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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51화 (1,649/1,794)

템빨 82권 - 5화

꿈틀꿈틀!

관에 깔려 곤죽이 된 시체가 경련한다.

기이한 각도로 꺾인 사지가 피웅덩이 위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얼핏 춤을 추는 듯했다.

시체 주인의 음흉한 웃음을 배경음으로 삼아 더욱 기괴했다.

“우욱...”

얼굴이 파랗게 질린 스컹크가 구역질을 삼켰다.

시체를 깔아뭉갠 관의 정체를 아는 탓이다.

크레이슐러의 영혼이 봉인 된 신목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자신의 시체를 박살내놓고 웃는 크레이슐러의 정서를 스컹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레이슐러가 전 교황이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영웅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순전히 미친놈 취급했으리라.

한편 마리로즈는 존재만으로 엄청난 압박이었다.

시체 위에 우뚝 선 관을 깔고 앉은 미녀.

그녀가 유발하는 상태이상의 종류는 앞서 악신들이 유발했던 상태이상의 종류를 가뿐히 초월했다.

대신 전설의 권한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마리로즈의 격이 낮아서가 아니다. 힘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스컹크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로즈... 베리아체를 초월하는 직계들의 정점.’

나태의 저주 탓일까.

여러 문헌 속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한 마리로즈는 어떤 열정을 보인 전력이 없다.

지금도 비슷했다.

오직 그리드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두 눈.

화사하게 웃고 있는 눈매와 달리 저 붉고 큰 눈동자는 얼음처럼 굳어있다. 지독한 환멸과 무료함 따위가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우, 웃지 마요. 그렇게 눈웃음 쳐봤자 안 됩니다.”

...정작 그리드는 눈치 채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마리로즈의 눈웃음에 홀라당 넘어간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그리드였다.

다수의 부인과 애인을 거느린 희대의 난봉꾼... 아니, 능력자치고 몹시 순수한 반응.

그만큼 마리로즈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세상 어떤 남자라도 그녀 앞에선 순수해질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미모를 보는 순간 속세의 삶을 잊고 온전히 그녀만을 열망하게 될 테니.

‘아.’

스컹크가 감탄했다.

그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리로즈의 눈빛이 서서히 살아난 까닭이다.

가면처럼 뒤집어썼던 거짓 미소 위로 진심이 덧칠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몇 배는 더 아름답게 보였다.

‘이래서야 상태이상에 저항하는 의미가 없군.’

분명히 매혹에 저항했는데도 매혹에 걸려버렸다.

어느 시점부터 마리로즈의 미모에 취해버린 스컹크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크레이슐러의 목소리 덕분이다.

위대한 교황의 신성이 깃든 언령이 정신을 맑게 만들어줬다.

-하하하! 천하의 그리드라도 내 마리로즈 앞에선 순진한 꼬맹이가 되는군. 잡아먹히기 싫으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걸세. 마리로즈는 자비를 몰라서 방심하는 사내의 목덜미를 순식간에 물어뜯거든.

신성하고 중후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말투.

마치 제 연인을 자랑하는 듯한 크레이슐러의 모습은 관짝에 불과했지만 왠지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콧대가 몹시 높아져있을 것만 같았다.

금방 짓뭉개질 콧대였다.

“귀엽구나. 못 본 새 더 사랑스러워졌네.”

-...?

크레이슐러의 웃음이 뚝 그쳤다.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었나?

홀로 중얼거리는 꼴이 현실을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그리드는 여전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덮쳐져서 입술을 물어뜯기는 경험 따위,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건... 그건 뭔가 존엄을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강제로 당하면서도 황홀했다는 점이 문제다.

내가 그런 취향일 리가 없다고 간신히 부정해온 그리드는 똑같은 경험을 피하고 싶었다.

만약 또 같은 일을 겪었는데 이번에도 또 기분이 좋아버리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볼 때마다 한층 더 헌앙해지는 낭군이라니. 질릴 틈이 없는걸.”

-뭐... 헌앙? 어? 낭군?

들썩들썩!

마리로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일이 반응하던 신목관이 급기야 경기를 일으켰다.

과거 단 일격에 그리드를 중태에 빠뜨렸고, 방금 단 일격에 크레이슐러의 시신을 압살한 신목관의 살기는 몹시 짙고 위협적이었다.

앞서 만났던 악신들의 원한과 증오 따위를 가뿐히 뛰어넘는 기세여서 마리로즈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그리드의 시선을 끌 정도였다.

순간.

어느새 관에서 내려와 그리드 앞에 선 마리로즈가 그리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래간만의 재회야. 미물 따위에 관심두지 말고 오롯이 내게 집중하렴.”

비단으로 짠 장갑을 끼고 있어서일까.

유독 부드러운 손길에 그리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모든 감각이 마리로즈의 손길에 집중됐다.

“너를 이리 올려 보는 게 좋다.”

그리드의 품에 안기듯이 선 마리로즈가 방실 웃었다.

저번에도 느낀 건데 의외로 키가 크지 않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압도적인 비율과 존재감 탓에 당연하게 커보였지만 이렇게 나란히 서면 그리드보다 머리 하나 이상 작았다.

“너의 체취가 좋아.”

고개를 슬며시 치켜드는 마리로즈는 비 맞은 소녀처럼 청순하고 가련했다.

잠시뿐이다.

어느새 다시 요부처럼 요염해졌다.

“맛도 좋고.”

길고 가는 손가락이 그리드의 뺨에 이어 입술을 훑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질색한 그리드가 그녀를 뿌리쳤다.

“피주머니 취급이나 하려고 찾아오신 게 아닐 텐데요?”

그리드는 마리로즈를 완전히 공대했다.

처음엔 단순히 두려워서였고, 이제는 고마워서였다.

그녀가 인간들을 위해서.

정확히는 나를 위해서 드래곤과 싸워줬단 사실을 알기에.

만약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야테도 무사하기 힘들었을 거고 템빨국은 쑥대밭이 됐으리라.

어디까지나 은인 취급이다.

백날 유혹해봤자 이성으로 보진 않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하나인 ‘크레이슐러’가 당신을 증오합니다.]

‘여기서?’

정작 마리로즈가 들러붙을 때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적대심까진 표출하지 않던 크레이슐러다.

한데 그리드가 마리로즈를 매몰차게 대하자마자 적대심을 품고 살기를 부풀렸다.

취향이 의심되는 반응.

물론 그리드는 오해하지 않았다.

‘...마리로즈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맛있는 음식 취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거겠지. 그래서 마리로즈가 내게 달라붙어도 크게 화내지 않았던 거고.’

정작 내가 마리로즈를 냉담하게 대하자 거기에 분노한다.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그리드는 크레이슐러를 몹시 불편하게 여기는 한편 같은 남자로서 존경하게 됐다.

인간을 버리고 관이 되면서까지 사랑하는 여자의 곁에 남아 오직 그녀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크레이슐러는 필시 동화 속 왕자님과 같았으니까.

보고 배워서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뭔가 굉장히 오해하시는 눈친데.’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스컹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변태 교황을 보고 어째선지 결연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의 속내가 걱정인 것이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후훗.”

태도만 공손할 뿐, 어서 용건이나 밝히라고 재촉하는 그리드를 마리로즈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 앞에서도 냉정하고 담대한 사내.

세상에서 그리드가 유일했다.

오직 그리드 앞에서만 마리로즈는 베리아체의 딸이 아닌 ‘나’의 기분을 느꼈다.

또각.

그리드를 바라본 채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마리로즈가 신목의 관 옆에 섰다.

-저 놈팡이가 마리로즈에게... 나의 아름다운 마리로즈에게 꼬리를 흔들기는커녕 저런 냉담한 태도를... 지가 뭐라고... 뭐 얼마나 잘났다고...! 고얀 놈...! 나쁜 놈...!!

중얼중얼.

크레이슐러는 연신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그리드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선은 지켰다.

-...설마 고자인가?

크레이슐러가 자칫 선을 넘으려하는 순간.

불쑥 손을 뻗은 마리로즈가 관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촤르르르륵!!

관 밑에 흥건하게 고여 있던 피웅덩이가 크레이슐러의 시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관에 짓눌려 산산조각나기 직전까지 갔던 시신이 순식간에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낭군이 절대지경에 올랐다는 건 알고 있어. 제라툴이 좋은 양분이 되어줬다지.”

““침입자들이여. 그대들의 위대한 신화는 이 땅에 묻히리.””

-시체가 말을 한다? 그것도 내 시체가? 호오, 이것 참 대단히 흥미롭구나. 뇌에 깃든 영성이 ‘나’를 행세하는 건가? 교황 시절 꽤 많은 연극을 관람했다고 자부하는 내가 봐도 재미있는 촌극이다. 이참에 협력해서 마리로즈 앞에서 연극해 볼까?

“하지만 무후총의 망령도 절대자인 건 마찬가지란다. 신화 포식자 중에서 가장 고강한 자. 그 악명이 천상까지 닿아 낭군과 마찬가지로 신들의 경계를 사지. 하물며 이곳은 망령의 영역이야.”

“...”

망령의 영역.

그리드도 실감하고 있었다.

방금 곤죽이 됐던 크레이슐러의 시체가 말끔한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신목으로 만든 관.

한때 마리로즈를 봉인했던 저 신성한 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순간 즉시 거짓말처럼 회복했다.

‘설마 무후총 내부에선 언데드를 무한으로 부활시키는 건가?’

그리드는 앞서 무후총의 간부 하나를 해치웠지만 그건 아직 무후총에 진입하기 전의 일이었다.

무후총에 진입한 이후론 토병 군단과 악신만 마주쳤다. 아직 언데드를 만나지 못했다.

-악의 무리로 전락한 교황 크레이슐러여. 나 크레이슐러가 나의 명예를 위해 나를 처단하겠다. 이리 와서 누워라. 이 관이 내가 누울 곳이다. 둘 다 나지만...

““시끄러운 관... 너는 꺼져라. 관심 없다.””

-너라고? 오호통재라.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는가. 오오, 마리로즈. 어때? 즐겁나?

자신의 시체를 상대로 상황극을 펼치던 크레이슐러의 음성이 갑자기 들떴다. 마리로즈의 손길을 느껴서다. 그녀의 가녀린 손이 활짝 열려있는 관 뚜껑을 꾹 눌러 닫았다.

-안 돼. 닫지 마라. 내 시체를 여기에 눕혀야 스토리가 완성된다.

“낭군은 느낄 수 있지? 나조차도 신목으로부턴 온전히 자유롭지 못해. 이건 태생적인 문제고 바뀌지 않는 본질이란다.”

-감상은 안 들려주는 것이냐, 마리로즈여. 그대는 늘 내게 짓궂구나. 그런 점도 좋다.

확실히...

관에 몸이 닿는 순간마다 마리로즈는 약해졌다.

절대자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꼭 망령에게 도전해야겠다면 이 관을 가져가렴. 그럼 제법 승산이 생길 거야.”

잘못 듣지 않았다.

도전.

마리로즈는 분명히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리드가 유일신에 등극하고 절대자가 됐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망령을 그리드보다 높이 평가했다.

객관적으로 옳은 평가다.

활동 시기만 해도 무지막지한 차이가 있으니.

사실 그리드는 누구와 싸워도 대부분 도전자의 입장이 된다.

‘게다가 신목의 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사실상 승산이 없다고 보는 눈치인데...’

무후총의 망령이 보통 놈이 아닐 거란 사실은 그리드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마리로즈에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을 줄이야.

그리드의 입 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즐거웠으니까.

오래간만에 느끼는 긴장감이 그의 기대감을 한없이 증폭시켜갔다.

“좋습니다.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내가 싫다만.

“응, 또 한 가지 주의를 주자면 우리 일족에겐 의지하지 않는 편이 좋아.”

마리로즈는 그리드를 걱정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정작 함께 싸우겠다고 제안하지 않는 이유는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수림의 질풍을 죽이고 그레니어가 산을 버리고 도망치게 만드는 등.

다른 신화 포식자들을 거침없이 사냥한 그녀조차도 무후총의 망령에겐 도전하지 못했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이곳 무후총엔 피를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자칫 폭주할 우려가 컸다. 다른 직계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무후총에 묻힌 존재와 뭔가 관련이 있나?’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크레이슐러의 시체를 힐끔 쳐다봤다.

관에게 앞길을 가로막혀 우왕좌왕하던 놈이 그리드의 시선을 느끼자 즉시 출수했다.

신체적(?) 한계 탓에 민첩함이 떨어지는 관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그리드에게 성검을 날렸다.

앞서 베리아체가 관을 던져 막아주었던 일격이다.

굳이 막아줄 필요가 없었음에도.

푸화하하학!!

“...”

마리로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목이 단 일격에 떨어져나갔기에.

물론 생전 크레이슐러의 실력은 대부분 신성력에서 나왔고 저 시체는 가짜 성검이나 휘두를 뿐 신성력을 전혀 다루지 못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초월자를 일격에 제압하는 그리드의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쿵!

다시 회복하려는 크레이슐러의 시체 위로 관을 던진 마리로즈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만전이 아니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겠네. 낭군을 상대로는 내가 밑에 깔려도 좋겠어.”

“네?”

“다른 사내 위에 올라 타본 경험이 있다는 건 아니란다. 나의 처음은 모두 낭군일 테니 괜한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네??”

-아아, 마리로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면서도 상상력이 자극되어 기쁘구나... 흑흑...

“...”

크레이슐러와 함께 활동해야한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스컹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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