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1권 - 7화
“음...”
3대1.
템빨계가 아스가르드를 앞서 나가는 가운데.
그리드는 피아로가 마음에 걸렸다.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문득문득 한숨 쉬는 모습을 발견한 까닭이다.
오직 그리드만 눈치 챘다.
만인이 피아로 또한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었으니까.
피아로를 패배자라고 자각하는 건 피아로 본인밖에 없다.
신이 섬기겠노라(?) 천명한 인물.
그러므로 완전한 신의 자격을 갖췄고 이번 성전-서사시-의 발단이 된 그를 감히 누가 패배자로 여길까.
피아로의 얼굴에 희미하게 드리운 그늘이 죄책감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이유다.
‘피아로가 진 건 내 잘못인데.’
이번 결투의 본질은 진즉부터 바뀌었다.
그리드의 아이템과 제라툴의 무맥 중 무엇이 우위인가.
크라우젤이 황혼을 휘둘렀던 것처럼, 다른 사도들 또한 템빨을 위시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리드는 사도들의 아이템을 주기적으로 교체해줬다.
하지만 아직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보급하는 단계는 아니어서 신상이라기엔 애매했다.
특히 피아로의 농기구가 구식에 속했다.
‘정확히 말하면 구식은 아니고.’
전투에 부적합하다.
피아로가 바라는 농기구란 본질적으로 경작에 적합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투에 부적합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기준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였다.
피아로의 농기구가 정녕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면 여태까지의 활약은 불가능했다.
그래,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절대자에 근접해가고 있는 존재와 싸웠을 때 비로소 드러난 차이.
그리드는 미안함을 느꼈다.
‘피아로의 고집을 꺾고 더 좋은 아이템을 만들어줬어야 하는데 소홀했다.’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소중한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한답시고 나의 철학까지 꺾어선 안 된다는 사실.
“...”
비록 아직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당장 지상으로 내려가 피아로를 위로하려던 그리드가 행동을 멈췄다.
피아로에게 그의 부인이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던 피아로의 얼굴에 진심어린 미소가 번졌다.
가정을 이룬 자가 누리는 행복이다.
오랫동안 상실했던 것을 되찾은 그의 기쁨을 새삼 실감한 그리드가 덩달아 웃고 말았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겠어.’
이번 사건은 피아로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
고집을 꺾고 한층 더 발전할 테지.
그리드가 안심할 때였다.
“하찮다.”
멜로리 다음 차례로 무대 위에 오른 신이 입을 열었다.
대기를 타고 웅웅 번지는 음성이 라인하르트 전역에 메아리쳤다.
낮게 가라앉는 까닭에 듣는 이를 심연으로 빨아들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음성.
몹시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신들이 모여 하는 짓이 고작 칼부림이라니. 이래서야 인간과 다를 게 뭐란 말이냐.”
“...”
그리드가 한 발 늦게 깨달았다.
무대 위에 오른 신.
신장이 무려 3미터에 이르는 그 비쩍 마른 신은 호흡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호흡 없이 구사하는 언어의 괴이한 파동이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이질감을 준 것이다.
원념을 표출하는 언데드의 언어와도 달랐다.
‘하긴 진짜 신이라면... 숨을 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겠지.’
여태까지 만나온 신들은 멀쩡히 호흡하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심지어 악마들도 숨은 쉬고 살았다.
한데 저자는 왜 굳이 호흡을 억제하는 걸까.
필시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다.
호흡의 중요성을 아는 그리드가 경계했고,
“칼부림뿐만 아니라 주먹질도 하지 않았소?”
후로이가 태클을 거는 가운데.
“제라툴의 무예를 증명하는 자리다.”
다른 신이 나서서 일축했다.
피아로의 제자(?), 풍요의 신 알드로였다.
장신의 신은 납득하기 힘든 눈치였다.
“높은 곳에 올라본 적이 없는 너희는 모르겠으나... 나는 천지 창조에 일조했었다. 이 땅에 저들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산을 세우고 강물을 흘려보내 대양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런 내가... 인간들 앞에서 고작 인간을 상대로 무예를 겨뤄야 한다고? 하찮다. 납득할 수 없다.”
“인간이 아니면 괜찮소?”
지크가 무대 위로 올랐다.
그는 장신의 신과 구면인 듯했다.
“카들로. 색욕에 눈이 멀어 반신을 난립하게 만든 자여.”
“...지크... 그렇군. 굳이 따지면 내가 너희들 칠악성의 어버이쯤 되겠구나.”
머나먼 고대.
심지어 이번 세계도 아닌 이전 어느 세계의 고대.
인간에게 신격을 부여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던 시절이 있다.
카들로가 인간의 몸을 탐하여 신의 아이를 잉태시키기 전까진 말이다.
그때까진 반신이란 개념이 없었고 인신이라는 개념도 희미했다.
신과 인간은 완전히 독립 된 개체였다.
“그런고로 나는 너희들 인간의 은인이다. 위신을 지켜야 할 입장에 있다.”
“신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죄목으로 주신의 자격을 박탈당한 당신이 위신을 논하는 게 우습군.”
카들로는 끝없는 색욕을 탐했었다. 성욕에 눈이 멀어 인간들의 질서를 무너뜨렸을 지경이라 그가 한창 활동했을 시기에는 사람들이 아스가르드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었다.
드물게 처벌 받은 신인 이유다.
“주신의 자격은 조만간 되찾을 것이다. 힘으로...”
카들로가 제라툴에게 무예를 배운 이유는 단순했다.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
일곱 대죄를 저지른 신 중 오직 자신만이 큰 벌을 받은 이유가 뭘까.
이를 놓고 고찰하다가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헥세타이아처럼 뛰어난 기술도, 베니스 같은 수완도, 도미니언과 쥬다르의 무력이나 지혜도 없다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혼자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다시금 주신이 되고 싶었던 카들로는 변혁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중 무력에 관심을 품었다.
제라툴이 귀감이 됐다.
탄생한지 얼마 안 됐으나 강하다는 이유로 군림하고 제멋대로 활개 치는 녀석.
심지어 본인이 치우의 대체품이라는 사실을 인정 않고 망발을 지껄여대는데 누구도 그에게 면박을 주지 않았다.
강하니까.
힘이 있으니까 굳이 충돌하기보다 피하는 것이다.
카들로가 도달해야 할 모습이었다.
“지크 너는 기억할 것이다. 내 ‘생산의 기둥’이 여신의 ‘창조의 기둥’과 비교하면 하찮을지언정 꽤 큰 역할을 수행한다는 걸. 아니군... ‘그때’의 너는 자고 있었으니 목격하지 못했겠어...”
나태의 저주에 걸린 지크를 제외한 칠악성들이 아스가르드를 침공했던 날.
도미니언의 대군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천사 군단이 칠악성을 학살했었다.
누가 봐도 결과는 뻔했다.
감히 신들에게 죄를 묻는 칠악성의 발악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1악 제이크의 ‘강운’이 의외의 상황을 발생시키기 전까지.
신들은 물론이고 천사들조차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때 강운의 변수를 차단한 존재가 바로 카들로였다.
생산의 기둥으로 불운을 생산해 칠악성들에게 이롭게 작용하려하는 모든 행운들을 억제시켰다.
“신의 권능은 우주 창조의 근원으로 인간에겐 불가해한 신비다. 권능을 사용해야 비로소 인간은 신을 우러러 보게 되지... 권능을 봉해봤자 인간과 같은 눈높이로 끌어내려지기밖에 더 하겠나.”
“본론을 말하시오.”
후로이가 끼어들기 직전.
지크가 재촉했고 카들로가 답했다.
“이 대결은 일방적으로 너희에게 유리하고 불합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설령 너희가 이겨봤자 당연한 결과일 뿐 명예롭지 못해. 그건 너희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일 텐데.”
“제라툴이 선택한 방식입니다만.”
“놈의 연명을 위해 선택한 방식이지. 내가 존중할 필요는 없다.”
“...”
카들로의 뜻 따위야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미 세워진 규칙을 무시하고 권능을 쓰겠다?
들어줄 이유가 없는 억지였다.
지크가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써라.”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드가 올라있는 저 높은 하늘보단 다소 아래.
그리드를 태양으로 삼아 등진 형국으로 브라함이 있었다.
“권능이든 뭐든 원하는 만큼 써라.”
마치 비웃듯이.
브라함의 오만한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네깟 놈이 뭔 짓을 해도 상관없으니까.”
“보아라, 지크. 이것이 위신을 잃은 신이 받는 취급이다. 권능의 사용을 억제하는 게 불합리한 이유다.”
눈살을 찌푸린 카들로가 권능을 일으켰다.
그를 중심으로 번지던 파랑색 신성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광활하게 뻗어나가더니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구름 너머로 거대한 기둥이 솟아올랐다.
생산의 기둥.
이번 세계에서도, 이전 세계에서도, 또 그 이전의 세계들에서도 레베카가 세우는 창조의 기둥에 힘을 보태온 기둥이다.
“아무래도 내가 이놈을 맡아야겠다.”
본래 브라함은 작은 소년 신만을 의식했었지만 이 순간 마음을 바꿨다.
눈앞의 놈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지크가 존중했다.
지크가 무대에서 내려갔고 브라함이 빈 자리를 채웠다.
“제라툴의 명예도 조금은 챙겨주도록 하지.”
카들로의 목소리가 변했다.
멈추고 있던 호흡을 다시 내쉰 여파다.
무지막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억제됐던 호흡이 생산의 기둥을 통해서 증폭 되더니 전 방위 충격파를 발생시킨 것이다.
라인하르트, 특히 무대를 중심으로 켜켜이 쌓인 온갖 결계가 산산조각 날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해석한 검술이다.”
스륵.
제라툴의 명예를 조금은 챙겨주겠다.
그 선언을 이행하듯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쥔 카들로가 가볍게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렸다.
기둥이 솟아있는 방향이다.
은색의 검광이 기둥에서 대량으로 생산됐다.
물결을 이루고는 푸른 신성으로 뒤덮인 하늘을 가로질러왔다.
공간 자체를 격하는 느낌.
브라함에게 도달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
“...”
기둥이 솟아난 순간부터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잠시 망각했던 신의 위용.
신에겐 우주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잔뜩 위축됐다.
브라함이 폭탄을 잘못 건드렸다고 판단했다.
천하의 브라함이라도 신을 감당하긴 힘들 거라고 여기면서.
그리드와 제라툴이 보여줬던 전투가 워낙 대단해서 절로 드는 걱정이었다.
실제로 브라함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순식간에 무대를 덮쳐온 검광의 물결이 브라함의 몸을 수백수천 갈래로 찢어놓았다.
“어...?”
“...??”
진짜로 당했다고?
걱정하면서도 이런 허무한 결과까진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너무 당황해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파지직!
갈기갈기 찢겨나간 브라함의 조각들이 희미한 자색 전광을 일으킨다.
초월자에 근접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챘을 때, 한 순간 넝마가 됐던 브라함의 몸은 본래의 형태를 되찾고 있었다.
투명한 자색 빛깔로.
청룡에게 배운 <뇌신>의 발동이다.
검광의 물리력이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고 관통해버렸다.
“하찮다.”
카들로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뇌신의 원리를 즉시 이해하고 전역에 풀어놓은 신성을 마력으로 치환했다.
마법에 취약해진 브라함을 짓뭉개 죽일 의도였다.
하지만 브라함의 마법이 더 빠르게 작동했다.
그라비티.
브라함이 제자리에서 발동시킨 중력 마법이 뇌신 상태인 그의 몸을 압축시키고 급기야 소멸시켜버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최후까지 하찮군.”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즉시 죽음을 선택할 줄이야.
그걸로 자존심이 지켜졌다고 믿는 게냐...
정녕 추악한 최후다.
“...?”
끝내 조소를 머금던 카들로가 흠칫 놀랐다.
브라함을 집어삼켰던 중력이 뇌기와 혼합되어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음을 목격한 것이다.
파지지지직!!
“놈...!”
마력의 폭발 에너지를 이용해 탄생시킨 마법적인 블랙홀.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브라함의 의도를 눈치 챈 카들로가 다급히 신성을 제어했다. 마력으로 치환시켰던 신성을 본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늦었다.
마력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안 돼...! 안 된다...!!”
신성이 통째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지는 듯한 그 불길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카들로의 비명이 공허하게 메아리쳤고,
“나쁘지 않은 맛이군.”
비명이 끝났을 땐 브라함의 흡족한 음성이 무대를 채웠다.
카들로의 것이었던 신성이 그의 자색 마력과 혼재되어 있었다.
“...”
라인하르트가 고요해졌다.
그리드조차 숫제 괴물을 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