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32화 (1,520/1,794)

76권 13화

지난 몇 달 동안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제라툴에게 얻은 비급의 적합자를 찾아 분배하고,성검을 분해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주요거점들의 군대를 사열하고,발할라를 찾아가 교류를 쌓고,고대의 유적지들을 탐사하고,

소와 돼지 등의 가축으론 만족하지 못하게 된 네펠리나의 새로운 식량 수급처를 확보하는 등.

딱히 굵직한 사건은 없었는데도 시간이 쏜살 같이 흘렀다.

찰나지간에 관통하는 감각.

제라툴의 검력과 닮았다.

그리드는 자각했다.

‘내가 긴장하고 있구나.’

바알과의 재회가 머지않았다.

대륙을 횡단하는 김에 인신의 행방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실감했다.

세계의 흐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신화 찬탈자의 하수인들과 조우하여 몇 번의 전투를 치르고,유적을 지키는 수호자들을 파괴하다보니 어느덧 700레벨을 달성했다.

모든 스탯이 7차 각성을 맞이하여 1.3배씩 강화됐다. 몇 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다.

때마침 크리스가 400레벨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대를 초월하는 성장 속도.

전직 후 고작 1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템빨단 내부에서만 15명의 5차 전직자가 탄생한 시점이었다.

지발의 마장기 탑승 시간이 몇 배나 길어졌다는 보고가 뒤따랐다.

‘모든 상황이 플레이어의 성장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드가 드래곤과 엮이고 잊힌 고대의 문물이 모습을 드러낸 이 후부터 그렇게 됐다.

머잖아 다가올 고난에 대비하라고 경고하는 듯해서,그리드는 바알과의 재회를 점차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이유였다.

그리드는 어서 바알과 싸우고,이겨서,지옥을 정화하고 싶었지만,한편으론 바알과 싸워 이길 확신이 없으므로 두려웠다.

결전의 날이 빨리 오길 바라는 동시에 유예를 얻기도 바랐다.

그날의 결과에 따라서 세상이 180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긴장감과 부담감이 한없이 커졌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리드의 표정은 늘 평온했고 행동엔 위엄이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안심했다.

그리드가 주요 거점들을 시찰하고 발할라를 방문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밝았다.

사람에게 근심과 걱정이 어찌 없겠느냐만,적어도 희망이 더 커보였다.

“여기가 맞습니까?”

그리드는 가리온과 꾸준히 소통해왔다.

그리드 덕분에 다시 승배 받기 시작한 가리온은 신력을 서서히 회복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리드를 근원으로 삼는 신력이었다.

그리드의 커다란 신전 옆에 나란히 선 가리온의 작은 신전이 사람들의 오해를 산 여파였다.

가리온을 대지의 신이되 그리드를 보좌하는 신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가리온은 개의치 않았다.

의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신분이라도 좋다는 태도였다.

-맞아여기어딘가에있어

가리온은 지맥의 흐름을 토대로 신력을 추적하고 인신의 위치를 식별한다.

하지만 그리드의 기대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여기 어딘가라고 해도…”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거대한 숲.

햇볕이 드리울 틈조차 없어 어둡고 넓은 숲이다.

이곳에 작정하고 숨은 인신을 어느 세월에 찾아내란 말인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특정할 순 없습니까?”

-신력이완전했어도못해

-내가다스리는건땅이지

-땅위에살아가는존재를다스리는게아니니까

-애초에상대도신이야

“...기대 이하군.”

-말이심해

-여기까지안내해준것만도

- 엄청난일이잖아염치없어

“제 친한 벗 중엔 드래곤을 식별하는 레이더를 만든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 레이더는 드래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죠. 명색이 대지의 신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계보다 못한 건 큰 문제 아닙니까?”

과장을 조금 보탰다.

드래곤 레이더도 만능은 아니다.

대상이 근처에 있거나 대량의 마력을 방사해야만 감지했다.

-나는신이지탐지기가아닌데

-친구잘나서좋겠다

‘노인네가 삐치긴.’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비하가 아닌 친애의 감상을 품으면서다.

그리드는 고작 몇 달 만에 가리온에게 마음을 열었다.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고 포용하는 가리온의 성향이 그의 호감을 샀다.

그리드가 크란벨의 뿔을 뽑았다.

드래곤 웨폰.

빛이 들지 않는 숲에서 순백의 자태를 드러낸 그 아름다운 검은 유성을 연상시켰다.

새카만 밤하늘을 고고히 스치는 유성.

지상에 추락하여 운석이 되기 전까진 인간의 손에 결코 닿을 수없는 그것을,그리드는 가볍게 쥐고 휘둘렀다.

쿠와아아아악!!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나간 검기가 낮과 밤을 공존시켰다.

그리드가 선 자리는 여전히 캄캄한 반면 그리드의 전방은 밝았다.

무성했던 수풀이 모조리 베여나가고 햇살이 드리운 까닭이다.

지면 곳곳에 낀 이끼가 눈에 띄었다. 랜디를 몇 번이나 미끄러뜨렸던 원흉이었다.

그리드의 뜻을 읽은 템빨골2가 불꽃을 일으켜 이끼를 모조리 불살랐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토록 거했던 불길이 이끼만 태우고 사그라졌다.

수풀에 작은 불씨조차 옮기지 않았다.

결사들 밑에서 수학한 템빨골2의 마나 제어 능력이 극도로 섬세해진 것이다.

장기로 삼는 공간 왜곡의 위력이 극대학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드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호흡을 느리게 가져가는 춤사위였다.

태양보다 짙은 노을빛 검광이 비단처럼 펄럭일 때마다 사방이 밝아졌다. 숲이 지워져갔다.

“부족한가.”

이프리트의 팔이 수축했다.

붉은 비늘을 겹겹이 포개어 그리드의 근육에 밀착됐다.

불편함은 없었다.

도리어 혈맥에 활력이 돌고 개운한 감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마나의 흐름이 촉진됐다.

손끝으로 대량의 마력이 응축되었다.

브레스의 전조였다.

비록 약소하나 명백히 드래곤의 힘이다.

그리드의 시선이 보다 먼 곳에 닿고,브레스를 머금은 그리드의 손이 시선과 직선을 이룬 그때.

“숲을 완전히 없애버릴 작정이시오?”

그리드가 애타게 찾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낡은 나무 활을 손에 쥔 초로의 사내였다.

“이곳은 지역에서 몹시 중요한 장소요. 자연을 순환시키고 사람들에게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없어선 안 될 숲이외다. 게다가 신화 포식자의 하수인들이 주시하는 곳이기도

하오. 그러니 사람들을 위해서라도,당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쯤하고 관두시오.

내가 졌소.”

사냥의 신 드비리온.

PvE능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사냥신의 가호>버프와 절대다수의 몽크가 섬기는 신으로 유명한 존재다.

한때 지발이 드비리온의 사자였다.

템빨신 이전 인신 중에 인지도가 가장 높았다.

“뭐하시오? 어서 그 불길한 기운을 거두고 검으로 직접 내 목을 치시오. 저항은 않겠소.

신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당신에게 목숨을 내주는 편이 세상에 이로울 테니.”

드비리온 또한 템빨신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숲을 찾아오는 사냥꾼과 나무꾼,그리고 약초꾼들의 입을 통해 그리드가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신뢰하진 못했다.

신화 포식자에게 오래도록 시달려온 부작용이다.

드비리온은 긴 세월 동안 이 숲에 갇혀있었다.

신학 포식자의 하수인들에게 표적이 된 채 숨어지냈다.

다른 인신들 또한 자신의 신격을 노릴 거라는 오해를 키웠다.

그래서 템빨신의 방문을 감지하고 더 깊이 숨었다.

하지만 이 순간 미련을 버렸다.

괜히 소란을 키웠다가 신화 포식자에게 나란히 잡아먹히느니 자신을 희생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저항을 포기했다.

애초에 미련을 가져선 안 될 삶이었다.

사람들에게 숭배되어 신이 된 이후 지금까지 나는 과연 세상에 도움이 됐던가?

고작해야 사람들의 사냥을 도왔을 뿐이다.

굶주리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줄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들의 화살이 짐승의 목에 정확히 꽂히게끔 도와준 게 전부였다.

하찮고 무가치했다.

삶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내 삶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끝났다.’

인간이 아니게 되었던 그날에.

고독에 발을 들였던 순간부터 내게 삶이란 없었다.

약한 신.

단지 선한 마음 탓에 숭배되어 신이 되었던 존재가 아득히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미소 짓는다. 끝을 받아들이자 도리어 평안해져서 되찾은 미소였다.

콰아아아앙!!

그리드의 손에서 브레스가 쏘아졌다.

두 눈을 질끈 감는 드비리온에게 찰나지간에 도달해서는,드비리온의 등 뒤로 피어오른 불길한 안개를 꿰뚫어 소멸시켜버렸다.

“...?”

죽지 않고 살아남은 드비리온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방금 그건 리치의 마력인가? 무후총의 망령이 보낸 하수인인가보군.’

안개의 정체를 유추해 본 그리드는 순보를 썼다.

드비리온에게 다가서더니 다양한 의미에서 감탄하며 물었다.

“혹시 여태껏 짐승만 사냥해 오신 겁니까?”

“...그렇소. 나는 사냥꾼에 불과하므로 필요할 때만 짐승을 잡아 살과 가죽을 취해왔소.”

“...”

그리드가 당혹을 삼켰다.

예상과 달리 초라한 드비리온의 모습에 난감함을 느끼면서도 기뻐서 웃고 말았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월씬 더 선한 신.

가리온에 이어서 또 다시 신뢰해도 좋을 신을 만난 것이다.

약한 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힘이야 키우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드비리온은 행색이 초라한 반면 신력의 밀도가 높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숭배받았으니 당연했다.

제대로 싸워본 경험이 없는 반면 잠재력이 큰 것이다.

“이 세상엔 사냥해야 할 짐승이 아주 많습니다. 존경하는 드비리온,제게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드가 정중히 요청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드비리온이 망설일 때였다.

“...일단 장소를 옮기도록 하죠.”

“아,그래. 그게 좋겠소. 여기에 있다간 망령이 새로운 추적자를 보낼 테니.”

드비리온은 신화 찬탈자의 하수인을 걱정했지만 그리드에게 그딴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드는 자신과 연결 된 가리온의 신력이 꺼질 듯 일렁이고 있음을 느꼈다.

어떤 압도적인 존재에게 습격을 받은 듯했다.

무신 제라툴이 연상 될 정도였는데,신격을 크게 잃은 제라툴이 재차 강림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건...

“가죠.”

서둘러야 한다.

드비리온의 손목을 덥썩 붙잡은 그리드가 곧장 순보를 써서 공간을 도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중에 멈췄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마다 결계가 펼쳐진 까닭이었다.

초네임드 보스가 등장할 때면 종종 뒤따르는 공간 이동의 제약이 도처에 산재했다.

-라우엘,사도들을 이 좌표로 보내줘.

레베카가 직접 빚은 대천사 중 하나가 강림했단 사실을 직감한 그리드가 사도들을 소집했다.

<전광>을 발동하면서다.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가 백열하며 그리드의 비행을 도왔다.

곧 뇌신이 된 그의 신형이 벼락으로 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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