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8권 - 20화
당했다.
저래서야 생존 가능성이 없다.
만인의 공통 된 생각이었다.
다짜고짜 나타난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고, 브레스에 적중당한 그리드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고, 바알이 난입하기까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개를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그리드의 죽음을 당연하게 예견했다.
하야테, 마리로즈, 크라우젤을 압도하고 유유히 떠났던 악룡 번헬리어.
지옥의 지배자, 만악의 근원 바알.
세계관 최강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리드가 살아남을 거라고 예상하는 건 템빨신교 신자라도 못 할 일이었다. 막말로 양심 없는 바람이란 말이다.
물론 그리드는 늘 그랬듯이 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브레스에 얻어맞고 바알에게 폭행당하면서도 5초가 지난 후까지 살아남았다.
아직 불사를 소모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됐다.
그 모습에 경의를 표하듯 번헬리어가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급기야.
번쩍!
그리드의 입에서 빔이 쏘아졌다.
저건...
저쯤 되면 이미 용자물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아니, 뭔데!?
꽈아아앙!!
사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바알의 머리가 폭발했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브레스를 코앞에서 적중시킨 만큼 연출 효과가 강렬했다.
바알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어도 납득할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웨폰과 맞물린 바알의 마검엔 여전히 강맹한 기운이 담겨있었다.
작은 흔들림조차 없이, 그리드가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올린 모든 힘을 태산처럼 굳건히 버텨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알은 태초의 신이 가장 먼저 빚은 존재 중 하나다.
모든 생물이 죽어 응당 도달하게 되는 최후의 세계인 지옥을 지배하는 존재였다.
일개 플레이어가 어떤 발악을 해봤자 통용 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 자신은 일개 개인이 아니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운명을 등에 짊어졌기에.
이토록 허무하게 부정당해선 안 된다는 자각이 있었다.
“...우오오오오!!”
그리드가 기합을 내질렀다.
반사적인 반응이다.
자기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노력이자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발악이었다.
끼긱! 끼기긱!!
풀 버프야 진즉에 둘렀다.
소리를 질러대며 온 힘을 쥐어짰다.
하지만 바알의 마검을 떨쳐낼 순 없었다.
양손에 거머쥔 두 자루 검을 교차시켜서 밀쳐내 봤지만 바알의 마검은 허공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도 안 했다.
조금씩, 서서히.
그리드의 가슴으로 파고들어왔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470 감소합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399 감소합니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내구력이...]
까가가가강...
그리드의 가슴에서 불똥이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끝내 마검에게 베이고 젖혀지기 시작한 갑옷이 쏟아내는 눈물이었다.
브레스의 폭발 여파로 발생했던 매캐한 연기가 걷혀가고 있었다.
곧 바알의 멀쩡한 얼굴이 드러났다.
“...”
여전히 반개해 있는 눈.
내려앉은 눈꺼풀로 3개의 작은 눈동자를 가리고 인간처럼 단 하나의 눈동자만 드러낸 놈이 그리드를 빤히 응시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오직 그리드 한 명만을 담았다.
그리드가 전율했다.
지옥의 지배자가 온전히 나만을 의식하고 있단 사실에.
이토록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충만감을 느꼈다.
‘나를, 의식하고 있어.’
그리드는 바알의 습성을 떠올렸다.
놈은 자극을 원한다.
자신을 위협하는 수준의 자극일수록 더욱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놈이 그리드의 앞길을 몇 번이나 막아서고 있었다.
마치 저 용 위에 올라타지 말라는 듯이.
뜻하는 바가 컸다.
[49,5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독’과 ‘출혈’ 상태가 됩니다.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며 약점을 쉽게 노출합니다.]
급기야 갑옷을 활짝 열어젖힌 마검이 그리드의 가슴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지점이었다.
그나마 초월자의 피부 덕분에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고개를 뒤로 최대한 젖혔다.
진즉 부러진 뼈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허리를 90도 이상 꺾었다.
끼기기긱!!
바알은 집요했다.
놈의 마검은 그리드가 가슴 위로 교차시킨 두 자루 검을 여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드의 살을 더욱 파고 들어왔다.
그리드는 함부로 회(回)를 쓰지 않았다.
바알이 구사하는 기술들의 수준과, 기술을 습득하게 된 배경, 그리고 파그마의 영혼이 현재 바알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이놈도 회를 쓸 수 있을 거야.’
반격 스킬에 반응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날카로운 카운터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반격에 반격이라고?
그건 진짜로 반응하기 어렵다.
반격에 반격을 해낸 당사자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궤도로 공격이 휠뿐만 아니라 무지막지한 가속력이 붙었다.
시스템적 판정이다.
반격기가 괜히 귀한 게 아니다.
게다가 현재 그리드는 상태이상 혼란을 겪고 있다.
몸을 왼쪽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조차 모조리 반대로 인지됐다.
보통 사람이 혼란에 걸리면 걷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이 상태로 회를 회로 반격당해 버리면... 초월의 격이나 인공 감각이 무색하게도 치명상을 입으리란 확신이 그리드에겐 있었다.
“오기를 부리는군.”
순수한 힘으로 떨쳐내야 한다.
그런 판단으로 버텨보다가 결국 기이한 각도까지 허리가 꺾이고 만 그리드에게 바알이 조소를 보냈다.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닐 텐데 말이지. 조금 더 확실하게 발악해 봐라.”
촤르르륵!!
그리드라고 해서 무식하게 힘싸움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갓 핸드를 운용했고 마법도 썼다.
하지만 갓 핸드는 바알에게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바알이 전신에 둘러치고 있는 새카만 마기가 마검처럼 유형화 되어서 갓 핸드를 떨쳐냈다.
마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멸했다.
바알이 두른 마기는 비교적 격이 낮은 개념들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그리드의 능력치를 30퍼센트 구현할 뿐인 갓 핸드와 중하급 수준에 불과한 마법의 격으론 바알에게 해를 끼치는 게 불가능했다.
[칫.]
흑발 장발의 미남자가 둘 사이에 난입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번헬리어였다.
드래곤의 거체, 혹은 브레스로 바알을 공격했다간 자칫 그리드까지 위험에 휩쓸릴 수가 있어서 신체의 크기를 축소한 것이다.
바알이 강제시킨 흐름이었다.
그리드와 가까이 겹쳐있는 놈의 행동 자체가 번헬리어를 여러모로 제약했다.
“진심으로 협력할 셈인가?”
그리드의 복부를 발로 차 떨쳐낸 바알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놈의 이동이 남긴 잔상을 스친 번헬리어의 손날이 찰나지간에 드래곤의 앞발로 변했다.
어느새 멀리 떨어진 바알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꽈아아아앙!!
무지막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슴팍으로 파고든 번헬리어의 앞발을 바알의 마검이 막아낸 순간 발생한 폭발에 의해서다.
폭심지 주변의 산소가 모조리 연소됐다.
폭발의 압력에 짓눌린 공기가 연쇄적인 충격파를 일으키며 주변부로 밀려났는데, 그리드조차도 그 여파를 감당하기 위해 갓 핸드로 장벽을 세워야만 했다.
높이 치솟았던 화구가 사그라지며 일대가 진공 상태에 돌입했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몰려든 주변의 공기가 기류를 일으켜 버섯구름을 생성했다.
‘이런, 미친...’
멈췄던 호흡을 토해내는 그리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순수한 힘과 힘, 마력과 마력의 격돌.
고작 그것만으로 핵폭발과 같은 현상을 일으킨다고?
파그마와 알렉스의 영혼에게 영원히 작별 인사를 고해야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드에게 번헬리어가 외쳤다.
[피해라!]
여섯 개의 발톱 끝마다 새카만 마력 구체를 위시했던 번헬리어다.
그 구체들이 바알의 마검과 충돌한 순간 폭발을 일으키고 버섯구름을 생성했다.
한데 정작 큰 피해를 입은 건 번헬리어였다.
구름을 꿰뚫고 나타난 바알은 미간 사이로 한 줄기 핏물을 흘릴 뿐인 반면 번헬리어는 앞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바알의 힘과 마력은 그리드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명백히 번헬리어를 초월하고 있었다.
물론 번헬리어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했다.
번헬리어는 상성상 바알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네바르탄에게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보다 나은 게 사실이다.
갑옷을 채 완전히 수리하지 못한 그리드가 다음 바알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상에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수백수천 만의 사람들이 신음하거나 비명을 질렀다.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축제라도 벌이겠군.’
중국, 베이징.
뉴스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하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에게 절대적인 호의를 보내는 다른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중국만큼은 여전히 그리드에게 적대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리드 때문에 중국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피해의식을 지닌 탓이다.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를 만날 때마다 메달을 빼앗겼었기 때문에?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중국은 상당수의 인민들이 오크로 종족을 바꿨다가 그리드의 백성이 된 사건을 치욕으로 여겼다.
게다가 외교적인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실 손해라는 표현도 웃겼다.
한국의 주권을 강제로 훼손시키려다가 실패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아무튼 공산당은 그리드에게 썩 호의적이지가 않았다.
한국이 그리드 보유국이라고 불리며 국제 사회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계속 그랬다.
인민들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베이징 도심 곳곳에선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곧 죽게 생긴 그리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주 즐거워했을 테지.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
의외로 거리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드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응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태극권의 힘이다.
언젠가부터 다짜고짜 중국무술을 익히고 그 위대함을 설파한 그리드는 중국 안티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그랬군... 그리드 너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태극권을 적극 활용해온 건가.”
전 인류의 화합을 위해서?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것이냐, 그리드...
“과연 대단한 사내다. 존경할 수밖에 없어.”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리드를 응원하는 그때.
꽈아아앙!!
“...!”
바알의 눈은 재차 반개하고 있었다.
두 자루 드래곤 웨폰과 충돌한 그의 마검은 종전과 달리 그리드를 억누르지 못했다.
평범하게 튕겨 나왔다.
“번헬리어어!!”
발악적으로 바알을 돌파한 그리드가 소리쳤다.
그의 입엔 막대 사탕이 물려 있었다.
계정당 단 5회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명예상점 최고의 히트 상품.
바로 <달콤한 사탕>이었다.
5분 동안 모든 능력치를 30퍼센트 올려준다.
번헬리어가 호응했다.
순식간의 드래곤의 모습을 되찾고 그리드를 향해 날아갔다.
퍼어엉!!
바알이 쏘는 마법의 세례가 그리드의 등짝을 수십 회 강타했다.
안 그래도 넝마였던 갑옷이 완전히 벗겨졌다.
파괴된 것은 아니다.
그리드가 도중에 자신의 의지로 벗었다.
성스러운 빛의 갑옷으로 스왑해 마법에 입는 피해를 최소화했다.
대가는 혹독하게 치렀다.
마법을 쏘는 시점부터 접근해왔던 바알의 검에 베이고 수십 만 단위의 생명력을 손실했다.
꽈앙!!
그리드가 뒤로 뻗은 손에서 브레스를 뿜었다.
미약한 브레스는 이번에도 역시 바알에게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지만, 그리드에게 추진력을 선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번헬리어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줬다.
바알은 집요했다.
그리드보다 한 발 빨리 이동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예측했다.
약소 브레스를 뒤로 날린 시점부터 그리드는 이미 위(爲)의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템빨신의 희생을 그리는 검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꿈과 바람을, 운명을 짊어진 상처 입은 신의 비장한 각오가 바알마저 잠시 위축시켰다.
“...!”
고작 0.2초에 불과했다.
바알은 아주 잠시 주춤했을 뿐이다.
하지만 0.1초조차 수십 개 단위로 쪼개는 절대자들 사이에선 하염없이 긴 시간이었다.
[악룡 번헬리어에 탑승하였습니다.]
[세계에 유일한 칭호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3배 상승하고 격이 상승...]
[...!]
[...!!]
[...!!!]
[...탑승 대상이 고룡입니다!]
[당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모든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광신광룡.”
신과 손을 잡는 악룡, 악룡과 손을 잡는 신이라니.
나만큼 미친놈들이 여기 둘이나 있었군.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바알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번헬리어를 타고 질주해온 그리드의 검에 베인 것이다.
지구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