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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19화 (1,617/1,794)

템빨 80권 - 17화

“내가 그때 마침 소별왕의 신성을 이해했다. 한없이 무적에 가까우면서도 일말의 약점이 있더군. 깨달은 즉시 대단위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하고 심상세계를 개방하여 라그나로크의 발판을 마련했지.”

동대륙.

그리드 앞에 불쑥 찾아온 브라함이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눈치였는데 언뜻언뜻 떨리는 음성은 어쩌지 못한다.

신을.

심지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신 중 하나를 패퇴시킨 것이다.

환경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곤 하지만, 그리드와 하야테의 뒤를 이어서 세 번째로 큰 업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할까.

“특정 구역 전체를 뒤덮은 수백 종류의 마법이 무량대수로 늘어나는 광경은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을 지경이더군요.”

함께 찾아온 지크가 가끔씩 첨언해주었다.

말로 백번 들어봤자 위력이 상상 안 되는 라그나로크의 원리를 설명하는 브라함을 대신해서 그가 세운 대단한 업적을 그리드에게 실감시켜줬다.

“소별왕을...”

미르와 예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예음은 브라함을 귀신 보듯이 봤다.

과거 그에게 목숨을 잃었던 형제들의 면면을 떠올리면서다.

브라함은 이미 그때부터 괴물이었다. 고작 팔 하나를 내준 대가로 반신들의 목숨을 몇 개나 앗아갔으니.

하지만 설마 진정한 신을 격퇴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줄이야.

심지어 고작 몇 년 사이에.

‘...템빨신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옳은 거야.’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자.

템빨신을 논할 때면 반드시 뒤따르는 말이다.

천년만년 전부터 존재해온 초월자들을 채 100년도 살지 못한 인간의 몸으로 뒤쫓아 왔기에.

그의 사도들도 큰 영향을 받는 듯했다.

시간을 압축해버리듯이 고강해지는 모습을 보면.

‘무신의 자격...’

예음은 문득 어떤 미래를 떠올렸다.

유일신이 된 그리드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린 여덟 신.

미르를 포함한 일곱 사도와 예음 자신이 언젠간 템빨계의 주신으로 성장한 모습이다.

“기분 나쁜 상상은 관둬라.”

“히익.”

황홀경에 빠져있던 예음이 기겁하며 정신을 차렸다.

눈살을 찌푸린 브라함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템빨신을 적으로 마주했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고양이 앞에 쥐가 된 심정이랄까.

“실실 웃기는. 쯧.”

그녀에게 핀잔을 준 브라함이 이어서 미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곱 사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미르에게 과연 마지막 사도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리드의 목숨을 구해줬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사도들은 나날이 발전해왔다.

심지어 밥만 축내온 도마뱀새끼조차도 광신광룡을 재현해보였다.

무려 지옥과 아스가르드를 대적하는 그리드.

사도들이 그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선 꾸준히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도 멈춰선 안 됐다. 뼈를 깎는 노력,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바알이나 리파엘에게 대응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미르에게 그런 절박함이 있을까?

실제로 몇 달 전에 봤을 때와 비교해서 실력이 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도리어 하자가 생겼군.’

이런 덜떨어진 놈이 마지막 사도라고?

브라함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미르가 순전히 인맥을 이용해서 사도 자리를 꿰찼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용담을 늘어놓던 브라함이 이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그리드가 좌시하지 못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미르를 노려보는 그를 일단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르가 한 발 빨리 나섰다.

“양반 출신인 저를 신용하기 힘든 거겠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환국에 아무런 감정이 남아있지 않...”

“출신? 그딴 건 문제가 안 된다.”

브라함부터가 대악마의 자식이다.

그리고 일곱 사도 중에는 아스가르드에서 쫓겨난 천사가 있었고 광룡의 새끼가 있었다.

이제 와서 출신을 문제 삼으면 당당할 수 있는 사도가 몇 없을 정도였다.

“네게 그리드를 섬길 자격이 있나? 못 본 새 퇴보한 실력을 보면 마음가짐 자체가 썩어문드러진 놈 같은데.”

예음이 울컥했다. 미르가 겪은 일을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하는 브라함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미르의 일이니까.

오해를 푸는 것도 미르의 몫인 것이다.

결코 브라함이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꽤 많은 양반을 만나봤다. 대부분 타고난 힘에 의존하는 성격이더군. 흥청망청 세월을 낭비하는 족속들. 너도 놈들과 같은 게 아니냐.”

브라함이 격살한 양반만 두 자릿수에 근접한다.

양반이 어떤 존재인지 정의를 내리기에 충분한 경험이다.

과거 가람 한 명만 보고 양반을 평가했던 그리드와 비교하면 편견이 적은 편에 속했다.

‘가람 그놈은 참...’

생각할수록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더욱 훌륭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째서 그런 놈이 인성은 개차반이었던 건지 새삼 아쉽다.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상황을 지켜봤다.

“앞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미르가 경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핑계 따위로 삼기 싫다는 듯, 자신이 겪은 일을 굳이 설명하지도 않고 오직 앞날을 논했다.

온화하고, 현명하고, 당당한 기질을 동시에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리드는 흡족했다.

‘역시 미르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지.’

만약 미르의 성격이 다른 사도들과 비슷했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제멋대로 오해하고 비난하는 브라함의 태도에 발끈해서 즉시 칼을 뽑아들었을 테니까.

그리드는 사도들이 되도록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다.

그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할수록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게 될 거라고 믿었기에.

“핫... 음?”

별 같잖은 핑계를 댈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

미르가 입을 열자마자 콧방귀를 뀌던 브라함이 드물게 당황하며 침묵했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는데 차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다.

미르의 태도 때문이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브라함만 추해졌다.

‘여우같은 놈.’

브라함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느꼈다.

미르를 흡족하게 바라보는 그리드의 모습을 보면서다.

미르가 그리드의 신임을 얻으려고 논점을 흐리고 수작질을 부리는 거라고 이해했다.

당연하다.

세상 어느 초월자가 비난을 순순히 수긍하겠는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즉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위계인데.

다짜고짜 비난을 당하고도 경건히 받아들이는 미르의 태도는 충분히 낯설고 수상했다.

-그만 추해지시오.

지크의 전음이 들려왔다.

브라함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브라함이 심호흡했다.

미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미르는 웃고 있었다.

살짝 호선을 그리는 눈매가 파그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곤 하나 혈족은 혈족인 것이다.

‘낯짝부터가 영 재수가 없다.’

“사방신들은 지금 바쁜가? 브라함하고 지크가 온 김에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그리드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루에 1퍼센트씩 템빨계화 되고 있는 동대륙.

이 땅의 신들은 머잖아 템빨계 소속의 신이 될 것이다.

사도들과 미리 인사를 나눠서 나쁠 게 없었다.

하물며 소별왕이 패퇴한 직후 아닌가.

당분간 동대륙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조금쯤은 여유를 부려도 좋았다.

“신께서 곧 황룡이시지 않습니까. 신의 부름을 받는 즉시 사방신 전원이 집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르의 의견이었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브라함의 속마음도 모른 채 흐뭇하게 웃은 그리드가 황금색 숨결을 토했다.

“사방신은 내 부름에 응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말이었는데,

[부르셨습니까.]

[왔다.]

사방신 전원이 호출에 응했다.

생명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주작과 푸른 전광으로 이루어진 청룡.

죽음의 안무를 숨결로 토하는 거북뱀 현무와 대지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백호.

하나 같이 거대한 사방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브라함과 지크가 한 순간 움찔 놀랄 정도였다.

[오오...]

사방신들은 대놓고 감탄했다.

브라함과 지크가 소별왕을 패퇴시켰다는 소식을 이미 접한 눈치였다. 각기 다른 색을 지닌 네 쌍의 눈동자에 죄다 선망이 깃들었다.

[브라함과 지크... 그대들의 위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템빨신의 사도들답게 대단하더군. 앞으로 그대들과 같은 편에서 인간들을 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오.]

“나 또한 그대들의 합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행히 브라함은 사방신을 상대로는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다.

덕분에 잠시 경직됐던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제 불꽃으로 당신의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주작과 청룡이 브라함의 마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불꽃 그 자체인 주작과 전광 그 자체인 청룡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체질을 토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흥미롭군...”

브라함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

주작과 청룡을 구성하고 있는 기운을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원소 마법이 탄생하지 않을까...

누구보다 높은 학구열을 지닌 지공이 새로운 도전정신을 품는 그때.

웅성웅성.

그리드가 기거하는 대궐 바깥으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의 구원자인 템빨신께 참배를 올리려는 행렬이었다.

그리드는 여러모로 흐뭇했다.

너무 강한 적들과 상대적으로 약한 세력.

늘 불안했던 마음이 동대륙이 해방되고 사도들이 성장하면서 편안해진 것이다.

충분한 전력이 갖춰지고 있다.

비행정 도안의 최종본이 나올 무렵이면 아스가르드 침략도 허황된 꿈이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모진 고초를 겪은 듯하구려.”

한편 지크는 미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환국에 초빙된 적이 있을 정도로 환국과 어느 정도 소통했던 그는 미르의 성향을 잘 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향상심.

그는 무려 무신을 목표로 삼았던 자다.

하찮은 이유로 퇴보했을 리 만무했다.

“당신은... 저를 아십니까?”

미르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지크에게 상황을 단번에 이해시켰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룬어를 꺼냈다. ‘기록’이라는 뜻을 지닌 문자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도움이 될 듯하군.”

***

같은 시각, 라인하르트.

템빨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던 사리엘이 서서히 눈을 떴다.

“...당신들이 어찌 감히 이곳에.”

삭풍에 나부낀 순백의 깃털이 라인하르트 전역으로 흩어진다. 어떤 깃털은 아이린의 침실로 날아가 수호의 장벽을 세웠고 어떤 깃털은 침입자의 위치를 추적했다.

아스모펠과 전 적기사단,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사들과 병사들, 쥬드와 치안대, 그리고 검성 크라우젤이 깃털을 쫓아 밤의 어둠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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