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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58화 (1,546/1,794)

템빨 77권 - 18화

“태생적으로 고룡의 위협을 받는 대부분의 상위룡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소.”

얼마 전.

하야테는 그리드를 찾아가 말했다.

광신광룡의 비화를 토대로 배운 바가 크다면서, 탑을 떠나 긴 여행길에 오를 계획을 밝혔다.

“오랫동안 한 곳에 터를 잡고 존엄을 지켜온 상위룡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눌 거요.”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게끔 설득할 거라며.

결코 쉽지 않겠지만 무작정 칼을 맞대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며 웃었다.

여행 중에 인신의 섭외를 돕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한데 오늘.

상황이 급변했다.

바알이 제대로 사고를 친 것이다.

하야테는 급히 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사들은 그에게 그리드를 돕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당연히 허락했다.

지혜의 탑의 본질은 인류가 대응하기 힘든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것이다.

단순히 드래곤에게 집착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마음 같아서야 하야테도 함께 지옥으로 출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상을 비워둘 순 없었기에 홀로 탑에 남았다.

결사들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건 악룡 번헬리어의 태동이었다.

아주 먼 과거에 바알과 협력하고 마기를 삼킨 드래곤.

지상에 펼쳐진 수라도가 놈을 자극할 수도 있음을 염려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세상의 끝에서부터 피어오른 기운.

무지막지하게 강력하고 불길한 그 기운이 하야테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깨어났나.’

고아한 몸가짐.

검파 위로 손을 얹는 하야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바알의 의도겠지.’

탑을 세우고 천 년이 지나서야 새로운 꿈을 품고 여행을 계획했건만.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죽게 생겼으니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이 죽어도 그리드가 남기에.

작은 미련을 느낄 뿐, 걱정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

시간이 촉박하다.

그리드 일행은 상황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엘리베이터 탑승 직전에 보았던 하늘에만 수백 명의 인간이 위기를 겪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현재 지옥에 갇힌 사람들의 목숨은 그들 개인의 목숨이 아니다.

그들이 죽을수록 바알의 세력이 강해지므로 대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구출할 필요가 있었다.

“지옥 내에서 로그아웃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태 발생 직후.

라우엘은 일고의 망설임 없이 로그아웃했다.

역시나 눈치 빠른 유라가 미리 로그아웃한 채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전달 받았다.

“다만 아시다시피 전투 판정 시에는 로그아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로그아웃 타이밍을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하더군요.”

적들의 공세가 쉬지 않고 이어진단 뜻이다.

“애초에 로그아웃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고요.”

바알이 지옥에 새로운 법칙을 세웠다.

지옥에 입장한 존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눈앞의 위기를 로그아웃으로 피해봤자 결국 평생 지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까지 파악 된 지옥 탈출 방법은 목숨을 잃는 게 유일합니다. 하지만 사망한 플레이어들이 남긴 후기를 보면 100퍼센트 확률로 스킬을 잃는 까닭에 무턱대고 목숨을 버리라기엔...”

지옥에 갇힌 플레이어들이 죽어선 안 되는 이유였다.

죽은 자의 스킬은 아수라의 파편에게 흡수되고 바알이나 바알의 부하들에게 전이된다.

“스킬을 빼앗긴단 사실이 알려졌으니 난리도 아니겠군.”

“네, S.A 본사에 테러할 거라고 항공편을 알아보는 사람이 부지기수더군요.”

‘쌤통이다. 양아치 새끼들.’

뭣 같은 S.A.

부디 시위 트럭에 둘러싸여서 주차장 입구까지 막혀버려라...

그리드는 진심으로 저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파그마의 후예의 마지막 전직 퀘스트.

파그마의 영혼을 구하라.

이걸 당최 무슨 수로 깨라고 만든 걸까?

만약 그리드가 신화 등급을 이루지 못했다면, 사도들과 결사들, 그리고 인신들을 얻지 못했다면.

막말로 평범한 파그마의 후예였다면 눈물을 머금고 퀘스트를 포기했을 것이다.

‘최소 10년... 아니, 20년 후에야 대규모 공대를 꾸려서 도전해봤겠지.’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고인물이 됐을 무렵에야 도전할 수 있는 전직 퀘스트라니.

이게 과연 올바른 설계일까?

그리드는 아니라고 봤다.

전직 퀘스트의 난이도가 자신을 저격해서 상승한 거라고 의심했다.

예전부터 그놈에 밸런스에 집착해온 S.A그룹은 플레이어의 앞길을 가로막기 일쑤였으니까.

어쩌면 나는 S.A그룹에게 품은 반발심 때문에 여기까지 성장한 게 아닐까...

“지옥 곳곳에 있는 중립 지역은 야탄의 신상이 파괴되면서 안전지대 기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만... 마냥 해답이 없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건재한 크리스탈 성을 대피소로 삼으면 되니까요.”

빠르게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

그리드 곁에 선 라우엘이 쉬지 않고 상황을 전달했다.

수년 만의 동행이었다.

스탯을 정치력에 투자한 여파로 전투 능력을 상실한 라우엘은 전장을 꺼려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유라에게 얻은 정보를 정리해서 그리드에게 전달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직접 수행하며 전달하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사람들을 구출해서 성에 모은 뒤 전력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대가 전선에서 밀려나 흩어진 상황이라 난이도가 무척 높을 겁니다. 사람들의 위치를 알아야 구출이 가능한데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기가 요원하니 원...”

“사람의 수색은 걱정마라.”

마장기까지 실은 까닭에 가뜩이나 좁게 느껴지는 엘리베이터.

그 중심에 홀로 당당히 선 브라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와 저 여자의 마법으로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제시카를 힐끗거리면서다.

제시카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것이었다.

평소 브라함의 성격을 고려하면 대단히 놀라운 태도였다.

제시카의 실력을 순순히 인정하는 눈치였으니까.

하지만 결사들은 브라함에게 인정을 받고 말고 할 위계가 아니었다.

“저놈이 참 싸가지가 없구려.”

비반이 제시카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워낙 커서 모두의 귀에 들렸다.

애초에 작게 말했어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청력을 속이진 못했을 거다.

“이해하세요. 베리아체의 자식인데다 역대 최강의 마법사잖아요. 배경을 생각하면 거만할 만하죠. 저래 뵈도 저하고 연배도 비슷할 테고.”

“개념이 없는 거하고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쯧쯧.”

급기야 혀를 차는 비반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브라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대뜸 노려보질 않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마자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정중앙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질 않나.

그리드의 사도만 아니었어도 진즉 버릇을 고쳐놨을 것이다...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경박하군. 위계에 어울리지 않게 오성에 결함이 있는 듯한데, 제자에게 경지를 추월당한 이유를 알겠다.”

브라함은 결사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전대 전설과 초월자들.

무려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좌해온 인물들이라지 않나.

더구나 그리드에게 수차례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자연히 높이 평가하며 호감을 품었다.

하지만 비반이 패용한 검을 본 순간 마음이 사늘하게 식었다.

그리드가 만든 드래곤 웨폰.

아직 자신조차 선물 받은 적 없는, 역사상 가장 귀한 보물을 별 개뼈다귀 같은 놈이 차지하고 있자 배알이 꼴렸다.

비반에 한정해서 호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단 의미다.

“뭣이...? 경박해? 오성에 결함이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경박하고 무식한 걸로 모자라 청력에도 손색이 있나? 재차 봐도 제자에게 추월당할 만하다.”

“이, 이...!”

강인한 육체, 지능, 마법 실력, 외모에 이르기까지.

브라함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그 반동인지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개차반이었던 예전과 비교하면 선비 수준으로 나아진 것이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아무튼 성격이 나쁘단 말이다.

마력으로 강화시킨 감각도와 타고난 두뇌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분석하고 거리낌 없이 파고들었다.

비반이 감당할 리 만무했다.

그가 브라함을 이기기 위해선 폭력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 흡혈귀, 마물 놈이...”

급기야 칼자루를 거머쥐는 비반을 결사들이 제지하는 가운데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속삭였다.

“괜찮을까요? 저쯤 되면 거의 앙숙인데요?”

“괜찮아. 나랑 아그너스도 잘 지내는 마당에 우리보다 훨씬 어른인 양반들이 마냥 유치하게 굴까?”

“...”

“...”

그리드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브라함과 비반이 살기를 거뒀다.

그들도 부끄러운 건 아는 것이다.

그대로 사태가 진정되는 듯했지만 오산이었다.

“눈깔을... 파버릴까?”

다짜고짜 아그너스가 으르렁거렸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눈 한 번 깜빡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베티가 상당히 거슬렸던 눈치다.

욕설만큼은 삼키는 태도가 제법 칭찬할 만했다.

베티가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위축 된 게 아니라 소녀의 모습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눈. 줄까.”

“...!”

아그너스가 기겁했다.

제 눈구덩이에 손가락을 쑥 쑤셔 넣는 소녀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저쪽도 괜찮겠죠?”

“아마도...”

이쯤 되자 그리드도 살짝 지친다는 반응이었다.

결사들의 기세에 짓눌린 네펠리나가 그의 팔에 달라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손주와 놀아주는 감각으로 붓을 들어 강아지를 그려냈던 아벨리오는 메르세데스의 혜안에 읽혀 사라지는 강아지를 보고 침음했고, 프론잘츠 형제와 룬어를 놓고 토론하던 지크는 드물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무투가 켄은 가리온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는데 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저러는 건지 의문이었다.

막말로 개판이었다.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저들이... 대단하신 분들이 맞는 거죠?”

재차 확인을 요구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는 차마 뭐라고 대답해주지 못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긴장한 기색이 없는 동료들이 그는 무척 든든했다.

지옥에서 활약 중인 원정대와 합류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파티가 탄생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바알도 두렵지 않다...

띠잉.

마침 엘리베이터가 하강을 멈췄다.

거인이 만든 자동 개폐 장치가 작동하며 문이 열렸고, 그리드를 필두로 삼은 일행이 지옥으로 당당히 발을 내딛었다.

[무작위 전이가 발생합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건 커다란 마법진이었다.

지옥에서야말로 완전하게 기능하는 흑마법이 방문자의 기척을 읽은 즉시 발동했다.

마법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하고 파훼시킨 브라함을 제외한 모든 일행이 빛에 휩싸여 지옥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드가 떨어진 곳은...

“템빨신...?”

윤회의 강이었다.

지옥 달의 핏발 선 눈들이 그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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