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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564화 (1,562/1,794)

템빨 78권 - 3화

지상에서 적야는 드문 밤이다.

하물며 적야라고 해서 늘 ‘그’가 출몰하는 것도 아니었다.

적야의 대도.

Satisfy 오픈 이후, 그가 플레이어에게 목격 된 횟수는 총 세 차례에 불과했다.

딱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적었다.

나라마저 훔친다는 도둑이 흔히 목격되면 그게 도리어 웃기는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그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도적 직업 관련 퀘스트에도 적야의 대도가 언급되는 일은 적었기에 더욱 그랬다.

도둑이라는 신분 탓에 세계관에서 비중이 적은 인물.

아니, 인물이라기 보단 이름쯤으로 치부했다.

적야의 대도라는 이름이 아주 오래 전 역사부터 기록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적인 역사가 아니라 히든 퀘스트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이면의 역사들에서나 등장했지만...

아무튼 거의 매 시대마다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됐으니 란스티어처럼 계승되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초에 그리드와 엮였다는 소문이 돌기 전까진 그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가 이 순간 만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놈...! 노옴...!!”

역대급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등장이었다.

무려 검성의 모습과 능력을 빼앗은 대악마의 심장을 빼앗아버렸다.

증명하는 듯했다.

지상과 지옥을 통틀어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도둑이라는 증명.

“좀도둑마냥 황금 고블린 같은 습성을 지녔으니 빼앗기지. 쯧쯧.”

적야의 대도의 쭈글쭈글한 손에 쥐어진 심장은 보통의 장기와 생김새가 달랐다.

무언가로 향하는 통로처럼 뻥 뚫린 원형이었으며 그 속은 검었다.

그것은 창고다.

발레포르가 평생토록 훔쳐온 물건과 개념들을 보관해둔 보고(寶庫)였다.

그러므로 적야의 대도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내놔...! 내놔라...!”

“다시 훔칠 생각은 않고 애걸을 해? 네놈은 돗자리 펴고 동냥질이나 하는 게 맞겠다.”

“아아...! 으아아아...!!”

발레포르의 비명이 점차 커졌다. 날카롭게 갈라지는 비명이 죽어가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명백한 소음이었다.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곧 서서히 펴졌다.

발레포르의 모습이 점차 다시 흉측해진다 싶더니 비반이 본래의 멋진 모습을 되찾은 까닭이다.

잘생긴 중년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눈요기가 되는 법이었다.

정작 곁에 나란히 선 적야의 대도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쯧... 대체 무슨 배짱으로 홀로 6등위를 상대한 게지?”

“검사가 싸움을 피하는 경우는 딱 하나요. 신념을 지켜야 할 때.”

“말은 번지르르하군.”

비반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발레포르를 위기에 빠뜨렸었다.

순전히 심상세계를 개방했기 때문인데, 누가 봐도 초조했다는 증거다.

심상세계의 개방은 자신의 근원을 밝히는 행위.

함부로 써선 안 될 비장의 수단 중 하나였다.

자칫 상대를 죽이지 못했다간 약점을 간파당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한데 비반은 처음부터 심상세계를 열었다.

그야 당연히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가오를 수차례 레이드하고 지옥 페널티를 모면한 사도들과 달리 결사들은 지옥 페널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물론 높은 격을 보유한 까닭에 일부 저항하긴 했지만 지상과 비교하면 한참 약했다.

비반이 발레포르를 쉽게 베지 못했던 이유이며, 발레포르의 접근을 순순히 허용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비반은 잡다한 핑계들을 댈 생각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서 거리를 좁힌 발레포르의 저력은 필시 대단했으니까.

게다가 무지막지한 권능을 발휘했다.

온전한 상태에서도 쉽게 이기지 못했을 상대였다.

지옥에서 한 자릿수 대악마란 그만큼 강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만만하게 봤소.”

“판단력에 큰 하자가 있구만 그래.”

“기껏 도와줘놓고 욕먹기 싫으면 닥치시오. 안 그래도 많이 참고 있는 거니까.”

“나야말로 자네의 검을 훔치고 싶은 걸 참느라 아주 곤욕일세.”

적야의 대도는 계승되는 이름이 아닌 개인이다.

그는 수백 년을 살아온 전설이자 초월자였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챈 비반이기에, 적야의 대도가 탑을 털어먹은 도둑놈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존중은 했다.

적야의 대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탑의 결사들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지각하고 있다.

필요할 땐 언제라도 주머니를 털어먹을 생각이지만, 개인적인 욕심과 별개로 그들이 죽는 꼴을 좌시할 생각은 없었다.

적야의 대도가 바라는 건 평화.

인류의 발전과 부흥이다.

그래야 훔칠 물건이 많아질 테니까.

“내...놔...라아!!”

발레포르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빚은 심장의 보고.

그 안에 숨겨두었던 힘들을 빼앗긴 대신 순수한 마기를 무지막지하게 발출해댔다.

몸은 다시 괴수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거대한 야수가 날뛰는 듯한 광경.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

“저리 흉측해도 측은지심이 드는군.”

“드래곤하고 비교하면 젖먹이처럼 보이긴 하겠지. 하지만 쉽게 보지 말게.”

“이미 된통 당해놓고 어찌 쉽게 보겠소.”

대악마.

그 힘은 똑똑히 확인했다.

심호흡한 비반이 집중했다.

적야의 대도와 간격을 나란히 맞추고 섰다.

움직임에 호응해 협공을 취하겠다는 의도였는데, 적야의 대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버렸다.

“지금 나랑 함께 싸우자고?”

“그럼 이 마당에 따로 싸우자는 거요?”

“자네 혼자 싸워야지. 도둑놈한테 같이 싸워주길 바라는 게 도리어 이상한 거 아닌가?”

“...??”

“난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으니 그만 돌아갈 걸세.”

“그게 무슨 헛소리요? 어차피 지옥에선 나가지도 못... 설마 바알이 세운 법칙을 무시하는 방법을 아는 거요?”

“영업 비밀이야.”

스윽.

발레포르의 심장에 손을 집어넣은 적야의 대도가 곧 어떤 물약 한 병을 꺼냈다.

“이건 빚일세. 언젠가 수십 배로 돌려받으러 가겠네.”

“...?”

핑그르르 날아온 물병을 건네받은 비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홍색 물약.

제대로 봉인되어 있었으나 희미하게 향이 새어나왔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향기였다.

“그거, 쥬다르가 만든 각성제일세.”

건강과 지혜의 신.

쥬다르는 레베카의 두 아들 중 하나로 최고위 주신이다.

그가 만든 활력제라면 필시 만능의 비약일 터였다.

“별 거 없어. 단순히 온전한 컨디션을 되찾게 만들어주네. 정신을 맑게 해서 올바른 판단을 돕기도 하지.”

“지옥의 압력을 극복시켜 준다거나 하는 효과는 없는 거요?”

“그냥 각성제라니까.”

“...”

비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명색이 건강과 지혜의 신이 만든 물약치고 효과가 하찮지 않나.

아니, 애초에 이런 위급 상황에 고작 이딴 걸 준다고?

발레포르가 평생토록 모아온 보물을 모조리 훔쳐버린 주제에 너무 쪼잔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덕에 심장을 쉽게 훔쳐놓고 고작 이런 걸로 빚을 지운다? 막말로 도둑놈 심보 아니오?”

“기껏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따지는 꼴이구먼. 난 이만 가겠네.”

혀를 찬 적야의 대도가 등을 돌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현장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번에 비반은 그 기척을 희미하게 읽어냈다.

‘그렇군. 마력의 운용을 그런 식으로 해서 은밀한 거였나... 다음부턴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반은 물약을 마셨다.

투명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끈적거렸다.

식도를 휘감는 감촉이 침을 삼키는 느낌을 주었다.

설마...? 끔찍한 상상을 하는 비반의 코앞으로 발레포르가 쇄도해왔다.

“내놔아!!”

조금 전까지와 달리 압도적인 기세.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진 발레포르는 자신의 활로를 스스로 차단했다. 모든 힘과 기술을 대상을 죽이고 돌파하는데 집중시켰다.

그에 호응해서 폭주하는 마기가 닿는 모든 것을 분쇄시키고 어둠으로 침식시켜갔다.

마치 검은 태양 같아서, 지옥 달과 궤도가 같아지는 순간 세상에서 붉은 빛이 사라졌다.

온통 캄캄했다.

일식을 일으킨 것이다.

꽈아아아앙....!

물리적인 힘과 마법적인 힘, 그 어떤 것이든 소멸시킬 기세인 마기의 집합체.

비반의 망토와 닿자마자 풍화시켜버리는 그 흉흉한 마기의 기세에 놀란 사람들이 탄식했다.

“흠.”

반면 비반은 침착했다.

이쯤이면 됐다 싶은 거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눈엔 섬광이 번쩍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철컥.

납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무렵엔 이미.

“...!”

발레포르의 거대한 몸이 마기와 함께 통째로 갈라지고 있었다.

무엇이든 베는 검.

검성 비반의 검이 지옥 페널티를 이겨내고 제6위 대악마를 일격에 베어버린 것이다.

쥬다르의 침... 아니, 각성제가 도왔다.

각성제를 먹고 의식을 깨우친 비반은 부족한 오성이 흔들어놓았던 마음을 진정시킴으로써 ‘완전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그게 다였다.

지옥 페널티를 극복했다거나, 어떤 버프를 얻은 게 아니라, 비반은 단지 본래의 실력을 제대로 냈을 뿐이다.

멀찍이서 그 기척을 읽은 적야의 대도가 한숨 쉬었다.

“제명에 못 살 자다.”

비반은 검기를 극한까지 활용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울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진동하는 기운을 체내와 체외 양면으로 상시 유지하고 있는데 정신이 온전할 리 만무했다.

본인의 판단력과 기억력이 나날이 퇴색되고 있음을 아마 비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자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무엇이 영웅을 집착하게 만들고 병들게 했는가.

그야 당연히 드래곤이다.

비반이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 선택의 이면엔 용살을 이루겠다는 목적이 숨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벼려지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검기가 어떤 시점에 일깨워지는 오성과 일체하는 순간.

한 마리 드래곤의 목이 떨어지고 비반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었다...

“빚을 갚기 전까진 죽지 말게.”

발레포르의 죽음과 함께 걷힌 일식.

다시 적야를 되찾은 지옥의 풍경을 시야에 담는 대도의 주름 진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

“난처해졌군.”

무작위 전이에 걸려 일행과 동떨어진 아그너스가 미간을 좁혔다.

지옥 페널티에서 자유롭지 못할 일행이 신경 쓰였다.

그들에게 어떤 호감을 느껴서 걱정하는 게 아니다.

지옥 달을 매개로 작동 중인 차원 단위 주술을 파괴하기 위해선 그들 전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뿐이었다.

저벅, 저벅.

아그너스는 지옥을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열기, 그리고 악몽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 끝없이 펼쳐졌으나 그에겐 고향처럼 익숙했다.

“...??”

도중에 마주친 마물들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아그너스를 스쳐지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언데드가 지닌 강점이다.

지성이 없는 마물들의 피아 식별 방법은 마기, 혹은 적의이므로 아그너스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상 그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

멤피스.

바알이 키웠던 마수들이 있다.

마력사슬로 묶어두고 잔인하게 학대하길 반복했는데, 그래야 독기가 쌓여 올바르게 자란다는 개소릴 지껄여댔었다.

그 영향인지 몹시 포악하게 자란 녀석들이 수십 마리다.

놈들의 우리 중 하나가 바로 이 근처에 있다.

놈들이 사슬에서 풀려나기 전에 내가 목숨을 끊어놔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기억을 되짚으며 나아가던 아그너스가 문득 놀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거대한 눈 수백 개가 앙상한 협곡에 달라붙어 있었다.

흉측하게 꿈틀거려대는 그것은... 자세히 보니 눈이 아닌 알이었다.

흰자위인 줄 알았던 표피가 점액질로 번들거렸다.

마치 개구리의 알 같은...

의아해하는 아그너스의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체파르데아의 알.”

탑의 결사 베티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쭉 아그너스를 주시했던 기이한 소녀.

“체파르데아는 몰라. 자기가 몇 번이나 죽었는지.”

“...”

체파르데아는 쉽게 죽지 않는다. 바알의 최측근답게 아주 끈질겨서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도 놈을 해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런 놈을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는 존재?

한 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말뜻을 이해한 아그너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토악질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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