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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5화 (1,603/1,794)

템빨 80권 - 3화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가장 깊은 곳.

템빨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곳엔 놀도 감히 엿볼 수 없는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심연의 중심부에 피어올라 있는 주황색 연꽃.

그것은 꺼지지 않는 횃불들이 밝히는 성이었다.

기하학적인 외관이 얼핏 꽃처럼 보여서, 그를 둘러싼 성벽들이 위압감을 전달함과 동시에 아름답다는 감상을 느끼게 만들었다.

“마리로즈!!”

꽈아앙!

수백 년 동안 외세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았던 성의 천장이 무너졌다.

고함치며 난입한 브라함의 마력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네놈,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책임을 회피해온 거냐?”

지옥 원정을 떠났던 브라함은 레라지에를 만나고 말았다.

패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제10위 대악마.

스스로 고백하고 증명하길 베리아체의 심복이었던 그녀는 베리아체의 후계자가 지옥을 방문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천지 적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지옥에 든든한 우군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마리로즈가 몰랐을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마리로즈가 악룡의 발을 묶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치 챘다.

저 빌어먹을 놈은 나와 달리 어머니의 ‘기억’을 계승했다.

지공인 내가 모르는 지식들, 대체적으로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들을 알고 있단 말이다.

레라지에의 존재도 뻔히 알았을 터였다.

한데 어째서 지지부진하게 복수를 미뤄왔단 말인가?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너는 진즉부터 스스로 저주를 풀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혈왕’이란 어머니께서 마리로즈를 위해 안배해놓은 역할이다.

마리로즈의 신랑이 되어 그녀에게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할 존재.

그리드가 혈왕이 됐던 날.

마리로즈는 힘으로 그를 굴복시키고 강제로 범하여 자신의 위계를 높일 수 있었다.

어머니를 명백히 초월하고 나태의 저주를 떨쳐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치 제 책임을 외면하듯이.

“무슨 꿍꿍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복수를 미뤄왔지?”

“...”

순백의 관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마리로즈가 브라함을 빤히 바라보았다.

경멸 깃든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브라함의 모습이 그녀에겐 몹시 익숙했다.

늘 저래왔으니까.

“설마 책임을 회피 할 속셈이라면 아서라.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네놈에겐 어머니의 염원을 이룰 의무가 있다.”

가슴에 비수가 박힌다.

말뚝이 심장에 박혔을 때완 다른 형태의 고통이다.

훨씬 더 아팠다. 회복 될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마리로즈는 내색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듯이 여유롭게 웃으며 브라함에게 같은 눈빛을 돌려줄 뿐이다.

의무조차 짊어지지 못한 네가 어찌 나를 경멸하느냐...

차마 그런 식으로 맞받아치진 못했다.

마음의 상처라는 게 얼마나 아픈지 체험하고도 같은 상처를 돌려주기엔, 그녀의 감정이 한없이 인간에 가까워졌다. 실시간으로 말랑해지고 있었다.

최근에야 자각한 사실이다.

“그리드를 강제로 범했다면, 영영 사랑 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뭐...? 사랑?”

브라함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 경기마저 일으켰다.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네놈이... 절대적인 힘과 지식을 손아귀에 넣고 태어난 네놈이 한낱 감정을 논한다고? 괴물 새끼가. 아무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이 고독해야 할 네놈이, 무슨 염치로?”

“너는 충분히 만끽해온 감정이잖니. 나라고 해서 사랑을 갈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단다.”

브라함은 제자들과, 파그마와, 그리고 그리드와 깊은 교감을 나눠왔다. 설령 뒤틀린 형태였을지언정 그들에게 품어온 감정이 소중했던 것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감히 나와 같은 것을 누리겠다고?”

브라함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네게 고작 사랑 따위나 나누라고 어머니께서 너를 낳아주신 줄 아나? 어머니께서 제 목숨까지 바쳐서 너를 낳으신 이유는...!!”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

마리로즈는 어머니가 희생하길 바랐던 적이 없다. 그녀의 책임을 짊어지고 싶었던 적도 없다.

차마 거기까진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전달됐다.

브라함은 잠시 넋이 나갔다.

여태껏 누구 앞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멍한 표정으로 마리로즈를 바라봤다.

설마 저딴 개소리를 지껄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기에 할 말을 잃었다.

마리로즈의 희고 기다란 다리가 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몸짓조차 관능적이라 타인의 시선을 강제로 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나를 비난해봤자 늦었어.”

브라함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늦었다? 무슨 말이지?”

“낭군이 너무 강해졌잖니. 지금의 그를 강제로 범하는 건 나로서도 불가능해.”

“웃기지 마라.”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초월의 격이 극한에 이른다 해도 절대자를 감당하지 못한단 사실을 뻔히 안다. 신격조차도 절대자의 권능으로 비기지 않나? 그리드가 드래곤에 탑승하지 않는 이상 너를 감당할 재간이 없는데 어디서 헛소리냐?”

사랑에 눈이 멀어 헛된 핑계마저 대는구나.

추악한 놈...

브라함이 분노를 표출하는 와중에 마리로즈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낭군과 섞여 봐서 알아.”

마리로즈는 그리드의 피를 취했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달콤했던 피... 생명...

그것은 그녀가 탄생 후 처음으로 느껴본 쾌락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황홀했다.

그때부터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마리로즈가 그리드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낭군의 위계는 나와 거의 비슷해졌어.”

“자꾸 헛소리를...”

마리로즈를 죽일 듯 노려보던 브라함이 흠칫 놀랐다.

그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 중 하나인 그리드의 신격이 급격히 강화 된 것을 느낀 탓이다.

템빨신의 사도로서 지닌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뭣...”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던 브라함이 이내 깨달았다.

그리드가 황룡이라는 새로운 신화의 주인이 되었음을.

덩달아 초월의 격이 궁극에 도달해서 절대자의 자격을 손에 넣기 직전임을.

드래곤에 의존해서 얻는 일시적인 자격 따위와는 근본부터 달랐다.

“앞으로 낭군은 온갖 괴력난신과 조우하게 될 거야.”

“...”

“어머니의 복수보다 낭군의 안위를 보살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

과연 브라함은 침묵했다.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은 마리로즈가 조소했다.

“아니면 네가 내 저주를 풀어보던가.”

얼마 전까진 가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악룡과 싸우면서 권능을 사용했던 마리로즈는 그 부작용으로 더 큰 저주에 시달리게 됐다.

애초에 나태의 저주라는 건 베리아체를 억제하는 구조를 지녔다. 마리로즈가 베리아체로부터 계승한 힘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저주 또한 강해졌다.

“입만 산 남자. 꺼지렴.”

마리로즈가 축객령을 내렸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성을 떠나는 브라함의 마음이 복잡했다.

이미 죽은 어머니보다 살아있는 그리드를 우선시하게 되는 자신을, 그는 이해하면서도 증오했다. 커다란 죄책감에 짓눌렸다.

하지만 매몰되진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그리드가 가장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

[<황룡>의 신화가 템빨계에 격변을 일으킵니다.]

[사방신이 수호하는 지역들이 템빨계에 편입되려 합니다.]

[신화의 혼합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재 편입 진행률 0.1퍼센트...]

[환국의 신들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주의가 필요합니다.]

[<황룡>의 신화가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합니다.]

[사방신의 이상이 담긴 힘입니다.]

[신규 스킬 <황룡의 숨결>을 습득하였습니다.]

<황룡의 숨결>Lv.1

패시브

사용하는 스킬이 용(드래곤)과 관련 될 경우 스킬 연출 효과와 위력 강화.

주작의 힘, 현무의 힘, 청룡의 힘, 백호의 힘 활성화 가능.

사방신의 힘 활성화 시 해당 사방신의 스킬을 전부 개방.

★레벨이 오를 때마다 추가 기능이 생성됩니다.

“어...?”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황룡의 형상으로 변한 신성에 다소 부담감을 느끼던 그리드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귀신에 홀린 심정으로 시험 삼아 청룡의 힘을 활성화시켜보았다.

파지직!

황룡의 형상을 이루고 있던 신성 중 일부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말 그대로 황색의 번개가 그리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동시에 여러 개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번개의 화신>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뇌신>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전광> 스킬이 개방됩니다.]

[<내리쳐라!> 스킬이 개방 됩니다.]

‘이런 미친.’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에 깃든 스킬들.

즉 <강화 된 청룡의 숨결>을 써서 만든 아이템을 착용해야 활성화 됐던 청룡의 스킬들이 개방됐다.

심지어 조건부 활성화 스킬인 <뇌신>이 <번개의 화신>처럼 패시브 스킬로 바로 적용됐다.

전율을 금치 못한 그리드가 다음으로 주작의 힘을 활성화시켰다.

화르륵!

번개의 형상을 이뤘던 신성이 불꽃으로 번진다.

[<불의 화신>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주작의 숨결>효과가 활성화 됩니다.]

[<생명의 불꽃> 스킬이 개방됩니다.]

[<날아오르라!> 스킬이 개방됩니다.]

그리드는 이어서 백호의 힘과 현무의 힘도 사용해 봤다.

완벽했다.

비록 2개 이상의 힘을 중첩시킬 순 없었지만 <황룡의 숨결>의 레벨이 오르면 해결 될 문제 같았다.

‘설령 중첩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쉬워 할 필요가 없어.’

재사용 대기 시간이 없으니까.

내리쳐라, 날아오르라 등의 액티브 스킬을 제외한 패시브 스킬들은 아무런 제약이나 딜레이 없이 원하는 순간마다 스위치해서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템을 중첩 착용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방신의 이름이 붙은 견갑과 각반, 부츠와 장갑 등을 드래곤 아머 위로 덧씌운 느낌이랄까.

황룡의 효과라는 건 그만큼 무지막지했다.

다만 정말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효과만큼이나 화려한 연출 효과에 있었다.

안 그래도 몸에 두르고 다녔던 주황색 신성이 때때로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용의 형상을 이루는 지경에 이르다니...

심호흡한 그리드가 사당 마당에 있는 우물로 걸음을 옮겼다.

수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지름 3미터의 원형을 이룬 신성과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황룡의 형상이 등 뒤에 펼쳐져 있다.

아무리 봐도 필요 이상으로 멋졌다...

너무 화려한 나머지 날파리가 크게 꼬일 것만 같았다.

예를 들어서 라우엘이라던가 라우엘이라던가.

‘아주 어쩌면 크라우젤도...’

크라우젤이 즐겨 입는 묵색 도포의 등엔 늘 황색용의 자수가 수 놓여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리드의 새로운 신성은 크라우젤의 취향일 확률이 높았다.

‘엄청나게 부러워하면 민망해서 어쩌지?’

괜스레 미안함을 느끼던 그리드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재단 기술을 습득한 이유는 혹시 이날을 위해서가 아닐까.

크라우젤에게 내 신성만큼이나 멋진 새로운 황룡 도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

극진한 마음으로 벗을 생각하던 그리드의 시선이 불쑥 하늘로 향했다.

무너진 사당의 천장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에 곡선과 직선을 이루는 흰색 구름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자연히 형성 된 구름이라기엔 너무나도 인공적인.

오랜 세월 동안 활빈당 본거지의 위치를 감춰온 진법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향해서 그리드가 입을 벌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금빛에 가까운 브레스가 쏘아졌다.

숫제 신성을 방출하는 느낌.

<크란벨의 머리>에 귀속 된 인공 브레스가 종전과 달리 개세적인 위력을 품고 하늘을 꿰뚫었다.

동시에 희미한 침음이 들려왔다.

이젠 그리드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삼사의 목소리였다.

황룡 신화의 등장 여파가 활빈당의 진법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다.

환국의 신들이 현장을 습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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