’
“석판을 보고 궁금해 할 것 같아 지난 이야기를 해줬을 뿐일세. 천 년도 전에 지나간 일에 일일이 심력을 낭비하지 마시게. 자네만 손해일세.”
“…네.”
월야철.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한 그리드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잠시 뒤.
그의 속은 다시 뒤집어졌다.
[침입자 발견.]
[대상을 신(神)으로 식별.]
“어...? 어어?”
“미안하네. 저게 여기에 있었을 줄은 나도 몰랐군. 내가 죽은 뒤에 옮겨놓은 듯한데.”
[신살(神殺) 시퀀스 가동.]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석상이 푸른 안광을 빛냈다.
쿠우우웅.
석상이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해류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발생하여 일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석상을 뒤덮고 있던 이끼 또한 흔적도 없이 흩어져갔다.
“마장기 트라우카.”
높이 8미터의 거인.
장장 천 년 만에 가동하는 놈의 무장은 피처럼 붉었다.
“대마병기 일색이던 마장기 중 유일하게 대신병기로 만든 모델일세. 거인족 최후의 프로젝트였…”
꽈아아아앙!
1,000미터 위의 수면에 도달하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마력 엔진을 분사하여 벼락처럼 쏘아진 트라우카의 발길질에 복부를 얻어맞고 떠오른 그리드의 흠뻑 젖은 몸을 달빛이 감쌌다.
어느새 밤이다.
‘쉽게 가는 법이 없네.’
그리드를 중심으로 이미 서른 개의 갓 핸드가 인공 감각을 펼치고 있었다.
수면을 꿰뜰고 쫓아온 어뢰를 고개 젖혀 피한 그리드가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찌어어어엉!!
드래곤의 대가리를 달은 트라우카의 견갑과 구젤의 도가 충돌했다.
“마침 레이더스가 무쓸모로 느껴지던 참이긴 했어.”
[경고. 대상의 신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드의 신성이 짙어져갔다.
17번째 서사시를 쓰기 전과 비교해서 명백히 짙었다.
수평선에 걸친 일출과 같아서,기껏 찾아온 밤이 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