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8화
퍼엉!
그리드가 허공에 남긴 검의 궤적이 잠시 후에 굉음을 토했다.
포탄 수십 발이 동시에 쏘아지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폭음.
허장성세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무지막지한 후폭풍을 일으켰다.
여울랑이 등지고 섰던 벽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드러난 미로가 복잡한 구조를 잃고 쭉 뻗은 대로로 변해버렸다.
‘오래간만인데?’
공격이 빗나가는 경험.
벌써 몇 번째 떠오른 MISS 표시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그리드의 귓전에 맑고 또랑또랑한 여인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재해와도 같은 검력이네요. 치우께서 검을 뽑으면 태산이 무너질까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이걸 보니 마냥 헛된 상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여울랑.
그녀는 본인의 정체가 신선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추호도 없어보였다.
일단 벤타오와 비슷한 복식을 갖췄다.
치마와 소매가 넓게 퍼진 반면 허리 부분은 꽉 조이는 비단 옷.
또한 그리드의 공격을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들.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의 도법들은 누가 봐도 무릉도원 신선들의 상징이었다.
‘까다롭군. 특히 부적이.’
여태껏 본 부적하곤 차원이 다르다.
여울랑의 부적은 그리드가 한동안 의지했던 <인공 감각>과 비슷하게 작동했다. 주인의 주변을 맴돌며 공격의 궤도를 읽고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도록 도왔다.
부적에 쓰인 글자에 따라서 각기 다른 공능을 발휘한다는 점은 지크의 <룬>과 닮았다.
옥을 깎아 만든 귀걸이는 신선의 아티팩트라는 <법보>로 분류될 듯한데, 아직 사용할 낌새조차 없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해선 안 된다.’
그리드는 아직 절대자가 아니었을 무렵.
무신 제라툴과 싸워서 이겼다.
브라함 또한 아직 신이 되기 이전에 지크와 힘을 합쳐 소별왕을 패퇴시켰다.
절대자라고 해서 초월자에게 필승할 순 없단 의미다.
하물며 신선의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다.
칠악성이 사실은 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인 신선 벤타오는 실제로 칠악성과 같은 시대를 살았었다.
눈앞의 여울랑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단순히 무력의 우위만 믿고 만만하게 보기엔 숨겨진 저력을 경계해야 옳았다.
“태도를 분명히 해라.”
급기야 금의 성역을 전개한 그리드가 여울랑을 꾸짖듯이 말했다.
그녀의 나이가 보기와 달리 몹시 많을 수도 있음을 짐작하고도 하대했다.
외모가 또래로 보이는데다가 먼저 습격해온 적이니까.
그래, 그녀는 적이 맞다.
다짜고짜 나타나 스컹크와 크레이슐러에게 부적을 붙이려고 했는데 그 행동을 호의로 해석할 순 없었기에.
한데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드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 일체 반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축 됐다고 보기엔 적대감 자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솔직한 감탄을 거듭하며 도리어 존경을 표했다.
안 그래도 신선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그리드는 ‘필살의 기술’로 분류되는 6융합 검무를 휘두르기 난감했다.
“제 태도엔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들을 적대하려는 게 아니라 돌려보내는 게 목적이니까요. 인간들을 위한 끝에 유일한 신이 되신 당신을 감히 훼방 놓게 되어 송구할 따름이지만요.”
“...”
여울랑은 신선이다.
이치와 도리를 깨우친 끝에 인간을 초월하고 신격을 쌓은 존재란 말이다.
태생부터 신이었던 천상의 신들과도, 신들에 의해 탄생한 양반들과도, 위대한 업적을 세우거나 무력을 숭배 받아 신이 된 인신과도 결이 달랐다.
흑백논리 따위로 평가하기 힘든 존재인 것이다.
대화를 나눠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잠시 검을 거뒀다.
“이곳엔 뭐가 묻혀있는 거지?”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망령의 정체는 무엇이냐.
어째서 무후총에 신선이 있는 것이냐.
신선이 무슨 연유로 무후총의 편에 선 것이냐, 등등.
그리드는 잡다한 의문들 따위 단번에 해결할 만한 본질을 파고들었다.
여울랑이 순순히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
당당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것치고 황당한 답변이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여울랑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만 ‘질서를 바로 잡을 존재’, 혹은 ‘진실의 이면’이 묻혔다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죠.”
“두루뭉술하게 말해봤자 대답이 안 되는데.”
촤르륵.
<화룡 이프리트의 팔>의 일부 비늘이 수축했다.
그리드가 황혼을 쥔 손에 힘을 싣자 갈라진 전완근에 반응하는 것이다.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 아래까지를 꽉 조여 주었다.
여울랑에게도 생소하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녀는 몹시 긴 세월을 살았지만 드래곤의 신체를 재현하는 방어구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호신강기를 켜켜이 쌓은 느낌이구나.’
신성, 심상, 드래곤 아머.
그리드를 감싼 호신강기는 크게 3종류로 나뉘어졌고 하나하나가 손색없이 막강했다.
권능과 비늘에 더해 용언까지 둘러친 드래곤과 한없이 가까운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군...
금의 성역에서.
크레이슐러 또한 그리드의 진가를 비로소 엿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리드를 정면에서 마주보고도 떨지 않는 여울랑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동대륙을 포함한 지상의 질서는 당신께서 바로 잡으셨죠.”
여울랑이 계속 말했다.
“안타깝게도 천상은 질서를 잃은 적이 없고요. 레베카 여신의 지속적인 부재, 일곱 신이 저지른 죄와 선인들의 반란, 한울이 일으킨 내란, 제멋대로 활개치고 고배를 마신 제라툴의 실수 등과 관계없이 천상은 늘 태초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말인 즉.
“이곳에 묻힌 존재는 당연히 지옥의 질서를 바로 잡을 존재란 의미입니다.”
“...!”
스컹크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리드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일단 속으로 부정했다.
납득하기 힘들었다.
-지금 설마 야탄을 말하는 건가?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헛소리지? 그대는 태초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드가 나설 필요도 없이 크레이슐러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야탄이 바알의 거짓말에 속아 지옥에서 쫓겨났다는 기록은 봤어도 죽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초대 교황께서 여신의 말씀을 듣고 남기신 기록이니 거짓일 확률은 적어. 여신을 신뢰하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실제 역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그 누가 태초신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죽었다고 말한 적은 없네.”
-같잖은 말장난이군. 무덤에 묻혔다고 주장한 시점부터 사망을 전제로 깔아놓은 거 아니더냐.
“주인을 모르는 무덤이기에 무후총일세. 애초에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는데 정녕 무덤일 거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뭐지? 무덤이 아니라 사실은 봉인처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본질을 흐리는군. 같잖은 사기꾼의 화술이다. 귀 담아 들을 필요 없겠어.
“애초에 야탄의 생사 여부는 중요한 사항이 아닐세. 천상에도, 지옥에도 야탄이 머무를 장소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해.”
-...
크레이슐러가 입을 다물었다.
공교롭게도 설득 된 것이다.
야탄이 정말로 죽었든, 단순히 봉인을 당했든, 혹은 본인의 의지로 두문불출하는 것이든.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는 지상이 유일했다.
정령계와 무릉도원은 절대신의 격을 담기엔 너무 작은 세상이었고, 아스가르드와 환국은 야탄을 받아줄 의리가 없다. 지옥에선 쫓겨난 상황이었고.
하면 야탄이 머물 곳은 지상밖에 없단 뜻이 됐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가 바로 이곳 무후총이었다.
고작 문지기 따위가 절대자인 이곳.
온갖 신화를 집어삼킨 끝에 별개의 차원으로 거듭난 이곳은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천상의 신들조차 외면해왔다.
수백 년이 지나서야 그리드의 도전을 맞이하게 됐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그리드 자넨 왜 굳이 이곳에 도전하게 된 거지?
“...그야 렙업하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레벨 업.
NPC에겐 자연히 성장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크레이슐러는 지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단순히 뒷산으로 사냥 가듯 찾아온 그리드가 새삼 두려워졌다. 상식적인 관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존재로 보았다.
‘...나조차도 그리드 앞에선 범인에 불과하다는 거겠지.’
대부분의 미지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법.
내가 그리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이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추스른 크레이슐러가 여울랑에게 재차 물었다.
-그대 또한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지?
“그렇네.”
-또 다른 추측... 그러니까 앞서 말했던 ‘진실의 이면’은 뭐지?
여울랑은 이곳에 ‘질서를 바로 잡을 존재’, 혹은 ‘진실의 이면’이 묻혔을 거라고 추측했었다.
그중 질서를 바로 잡을 존재의 정체가 야탄이라면, 진실의 이면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리드 역시 궁금했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울랑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대해선 말할 수 없네. 언급하는 순간 저주를 받아 이 자리의 모두가 화를 면하기 힘들 거야.”
-신성모독?
“그만하게.”
-그냥 나한테만 귀띔 해보게. 내가 이래 뵈도 신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었거든.
“그대는 신용할 수 없어.”
-신용을 못해? 나, 교황이다만?
“전 교황이겠지. 애초에 레베카를 받들던 자라 신용하지 못하는 것일세.”
-호오... 오냐. 내 네놈의 태도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드,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힘으로 겁박해야만 이야기가 진행될 듯하네.
크레이슐러는 몹시 고강하다. 신목관이 되고도 당대의 어지간한 초월자들보다 나은 수준으로, 무후총에서 실시간으로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울랑을 상대로는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그리드에게 승부를 종용하는 것이다...
그를 무시한 그리드가 여울랑에게 질문했다.
“야탄이 부활하면 지옥의 왜곡이 풀릴 거라고 믿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인 것이죠.”
“만약 이곳에 묻힌 게 야탄이 아니라면? 망령을 신용할 수 있나? 놈이 끝없이 강해진 끝에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할 수 있냐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선 모르겠습니다.”
“그럼 비켜.”
“그리드 님...!”
“사람을 설득하려면 납득시킬만한 근거들을 준비했어야지. 진심으로 나를 막고 싶으면 싸워서 이겨보던가.”
“...”
여울랑의 가는 턱 선이 뚜렷해졌다. 입을 굳게 다문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여울랑은 집요하게 스컹크와 신목관을 노렸고 그리드가 그녀를 저지했다.
온갖 법보를 이용해 기상천외한 도법을 구사하는 여울랑의 전투 방식은 그리드에게도 낯설고 위협적인 것이었지만 애초에 이 싸움은 그리드에게 한없이 유리했다.
그리드 혼자서도 여울랑보다 강한데 수적으로도 우위였으니까.
하물며 스컹크도 전설이다. 비록 비전투직업군이라곤 하지만 보통의 수준은 넘기는 강자였다. 크레이슐러와 협력하는 한편 그리드의 비호를 받는 그를 여울랑은 끝내 해치지 못했다.
‘애초에 해칠 생각 자체가 없던 거겠지만.’
그리드가 쯧, 혀를 찼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수를 쓰지 않는 자를 억압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주 조금은 재밌었다.
구름을 타고 움직이는 듯한 신비로운 검술과 몸을 투명하게 만들며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도법 등.
여울랑이 구사하는 기술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새로운 경험을 쌓는 보람이 컸고 수많은 종류의 동작을 스킬로 지정할 수 있었다.
반면 여울랑은 죽을 맛이었다.
“허억... 허억...”
그녀의 호흡은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다.
그리드의 모든 공격이 그녀에겐 무척 치명적이었던 까닭이다.
여울랑은 싸우는 내내 사력을 다했다. 막말로 모든 순간마다 심력을 포함한 전력을 쏟았다.
그리드의 대수롭지 않은 동작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리드가 가볍게 휘두른 검을 감당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식이었다.
그리드의 검이 어깨를 스친 순간 떨어진 ‘빛의 창’이 수십 장의 부적을 불태우는 광경을 봤을 땐 정말이지 혼절할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굴강한 모습.
그리드의 마음에 들었다.
“해치고 싶지 않은데. 진짜로 죽여야만 물러날 셈인가?”
“...그만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퇴로를 마련해뒀던 여울랑이다.
그녀가 새로운 부적을 꺼내는 순간 미로 깊은 곳 어딘가에 붙어있던 부적이 반응하며 그녀의 몸을 옮겨버렸다.
“저는 이곳에 묻힌 ‘무언가’뿐만 아니라 그리드 님 당신을 걱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망령 공은 아득히 고강한 절대자로... 이런...”
술법까지 구사하여 최대한 말을 빠르게 했지만 끝맺지 못했다.
초조해진 여울랑이 방을 나섰다.
망령을 만나 부탁할 셈이었다.
그리드를 직접 만나지 말고 헤매다가 떠나게끔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망령을 알현하지 못했다.
리치들이 그녀의 방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수정구를 통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가관이더군.””
““크레이슐러와 모험가를 해칠 생각은 안 하고 탈출시킬 생각으로 가득하던데. 당신의 그런 태도를 보고 어찌 우리가 당신을 신용하겠소?””
““근신하시오. 망령의 뜻이올시다.””
“정녕 망령 공의 뜻이란 말인가?”
““그렇소.””
끼이익, 쾅!
거칠게 닫히는 방문이 몰고 온 어둠이 깜깜했다. 곧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듯해서 여울랑의 근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