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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13화 (1,611/1,794)

템빨 80권 - 11화

“음...? 이것 참... 주책이 심했군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노검마가 목례했다.

그리드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주책이라뇨. 가당찮은 말씀이십니다.”

“크흠...”

한울의 괘씸한 퀘스트를 보고 흥분해서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사실 웃기는 핑계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노검마가 그리드에게 퀘스트 정보를 공유했다. 민망하다는 듯이 콧잔등을 긁으면서.

내용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눈빛은 차분했다.

무려 태초신의 저격을 당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반응. 이보다 더한 일을 겪었어도 침착했을 기세다.

“...”

노검마가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템빨신.

그의 외견은 독보적으로 화려하다.

물결치는 노을빛 신성.

이젠 심지어 황룡의 형상마저 이루는 그것을 상시 몸에 둘렀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존재감 자체가 타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수 킬로미터 바깥에 있어도 느껴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노검마는 정말로 신을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다.

바로 곁에 있는 그리드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건...

‘은신 스킬을 보유한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굳이 여기서 은신을 하고 있을 이유는 없지... 어떤 패시브 스킬인 듯한데...’

뭐가 됐든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충격이다.

노검마는 최강의 비공식 랭커 중 한 명이기에.

하물며 그는 황길동과 활약하며 전설이 될 만한 업적을 몇 번이나 써왔다.

최근 전설의 실마리를 잡았다.

잠행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검술로 승부를 보는 암살자.

조만간 새로운 히든 클래스를 개척하게 될 입장이었다.

‘한데 도대체... 수준 차이가 얼마나 크기에...’

템빨신이 된 이후.

그리드의 랭킹 정보는 보통의 플레이어와 다르게 표기됐다.

레벨 등의 상세정보가 뜨질 않고 단순히 ‘신’이라는 하나의 글자가 그를 신비롭게 가꿨다.

하여 그리드와의 격차를 막연히 계산해온 노검마는 이 순간 깨닫는다.

계산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삼사를 홀로 압도했을 정도이니 당연하긴 하다만...’

한때 사람들은 그리드의 성공을 행운의 영역으로 보았다.

노력과 재능을 폄하했단 의미는 아니다.

그리드가 남들보다 더 나은 재능을 타고났고 더 많은 노력을 해왔을 거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지했다.

하지만 세상에 천재가 어디 한둘인가.

피땀 흘려가며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

당장 노검마만 해도 그랬다.

한데 그리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인 성장력을 자랑해왔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연히 행운이라는 개념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검마는 진실을 알게 됐다.

자신에게 수백수천 번의 행운이 연속해서 따라줘도 그리드처럼 되는 건 불가능함을.

‘노력, 재능, 행운을 넘어서는 무언가...’

역사 속 위인들을 설명할 때면 종종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

노검마는 알 것 같았다.

신은 실존하는 게 아닐까.

그리드에게 이 시대를 대표하라고 뒤에서 후원해주는 게 아닐까...

노검마의 사색이 깊어지는 그때.

‘한울은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네.’

그리드는 상황 파악을 끝내고 있었다.

‘하지만 포인트를 잘못 짚었어.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선전은 내게 먹히지 않아.’

인계는 내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별 거 없군.

조소한 그리드가 새로운 기능에 집중했다.

네임드 부여.

조금 전 상세 정보가 갱신되며 스킬의 명칭까지 바뀌었다.

<신의 후원>

템빨계 주신의 권한으로 NPC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신의 후원을 받는 대상은 네임드화 됩니다.

더 많은 후원을 할수록 더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후원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후원의 의미는 당신이 정합니다.

그리드가 여태껏 본 스킬 중에서 가장 특이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액티브 스킬인데도 불구하고 사용에 어떤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 남발하는 게 가능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페널티가 없는 건 의외인데... 동시에 여러 명을 관리하는 게 힘들 거라고 보는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평범한 NPC에겐 성장 한계치가 존재한다.

올릴 수 있는 레벨과 스탯에 한도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사실은, 대부분의 NPC가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생을 마감한다는 점이다.

실제 인간과 같았다.

‘내가 당장 수천만 명의 인간을 네임드화 시킨다고 해서 그들 중 몇 명이나 네임드 효과를 누릴까.’

네임드화란 대상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사람만이 효과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레베카가 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군.’

그리드가 장담컨대 <신의 후원> 시스템은 본래부터 존재해왔다.

과거 그리드가 레베카 여신에게 신탁을 받았던 것도, 데미안이 여신의 대행자가 된 것도 일종의 후원을 받은 거라고 볼 수 있기에.

하지만 레베카 여신은 후원을 남발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인물은 플레이어와 NPC를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녀도 알고 있던 거다.

남발해봤자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거라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만약 레베카 여신의 축복을 개나소나 얻었다면... 당연히 레베카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도 흔들렸을 테니까.

‘대개 인간이란 흔한 것에 가치를 두지 않으니.’

피식.

그리드가 문득 실소했다.

돌이켜 보자 레베카의 후원이라는 게 참 별거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능력치를 소폭 상승시켜주는 축복.

그리고 신탁이라는 이름의 퀘스트.

물론 데미안이 얻었던 <여신의 대행자>는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발휘했지만, 그만큼 큰 책임도 따랐다.

말 그대로 여신을 대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레베카도 아무에게나 직책을 맡기진 못했을 것이다.

반면 그리드 자신은?

축복?

힘들다.

템빨신상에 가서 기도하거나 템빨제국, 혹은 템빨신교에 소속 된 사람들은 여러 버프를 얻었지만 여신의 축복과 비교해서 솔직히 위력이 낮았다.

그리드가 그럴 듯한 축복을 내리려면 대상의 곁에서 금의 성역 등을 전개하는 수밖에 없다.

퀘스트?

양질의 퀘스트를 꾸준히 생산할 자신이 없다.

그리드는 왕과 황제의 지위를 거치며 퀘스트를 수차례 만든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안다.

퀘스트 내용은 실제 정세와 맞물린다.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드가 의도적으로 퀘스트 내용을 창조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레베카 여신도 같았을 것이다.

여신이 내리는 신탁이 흔치 않았던 역사가 증명한다.

칭호나 직업 부여?

불가능하다.

자신의 대행자를 만드는 방법 같은 거, 그리드는 몰랐다.

아직은 권한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의 상황이 과거의 레베카보다 훨씬 더 낫다고 자부했다.

그야 당연하다.

그리드는 아이템을 뿌릴 수 있으니까.

얼마 전 천사가 된 칸이 대량의 성검을 뿌렸던 것처럼.

그렇다.

고작 성검 한 자루 만드는데 헥세타이아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레베카와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헥세타이아가 만든 성검은 선택 받은 용사만이 사용 가능했었지.’

반면 그리드는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병사들을 위해서, 템빨단원들을 위해서 아이템을 만들어왔다.

대상의 눈높이에 맞는 아이템을 제작함에 있어서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 한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가 강제로 의욕을 불어넣어주마...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보냈건만 쭉쭉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면 저절로 부지런해질 테지.

촤르르르륵!!

그리드의 좌우로 310개의 갓 핸드가 펼쳐졌다.

절반은 손에 망치를 쥐었고 나머지 절반은 휴대용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갓 핸드의 숫자를 늘린 뒤 그리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휴대용 용광로와 모루의 대량 생산이다.

‘간만에 제대로 놀아보자.’

그리드와 노검마, 그리고 미르와 예음뿐이던 광장이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신의 의지를 따라 온갖 도구를 단조하기 시작한 수백 개의 손.

두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지 않는 장관이 노검마와 양반들을 넋 나가게 만들었다.

잠시 후.

“템빨제국 소속의 광부 310명을 후원하겠다.”

순식간에 대량의 곡괭이를 생산한 그리드가 템빨계 주신의 자격으로 선언했다.

“후원 물품은 곡괭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게 생겼으니 광부들의 성장부터 촉진시킬 계획이다.

물론 뜻대로 안 될 공산이 컸다.

그리드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뿐이다.

네임드화 된 사람들이 한계를 초월한 뒤에도 쭉쭉 성장해서 도움이 될지는 그리드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단지 ‘씨앗’을 뿌리는 입장.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내하는 농부의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피아로가 농사에 매료 된 이유를 이참에 제대로 이해해 볼까.’

[대상을 지정하지 않아 무작위 대상을 선별하였습니다.]

[템빨제국 소속 광부 310명을 후원합니다.]

[‘후원 중인 목록’을 통해서 대상의 정보를 열람하거나 실시간 상태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진짜로 되네?’

불특정 다수는 안 된다.

한 번에 한 명의 대상만 지정해야 한다.

등등.

늘 그랬듯 태클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너무 수월하다.

그리드 본인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그리드가 이내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언젠가 ‘템빨제국 신민 전체를 후원하겠다.’고 선언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부터 두근두근해지는 것이다.

***

세상은 난리가 났다.

함께 일하고 있던 광부의 이름이 갑자기 번쩍번쩍 빛난다는 등의 목격담이 속출한 까닭이다.

혹시 광부의 신이 축복을 내린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런 말은 채 몇 시간도 안 돼서 쏙 들어갔다.

이름이 황금색으로 물든 광부들이 일제히 템빨신상이 있는 방향으로 절을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템빨신께 ‘열심히 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한 그들은 하나 같이 <성검>을 받았다며 감격하였는데, 성검치고 너무 곡괭이처럼 생겨서 논란이 됐다.

***

같은 시각.

“이건... 뭐죠?”

메르세데스는 본가의 지하에서 어떤 신상을 마주보고 있었다.

템빨신상이 아닌 낯선 신의 동상이었다.

“살육의 신 플루토. 우리 가문이 대대로 섬겨온 신입니다.”

베인츠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살업을 쌓아왔다.

시조 사하란 시절부터 황제의 살의를 실천하는 역할을 맡은 까닭이다.

플루토를 섬기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다만 플루토는 워낙 불길한 신이었기 때문에 세간에선 배척되었고 점차 잊혀져갔다.

당대에는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그래서일까.

플루토는 베인츠 가문에 몹시 호의적이었다.

그 호의를 이용하는 게 베인츠가 당주의 비기다.

강신.

플루토의 신격을 강림시켜 인간의 몸에 받아들인다.

쿠오오오!

딸과 단 둘뿐인 지하 공간에서.

메르세데스의 부친은 직접 비기를 시범했다.

자신의 몸에 살육의 신을 강림시켰다.

날렵하게 단련 된 근육이 새카맣게 물들어간다.

힘줄 하나하나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졌다.

자연히 죽음을 연상시키는 사신의 형상이다.

꽈앙!!

“...!?”

엄숙한 표정으로 있던 베인츠 가문의 당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르세데스의 주먹이 플루토의 신상을 부셔버렸으니까.

절묘하게 대가리를 날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광경.

이성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

뭐라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선 부친에게 메르세데스가 말했다.

“그거 당장 갖다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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