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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22화 (1,620/1,794)

템빨 80권 - 20화

“그다지 특별할 건 없군요.”

맹인 검객 카벨론을 한참 동안 심문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사실 귀빈으로 접대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했다.

카벨론에겐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비록 크라우젤에게 칼을 휘둘러대긴 했지만 실제로 사상자를 발생시키진 않았고 보기 드문 초월자 아닌가.

기왕이면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게 라우엘의 입장이었고 크라우젤도 공감했다.

“뮐러의 활동 기간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길다. 뮐러의 죽음을 증명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외 뮐러의 활동 내용과 사상 등등.

카벨론이 제공한 정보들은 여태껏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밝혀낸 사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벨론의 정보가 하찮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수집해온 정보들이 워낙 대단했을 뿐이지.

아무렴 템빨신과 검성 아닌가. 그들이 습득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보통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군요. 뮐러의 무덤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요.”

뮐러의 무덤은 뮐러 본인이 마련한 것도,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카벨론이 마련한 것도 아니었다.

감히 누가 스승님의 무덤을 세웠단 말인가?

산 자의 무덤이라니, 의도가 너무 악의적이고 불길하다.

우연히 뮐러의 무덤을 발견하고 분노한 카벨론은 무덤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맹인인 그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고 우연한 과정을 거쳐 무후총과 손을 잡게 됐다.

무덤을 감싼 ‘검기의 결계’를 카벨론이 무력화시켜주는 대가로 무후총은 무덤을 조사하고 그 정보를 카벨론에게 제공해주기로 계약한 것이다.

그 결과 카벨론이 알게 된 사실은 뮐러의 무덤이 ‘제전’의 구조를 지녔다는 것.

“제전... 제사... 의식...”

도대체 누가, 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크라우젤이 턱에 손을 괸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를 보고 괜한 경쟁심을 느낀 라우엘이 손등 위로 흑염룡을 띄우다가 문득 말했다.

“제 생각엔 파그마가 벌인 일 같습니다.”

“...?”

“파그마가 번헨 열도에서 홀로 악마들의 침공을 막았을 때 전대 전설들의 시신을 데스나이트로 부리지 않았습니까. 뮐러 또한 데스나이트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파그마는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검호였다.

검기로 결계를 만드는 수법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물며 결계의 수준은 카벨론에게 허물어질 정도로 그리 고강하지 않았고.

합당하게 추론하는 라우엘이었지만 크라우젤이 즉시 반박했다.

“당신의 말대로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선 시신이 필요합니다. 파그마가 죽지도 않은 뮐러의 시신을 무슨 수로 구해서 언데드로 만들 시도를 했다는 겁니까?”

“시신을 대체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제전이 필요했던 거겠죠.”

“죽은 자도 아닌 산 자의 시신을 대체할 무언가...? 그런 게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겁니까?”

라우엘의 추측은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리는 반면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매우 철저한 성격인 크라우젤에게 공감을 사기 힘든 것이다.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뇌피셜 없이 추측하기엔 정보가 너무 없잖아요. 파그마의 성격을 고려하면 제 추측이 크게 잘못 된 것도 아니고.”

“파그마의 성격...”

파그마는 스스로를 희생시켜 세계를 지킨 영웅이다.

한데 만악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취급이라니...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끼는 크라우젤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파그마를 변호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긴 참이었다.

“그래서 누가 템빨신이고 누가 템빨신의 사도지?”

귀빈실에서 불쑥 튀어나온 카벨론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도시에는 고강한 자 천지로군. 나처럼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상시 압박감을 느낄 정도야. 그중에서도 특히 저 거대한 신전에 자리 잡은 기척이 고고한데 그분이 템빨신이신가?”

“신전? 사도 사리엘일 겁니다.”

“사도가 저 정도라고...? 가만, 사리엘? 이 기척은 확실히 천사들과 닮았군. 호오, 천사 출신의 사도라니. 과연 일곱 사도 중에서도 가장 고강하겠어.”

“...”

만약 카벨론의 두 눈이 멀쩡했다면 반짝반짝 빛나지 않았을까.

카벨론에게서 막 도시에 상경한 시골 쥐의 모습을 엿본 라우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무후총은 세계와 단절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로페로라는 리치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무후총과 오랜 세월 함께 활동해온 카벨론마저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둡다. 다소 기이할 정도.

“한데 당대의 검성에겐 여러모로 실망이군 그래.”

“갑자기 또 뭡니까?”

“자고로 검성이란 세상일에 초연하여 홀로 고상한 존재일세. 나의 스승님께서도 그러셨고 스승님의 스승님께서도 그러셨지. 한데 자네는 세상과 타협하여 이토록 고강한 자들과 한 배를 타지 않았나? 스승님의 비급까지 손에 넣은 자가 단신으로 천하무적을 논하지는 못할지언정 뭐가 그리도 두렵다고 패거리에 속해서는...”

“이상한 편견을 갖고 계시네요.”

검성이 홀로 고상한 존재라니.

비반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크라우젤을 대신해서 반박해준 라우엘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뮐러 님의 무덤에 가면 그분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게 진짭니까?”

“자네들이 내게 솔직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무후총은 내게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정보들은 은폐했다.

카벨론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애초에 무후총과 신뢰 관계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의심이다.

“좋습니다. 오래간만에 스컹크 님들을 호출해야겠군요.”

“스컹크? 사람 이름이 스컹크라고?”

“...뭐, 별명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라우엘의 일처리는 빠르기로 정평이 나있다. 즉시 스컹크 탐사대를 호출하고는 카벨론과 함께 뮐러의 무덤으로 파견을 보냈다.

호위로는 당연히 크라우젤이 나섰다.

뮐러와 관련 된 에피소드에서 그가 제외 될 수는 없었으니까.

곧 브라함이 복귀할 거라는 그리드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라인하르트의 방비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무후총...”

눈살을 찌푸린 라우엘이 크리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 가능하면 무후총 외곽에서라도 사냥을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후총? 아무리 외곽이라도 거기서 혼자 사냥하는 건 유지력이 못 따라갈 거다. 흠...? 그 멤버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군.

크리스, 지발, 휴렌트, 하스터.

최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소수 정예 파티가 무후총으로 이동했다.

빠른 성장을 도모하는 한편 무후총의 동향을 주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

-고맙군. 정녕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

“내가 얻은 득도 크다.”

사방신과 사도들의 교류는 기대 이상의 시너지를 발생시켰다.

사방신은 각자의 속성을 활용하는 마법을 습득했고 브라함과 지크는 그들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무려 사방신의 숨결을 다룰 수 있게 됐다는 말.

사방신을 봉인하고 그들의 힘을 억지로 꺼내 썼던 양반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별도의 훈련 과정 없이 숨결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됐으니 차라리 그리드의 입장에 가까웠다.

파지직!

‘이건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엄청난 무기가 되겠군.’

브라함은 <뇌신>에 특히 큰 기대를 품었다.

카일처럼 육신을 전광화시켜 완전한 물리내성을 갖추는 대신 마법에 취약해지는 스킬.

그리드와 카일은 그런 성질을 단지 약점으로 받아들였을 뿐, 마법과 연계하는 건 꿈에도 못 꿨던 반면 브라함은 도리어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나는 먼저 돌아가지. 탐욕에 마법을 귀속하는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에 있으니 너무 걱정 마라.”

어서 연구에 착수하고 싶었던 브라함이 그리드와 지크에게 작별을 고했다.

동대륙과 서대륙.

템빨계의 영향으로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한 두 대륙을 그는 텔레포트로 단숨에 도약해버렸다.

미르에게 눈인사를 남기면서다.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뜻이 담겼다.

브라함의 성격도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 유순해진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르와 사방신 역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 뒤.

그리드와 단 둘이 남은 지크가 짧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 뮐러가 봉인했던 대악마들의 정체에 대해서였다.

“그들이 당신의 옛 동료들일 거라고요?”

“전원 그렇다고 확신하기엔 이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헬가오는 불타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일단 헬가오가 받고 있는 고통의 굴레를 끊어줘야...”

“그 또한 이릅니다. 헬가오는 현재 인류에게 필요한 양분이고 불타르 본인 역시 그런 자신의 운명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겠지요. 다만 다른 동료들은 정확히 어떤 악마가 되어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혹 그들이 무가치하게 고통만 받고 있다면 그들이 받고 있을 고통의 굴레야말로 어서 끊어주고 싶은 게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난 당신의 소망을 이뤄줄 겁니다.”

“...”

“바로 팀을 꾸리도록 하죠. 라우엘에게 말해놓을 테니까 필요한 자원과 인선을 신청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번 일이 신께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지크가 돌아갔다.

홀로 남은 그리드는 묵묵히 망치를 두드렸다.

굳이 자신이 없어도 착실히 이로운 방향으로 진행되는 사건들.

그 결과들이 모였을 때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점점 더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멋지네요. 제 취향일 수도.”

“당신...?”

금전의 신 베니스가 하늘에서부터 강림했다.

<상점> 시스템을 토대로 플레이어와 교류하는 입장이라서 그런 걸까.

그녀의 방문은 늘 갑작스럽고 자유롭게 이뤄진다.

아직은 환국의 영역이라고 봐야 옳은 동대륙까지 불쑥 찾아온 점이 조금은 놀랍다.

“제라툴이 폐관 수련을 끝냈어요. 잃었던 격을 수복한 것은 물론이고 훨씬 더 고강해졌죠. 당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도류를 집중적으로 연마한 눈치던데 조심하세요. 당신이 혼자가 되는 순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테니 항상 사도를 호위로 거느리시는 걸 추천해요.”

“왜 내게 이로운 정보를 주는 겁니까?”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요? 전 금전의 신이니까요. 무엇보다 이윤을 추구하죠. 당신에게 투자하는 게 옳다고 판단하는 거예요. 부디 이런 제 판단이 틀리지 않게끔 제 경고대로 조심하세...”

베니스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소리 없이 강림한 제라툴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가녀린 목덜미를 붙잡힌 여파다. 끅끅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 꺾여나갈 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보고 싶었다, 그리드.”

푸화하학!!

베니스의 몸과 머리를 분리시킨 제라툴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끔찍하고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차분한 눈빛.

이번엔 결코 일을 망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펼쳐지는 ‘공간 이동 불가’의 결계.

그리드는 고립 됐다.

“이곳에는 하야테가 없으니 운 좋게 벗어날 생각은 관둬라.”

“...하야테 공이 필요할까 싶은데.”

아니, 어쩌면 제라툴이 고립 된 걸 수도 있다.

***

같은 시각, 라인하르트 초입.

“템빨신의 사도는 하나 같이 괴력난신일 거다. 괜히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여기서부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해.”

서대륙에선 보기 드문 도포를 걸친 선남선녀들이 거대한 성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하나 같이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지녔다.

한울이 주기에 들고 소별왕과 삼사는 두문불출하는 상황.

신들의 경계가 약해진 틈을 노리고 바다를 건너온 소수의 양반들이었다.

템빨신의 서사를 목격하고 매료 된 그들은 당분간 라인하르트에 머물 계획이다.

템빨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싶었다.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평생 도구로 이용당하다가 죽은 형제들을 보고 큰 회의감을 품은 차다.

“...이 동네는 진짜 괴물 천지로군.”

마침 성문을 나선 카벨론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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