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권 20화
그리드는 제(制)의 효용성을 의심해왔다.
CC기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리드 본인이 너무 강해서였다.
굳이 제를 쓰지 않아도 공격을 쉽게 명중시키고 단 한 번의 공격을 치명상으로 직결시키는 그리드 입장에서 기회비용을 제에 투자하는 건 손해밖에 안 됐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높은 수준의 적들과 싸우게 된 지금,그는 제의 소중함을 새삼 깨우쳤다.
최대 0.1 초에 불과한 지속 시간.
그러나 제의 가치를 깎아내릴 순 없다.
절대자들을 상대로 통한다는 게 중요했다.
‘인공 감각으로 공격을 읽는 즉시 전개하는 식으로 운용하면.’
후발선지의 묘리를 인위적으로 구현 가능하다.
나보다 빠르고 강한 적들의 선공에 한 발 늦게 대응해도 흘려내고 역공을 가할 수 있다.
“저게 무슨 일이지?”
신전 지붕을 부수고 솟구친 그리드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안 그래도 템빨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모인 인파가 한둘이 아닌 상황이다.
폭음과 함께 무너진 신전이 여러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또 다시 적이 습격해온 건 아닐까 염려했다.
그만큼 난세였다.
사람들은 작은 사고만 생겨도 적의 습격을 떠올렸다.
두려움에 휩싸인 채 무기를 꺼내 쥐고 경계했다.
‘아.’
템빨계.
그리드의 신성을 근원으로 삼는 작은 차원이 사람들의 마음에 동조한다.
차원 너머에 선 그들의 공포, 각오,믿음에 공명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드에게 닿는 파문이었다.
쓰러질 듯 기울어졌던 몸에 용의 기세를 담아 승천한 그리드.
극을 이어서 가상의 적을 베기 직전이던 그의 검이 한층 더 강력한 검기를 품었다.
[템빨계의 탄생을 목도한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더 숭배합니다.]
[<템빨신의 검무,제(制)>와 <약소 브레스〉의 연계를 하나의 동작으로 인식한 사람이 몹시 많습니다.]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는 당신의 모습에서,사람들은 언젠가 보았던 희생을 떠올립니다.]
뭉개진 얼굴은 갓 핸드로,난도당하고 부러진 몸은 망토로 가리어 사람들을 안심시켰던 그리드다.
그날의 그리드가 감췄던 상처를 눈치 챈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리드의 희생은 그때부터 회자되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선 템빨신의 모습이 세상 곳곳에 벽화로 그려졌고,성전에 기록됐다.
템빨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날의 사건을 언급하였다.
희생의 검무
제와 브레스의 연계 파장으로 크게 기울어졌던 그리드의 신형이 사람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든 검무다.
사람들의 숭배와 믿음이 만든 가상의 검무가 템빨계와 공명하여 현실이 됐다.
[새로운 검무 <위(爲)>를 습득하였습니다.]
<위(爲,)> Lv.l
템빨신의 희생을 그리는 검무입니다.
사람들의 숭배와 믿음이 만들었습니다.
비장한 춤사위로 주위를 압도하며 대상에게 접근하고 <약소 브레스>에 비례하는 데미지를 입힙니다.
이때 그 누구도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주변의 모든 적이 당신의 위세에 짓눌려 반드시 공포에 빠지고 공포에 걸린 대상은
방어력이 하락하며 움직이지 못합니다. 지속 시간 최대 5초.
관련 상태 이상을 저항하는 대상에겐 최소 0.2초,최대 0.3초 동안 효과 적용.
스킬 검기 소모:80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 이 스킬은 <제(制)>,<약소 브레스>와 쿨타임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 이 스킬은 <이프리트의 팔>을 착용하고 있을 때만 활성화 됩니다.
신이란,숭배 받을수록 강해진다.
그 강력한 법칙이 그리드에게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그리드가 전율했다.
강자가 질어져야 할 책임.
원망하지 않고 당연하게 짊어져온 책임이다.
어떤 대가를 바랐던 적이 없건만,정작 보답이 되어서 돌아오자 기뻤다.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콰르륵!!
가상의 적을 벤 극의 검로가 여러 갈래로 분절됐다.
가상의 적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극의 위력을 담은 파의 물결이었다.
대상을 느리게 만드는 묘리를 품었다.
제. 아니,‘위’의 영향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약화 된 가상의 적을,그리드는 수십 회의 찌르기로 난도했다.
[새로운 융합 검무 <위룡극파살연 (爲龍極派殺聯)> 을 창조하였습니다.]
<위룡극파살연 (爲龍極派殺聯)>
6개의 검무를 하나의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무섭게 솟구치는 광신광룡의 기세가 적에게 천벌을 내립니다.
주변의 모든 적을 위압하며 대상에게 즉시 접근합니다.
대상을 최소 0.1 초에서 최대 5초동안 공포에 빠뜨리고 약소 브레스에 비례하는
마법 데미지와 물리 공격력 3,0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피해를 입은 대상은 공중에 뜨고 행동 불가와 약점 노출 상태가 되며 방어력을
무시하는 물리 공격력 2,200퍼센의 피해를 총 5회 입습니다.
추가로 반드시 허탈 상태에 빠지고 느려지며,물리 공격력 6,000퍼센트의 피해를 최대 30회 추가로 입습니다.
대상은 1회 공격당할 때마다 무장해제되고 출혈 상태가 되며 절망에 빠집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와 이프리트의 팔 장착.
스킬 자원 소모:검기 최대 수치의 절반. 마나 20,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6시간
낙룡극연살파에 비하면 약하다.
하지만 대신 강력한 보정 효과를 지녔다.
검무의 첫 번째 타격이 빗나갈 확률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드는 충분히 만족했고,동쪽의 누군가도 찬사를 보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의 새로운 무위에 찬사를 보냅니다.]
[<위룡극파살연>에 강력한 가호가 깃듭니다.]
짤랑.
여전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방울소리와 함께,새로운 6융합 검무가 완전한 진화를 마쳤다.
위룡극파살연에도 <궁극의 무>가 깃들었다.
치우가 내리는 가호였다.
‘잘 지내시나.’
멀리서도 항상 지켜보며 호의를 보내주는 치우.
진정한 무신이며 유일한 신인 그에게 그리드는 언젠가부터 정감을 품었다.
문득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불리 만나러 갈 순 없었다.
치우는 소멸을 꿈꾸는 존재니까.
그가 그리드에게 호의적인 이유는 자신을 죽여주길 바라서다.
만나봤자 마음만 무거워질 것이다.
‘애초에 쉽게 만날 수도 없지.’
치우는 환국에 머문다.
멋대로 들락거릴 수 없는 곳이다.
“...”
그리드의 시선이 지상으로 향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검무에 감탄하는 기색들이었다.
그리드가 한층 더 강해졌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눈치였는데,이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드가 다른 사람들이 강해지길 바라듯, 사람들 역시 그리드가 더욱 강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템빨국은 배신해도 그리드는 배신하지 않는단 말이 있을까.
감찰단에게 제거 된 변절자들조차도 템빨신만큼은 진실로 존경했다는 유언을 더러 남길 정도였다.
‘기쁘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보고 선 그리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를 기쁘게 만드는 건 새로운 검무를 얻었단 사실보다 사람들의 신뢰였다.
잠시 생각해본 그가 템빨계의 정보를 불러왔다.
- 템빨신이 허락한 대상이 템빨계에 진입할 경우 격이 보존되고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오직 그리드가 허락한 대상만이 템빨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그리드는 우선 그 대상을 템빨단이나 템빨제국민으로 한정할 계획이었다.
추이를 지켜보면서 차츰 영역을 확장하는 게 옳다고 봤었다.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을 고쳤다.
[템빨계 진입을 허락할 개체,혹은 집단을 지정합니다.]
“인류.”
템빨계는 신계이나 지상에 터를 잡았다.
지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배척해선 안 됐다.
애초에 템빨계는 그리드와 가리온,드비리온의 신전을 뜻하기도 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수록 템빨계의 신들은 더욱 숭배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드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고,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가리온과 드비리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건 좀... 황당하네요?”
제2위 대천사 가브리엘이 배신자 가리온을 징벌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리파엘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귀찮은 가브리엘을 떨쳐낼 기회였으니까.
애초에 가리온 따위야 자신이 나서면 언제든지 처치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진 그랬다.
“저거... 저건 정말로 신계야?”
“말도 안 돼. 당연히 가짜일 거야.”
“저게 어딜 봐서 가짠데?”
리파엘의 주변을 맴도는 아기천사들이 소란을 피웠다.
거슬렸다.
지상에서부터 피어오른 신성이 점차로 뚜렷해질수록, 따스함이 다가올수록 리파엘의 가슴은 도리어 차갑게 식었다.
탄생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
다름 아닌 분노가 그렇게 만들었다.
리파엘은 깨달았다.
칠악성이 반기를 들었을 때도,한울과 그의 아들이 여신을 배신했을 때도,자신은 진정으로 분노했던 게 아님을.
진정한 분노란 머리와 가슴을 이토록 차갑게 만드는 거였으니까.
“...입을 좀 닫아줄래요?”
리파엘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기천사들을 노려보는 시선이 표독했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눈매는 연기였던 게 아닐까,그런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질색한 아기천사들이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닫았고,살심을 간신히 억누른 리파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상에 신계를 세웠다고?’
이런 전개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게 가능한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저 멀리 있는 그리드가 영영 닿지 못할 존재로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템빨계가 세워진 시점부터 그리드는 주권을 회복했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지상을 침략했던 천사들과 신들이 함부로 지상을 넘볼 수 없게끔 억제했다.
여신께서 두문불출하고 가브리엘이 격을 잃은 지금.
어쩌면 두 번 다신 찾아오지 않을 ‘자유’를 만끽할 기회를 놓친 리파엘이 급기야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세상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전반적인 흐름이 어떤 위험을 암시하는 듯하다...
‘설마 언젠간 아스가르드가 위기에…?’
막연한 불안에 휩싸이던 리파엘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옥의 바알을 떠올린 것이다.
바알이 건재한 이상 템빨신은 천상을 넘보지 못한다.
바알은 강력했다.
타고난 힘과 격은 나와 같되 나와 달리 아무런 제약 없는 삶을 살아온 존재.
심지어 제 아비마저 배신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힘을 쌓아온 놈은,템빨신이 영영 넘지 못할 통곡의 벽일 터였다.
믿어 의심치 않은 리파엘이 등을 돌렸다.
괜히 템빨계에 접근해서 수모를 겪느니 미련을 버리고 천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방해물이 나타났다.
“용살자 하야테... 뭡니까? 어찌하여 당신이 여신의 사도인 제 앞 길을 가로막는 거죠?”
제라툴의 연이은 실패가 천상의 명예를 어지간히 실추시켰구나.
리파엘은 귀찮고 불쾌할 뿐이었다.
하야테 또한 여태껏 세상에 없던 위대한 존재였으나,리파엘은 대천사장이다.
리파엘이 경외하는 대상은 이 세상에 몇 되지 않았고 하야테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신은 늘 그래왔듯 드래곤들의 눈치나 살필 일이지 무엇을 명분으로 삼아 천상과 엮이려고 하나요?”
“그대의 살기를 좌시할 수가 없었소.”
하야테의 손에 검이 쥐어졌다.
물질로 만든 검이 아니라 검기가 빚은 형상이었다.
용살검.
그것은 개념에 가깝다.
드래곤조차 베는 개념.
“내겐 템빨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서 말이오.”
“지상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군요. 참담하네요. 제라툴 그 가짜가 천상의 명예를 더럽힌 탓이겠죠.”
“너희 천사들도 함께 자처한 일이지.”
불쑥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대마법사 브라함.
리파엘이 한동안 주목했던 존재다.
수백 년 전.
브라함이 파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천상에도 알려졌고 리파엘은 브라함의 영혼을 회수하려고 시도했었다.
훌륭한 천사의 재목이었으니까.
브라함이 태초의 3악 중 하나인 베리아체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탐냈다.
오히려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결국 실패했다.
브라함은 한낱 영혼으로 전락한 상태에서도 마법을 구사했으니까.
게다가 어떤 목적을 갖고 활동했기 때문에 자꾸 위치가 바뀌어서 회수가 쉽지 않았다.
‘마침 잘 됐네요.’
리파엘이 서서히 미소를 되찾아갔다.
하야테와 브라함.
감히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저들을 죽여 없애면 마음 속 분노가 조금쯤 가라앉을 거란 기대감에서였다.
그때 였다.
“이번엔 늦지 않았죠?”
메르세데스가 현장에 도착했다.
피아로와 함께였다.
이들 넷에겐 공통점이 있다.
절대자 하야테는 기감.
대마법사 브라함은 마나.
기사 메르세데스는 혜안.
농부 피아로는 자연을 토대로 넓은 범위에 감각도를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러 조건과 우연이 겹치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이변을 거의 곧바로 감지하는 수준이었다.
하야테는 본래부터 가능했다.
하지만 그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는 드래곤이 두려워서였는데,그리드 덕분에 공포를 극복하고 용기를 얻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최근에야 실력을 쌓아 가능해졌다.
의도치 않게 공조하듯 움직여서 이 순간 리파엘을 고립시켰다.
“...”
리파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의 수준을 하나씩 가늠해보더니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하야테가 강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브라함의 마력이 미지로 다가왔다.
메르세데스의 눈은 소문 이상으로 불쾌했고 피아로의 순수한 기운은 가리온의 신격을 내포한 느낌이라 기이했다.
펄럭!
잠시 침묵하던 리파엘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하야테와 사도들이 즉각 반응했다.
신성의 폭격에 대비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나설 틈이 없었다.
리파엘이 그대로 도주한 탓이다.
한동안 지상은 거들떠도 안 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