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0권 - 8화
[특수 스탯 <신위>가 개방됩니다.]
천사 대군을 패퇴시킨 유페미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업적을 세운 그녀가 분명한 변화를 맞이했다.
정확히는 진화.
카일과 마법사들의 숭배가 <무무드의 후계자>라는 성장형 클래스와 맞물린 점이 직접적인 원인이리라.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당연히 선악과였다.
선악과를 복용하지 못했다면 새로운 마법들을 조합하지 못했고, 천사들과의 싸움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카일과 마법사들에게 숭배 받지도 못했을 테니까.
결국 선악과를 재배한 피아로에게 입은 은혜라고 해석해야 옳은 것이다.
“정말로 고마워요!”
유페미나의 성격은 상당히 밝은 편이다.
원래부터 자신감이 충만했던 그녀의 긍정 에너지는 템빨단에 가입한 이후 꾸준히 커졌다.
든든한 대장과 동료들 덕분에 사소한 근심걱정 따위가 사라졌기에.
게다가 지금은 기분도 최고여서 아주 활짝 웃었다. 피아로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했다. 아버지의 품에 뛰어드는 소녀 같았다.
그쯤 되자 마법사들도 눈치 챘다.
유페미나가 소문보다 위대한 마법사였던 이유.
선악과의 도움이 컸던 덕분임을.
사고의 흐름은 자연히 선악과의 출처로까지 이어졌다.
농부 피아로.
마법사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전보다 커다란 경외심이 차올랐다.
가히 마법의 신과도 같았던 유페미나의 탄생 배경에서 피아로가 차지하는 지분을 떠올려 보자 피아로가 템빨신 다음으로 위대한 존재로 인식 된 것이다.
전능한 마법을 탄생시키는 양분을 재배한 농부.
그는 모든 마법사의 희망이었다.
어쩌면 마법사를 돕기 위해 탄생한, 인간의 형상을 한 세계수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허허.”
유페미나의 계속되는 감사와 애정표현에 조금 머쓱해하던 피아로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고귀해졌음을 자각하면서다.
무무드의 후계자로 전직하고 수 년이 지나서야 신위 스탯을 개방하는데 성공한 유페미나.
그녀의 성장에 지대한 공로를 행사한 인물이 다름 아닌 피아로라는 건 누구보다 시스템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피아로 또한 마법사들의 숭배와 업적의 영향으로 아직은 미약한 신격을 얻었다.
칭호 <신화를 엿보는 자>를 얻고 신위 스탯을 개방했다.
가장 그리드와 닮았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신화 찬탈자의 행보를 걷고 있는 브라함, 성장형 클래스의 도움을 받아 신화의 편린을 엿본 유페미나와 달리 피아로는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신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마치 그 옛날 그리드처럼 말이다.
“이래서야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겠군.”
급기야 활짝 웃은 피아로가 유페미나의 작은 몸을 들어 어깨에 앉혔다.
선악과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자신까지 숭배 받도록 만들어준 은인 아닌가.
신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유페미나가 피아로는 몹시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큰 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
지금쯤 라인하르트에서 잘 지내고 있을 딸아이와 의자매의 인연을 맺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녀 같은 외모와 달리 유페미나는 성인이 된지 오래다.
피아로의 딸과 자매의 연을 맺을 항렬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대모로 삼아야 옳았다.
***
[환국의 신들을 격퇴하였습니다.]
[삼사의 격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레벨이 27개 올랐습니다.]
[신화를 초월 할 병기 <황혼>이 삼사의 신격 일부를 흡수하였습니다.]
[신격 흡수 여파로 <황혼>의 강화 수치가 +1이 됩니다. 이 강화 수치는 황혼의 등급이 상승해도 초기화되지 않습니다.]
[신격 흡수 여파로 <황혼>에 자아가 깃듭니다. 아직은 희미해서 의식이 없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자아와는 차원이 다른 격을 지녔습니다. 자아가 깨어나는 날, 당신은 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신격 흡수 여파로 <황혼>에 특수한 기능이 개방 될 낌새를 보입니다. 특수 기능은 당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형태일 것이며 더 많은 신격을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방신 ‘청룡’과 ‘백호’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파국과 가야의 백성들이 진실 된 신화를 되찾고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템빨계와 동대륙의 현재 융합률은 10퍼센트입니다...]
‘신격을 흡수해?’
삼사를 물리친 후.
그리드 일행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파국의 수습은 황길동과 활빈당에게 맡긴 뒤 오작교를 타고 가야로 돌아갔다.
가야에 모습을 드러낸 청룡은 가야의 백성들에게도 잊힌 신화를 일깨워주었다.
덕분에 종합 보상이 집계되었고 황혼이 성장했다.
저절로 강화가 됐을 뿐만 아니라 자아가 싹텄다.
심지어 에고 소드 제작이나 자아 부여로는 얻기 힘든 격을 지닌 자아였다.
당연히 신급 자아일 것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밥 먹듯이 해주는 자아가 아닐까 싶었다.
‘머잖아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친구를 얻게 되겠구나.’
노에, 템빨콘, 템빨골들처럼 나사가 하나씩 빠져있는 친구가 아닌...
‘랜디는 너무 순수해서 친구보단 딸 같은 느낌이고.’
그리드가 감격하고 있을 때였다.
“볼수록 아름다운 검이군요.”
한층 더 강한 신성을 품게 된 황혼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르가 말했다. 그의 곁에 선 예음은 대놓고 넋을 잃은 채 황혼에 매료되어 있었다.
침을 질질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
양반의 외모가 기본적으로 몹시 뛰어난 점을 고려하면, 절세의 미인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셈이다.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라 그리드는 웃고 말았다.
“갖고 싶어?”
본래 그리드는 미르에게 존대와 반말을 섞어서 사용했었다.
하지만 미르가 가짜라고 오해했던 시점부턴 자연히 존대를 멈췄다.
죽여 버릴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쳐놓고 뒤늦게 다시 태도를 고치는 게 민망해서... 등의 하찮은 이유가 아니다.
미르가 좋아했다.
위계를 고려하면 이게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가당치도 않습니다.”
미르가 손사래 쳤다. 과장되지 않고 절도가 있어서 경박하지 않다.
“제가 어찌 당신의 물건을 탐내겠습니까? 게다가 제겐 다룰 능력조차 없습니다.”
“아...”
예음이 탄식했다.
그냥 달라고 하지.
그런 느낌의 탄식이었다.
저 친구는 볼수록 푼수 기질이 있네.
첫인상과 많이 다른 예음 때문에 재차 피식거린 그리드가 본격적인 매수에 나섰다.
“아니야. 당신에겐 내가 만든 검을 쓸 자격이 차고도 넘쳐.”
“과찬이십니다.”
미르가 시선을 내렸다. 깊은 눈동자에 근심이 스쳤다.
지금 그는 겸양하는 게 아니다.
템빨신의 신성을 품은 검.
말 그대로 신검인 저것을 다룰 역량이 미르에겐 없었다.
막말로 템빨신 외에 그 누가 저 검을 감당하겠는가.
템빨신의 신뢰가 부담스럽게 다가올 정도였다.
“자격은.”
귓전에 그리드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한 순간도 어김없이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미르의 심상에 쭉 뻗은 거목을 세웠다.
“내가 주는 거다.”
“...?”
“미르, 내 사도가 돼라.”
“무슨...”
미르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자신은 양반이다.
오직 환국의 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미르 본인의 장대한 꿈과는 별개로 도구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신들의 입맛대로 기억을 소거당하지 않았나.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템빨신의 사도가 된다고?
민폐다.
단 7개뿐인 자리를 태생부터 불순한 나 따위가 어찌 감히 차지한단 말인가.
“신이 되고 싶다는 당신의 바람을 방해하지 않을게.”
당황해서 말문을 닫고 있는 미르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갔다.
하나의 갓 핸드가 그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미르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리드의 눈동자에 붙들려 고정됐다.
매혹되어간다.
“사도도 신이 될 수 있어.”
단언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라 있었다.
[당신의 사도 ‘피아로’가 아직은 희미한 신격을 품었습니다.]
[당신의 기사 ‘유페미나’가 아직은 희미한 신격을 품었습니다.]
신의 사도라는 지위는, 끝이 아니다.
사도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 브라함이 증명했다.
신의 사도 또한 신이 될 수 있음을.
그리드는 그들을 품기 위해서라도 더 높은 신이 될 의무가 있었고, 반드시 그리 될 각오였다.
그러므로 망설임 없이 미르에게 제안했다.
“부디 나와 함께하자, 미르. 내가 여태껏 마지막 사도의 자리를 남겨놨던 이유는 순전히 당신을 위해서였어.”
거짓말은 아니다.
미르는 그리드가 바랐던 마지막 사도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초월자.
미르 외의 존재에게 마지막 사도 자리를 맡기는 건... 이제 와선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미르...”
예음의 가녀린 손이 미르의 옷깃을 붙잡았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형제이자 본받아온 스승이 멀리 떠나갈까 두려워서 붙잡는 게 아니다.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네가 이해 받고 존중 받길 바라.”
미르는 양반 중에서 유일하게 선민의식이 없었다.
생명을 지닌 지상의 모든 존재를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하고 아껴주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인간들에게조차도.
인간들은 미르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이하게 여기며 기피했었다.
예음 또한 때로는 미르를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미르에게 바라는 건 미르가 축적해온 기술을 사사하는 것.
미르의 성격이야 어쨌든 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니게 됐다.
늘 홀로 고독했던 미르를, 그녀는 언젠가부터 동정하게 되었다.
이해와 별개의 연민이었다.
최근에 기억을 소거 당하고 텅 빈 인형처럼 변해버린 그를 봤을 때 그녀의 연민은 극한에 도달했다.
그녀는 미르가 그만 행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물론 신들을 향한 반발심일 수도 있다.
형제들을 화살받이로 삼았던 조금 전 삼사들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
두근!
미르가 잃었던 기억을 되찾았다.
정확히는 기억의 일부다.
선망해온 치우를 만났을 때의 감동, 뮐러를 만나 영감을 얻었을 때의 흥분.
머리보단 심장에 각인 된 기억들이었다.
그리드로 인해 뛰기 시작한 심장이 상기시켰다.
“...부디.”
펄럭!
청색의 도포가 나부낀다.
위로 한껏 솟구쳤다가, 미르의 무릎과 함께 흙바닥에 내려앉았다.
“기회를 주십시오.”
예를 다해 절하는 미르.
“내가 할 말이다.”
그를 그리드가 일으켜주었다.
이번엔 갓핸드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지막 사도를 영입하였습니다.]
[일곱 사도가 당신을 보다 완전하게 만듭니다.]
[일곱 사도가 특별하고 유능한 존재일수록 당신의 가치 또한 상승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면면을 분석합니다...]
[...!]
[...!!!]
[...하아.]
“...?”
하아?
무슨 의미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뺨을 꼬집었다.
봐선 안 될 낱말을 봤다는 사실을 눈치 챈 까닭이다.
안 그래도 미르를 섭외해서 날아갈 듯 기쁜 와중에 시스템이 맛탱이가 가버리자 꿈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