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2권 - 18화
무릇 이름이란, 특별한 울림을 갖는 법이다.
평범한 소녀의 이름조차 어떤 이에겐 첫사랑으로 떠올라 설레게 만들 듯이.
검성 뮐러의 이름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역사가 증명하는 최강의 검사.
혹자는 역대 최고의 전설이라 칭송하는 사내.
벌써 수백 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았다.
뮐러만 살아있었어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기대감 때문이었다.
뮐러를 ‘죽인’ 믿음 말이다.
“그래, 이게 맞지. 나는 내심 그의 죽음을 부정해왔소이다.”
뮐러의 출현이 세상에 전파된 직후.
탑의 결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제 결사들은 드래곤의 아가리 속에 갇혀 눈 먼 맹인이 아니다.
지상을 장악해가고 있는 템빨계 소속으로 속세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뮐러의 검재는 나를 초월하오. 수련을 거듭 쌓은 끝에 한층 더 고강해지고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뮐러는 무쌍검을 익히지 않았어도 필시 최강의 검성이 됐을 테지. 칼을 강하게 휘두르는 일쯤이야 특별한 수법이 없어도 능히 해냈을 인물이니까.”
비반은 무척 들뜬 상태였다.
존경하는 후배가 살아있음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한편, 자신의 실력을 점검할 기회가 찾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생전의 뮐러를 초월했다고 확신한 이후부터.
그의 성장은 멈춰 있었다.
뮐러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검사로서 그 이상의 경지를 상상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갈 길 자체를 엿보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론 뮐러가 해답을 제시해줄 것이다.
비반은 그의 등을 보고 나아가면 된다.
그 정도로 뮐러의 입지가 컸다.
“영웅의 생환은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지. 하지만 지금은 마냥 기뻐할 때가 아니오. 뮐러의 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들이 몹시 많을 테니까.”
뮐러 이후의 시대를 살아간 영웅들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다.
실력이나 업적 따위를 뮐러와 비교당하는 일.
옛날부터 존재해온 악당들에게 영웅의 기준점은 뮐러였다.
물론 탑의 결사들은 전원 뮐러의 선배 세대이므로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증언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악마들이 뮐러와 자신들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중에서도 지옥이 가장 신속하게 반응할 게요. 최악의 경우엔 바알이 직접 지상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소.”
바알은 죽지 않는다.
인간들의 그를 향한 공포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는 이상 무한히 부활했다.
하지만 그건 무적을 뜻하진 못했다.
그리드가 몇 차례나 증명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리드에게 목숨을 잃은 바알은 내심 초조한 상태일 것이다.
더 강한 힘을 갈망하고 있을 것이며, 새로운 ‘양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착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양분이란 당연히 인간의 죽음을 뜻했다.
바알은 죽은 인간의 능력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재현할 수 있는 괴물이니까.
뮐러의 검술이 몹시 탐나겠지.
비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알이 지상을...? 치매라도 오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요?”
그리드는 지옥에서도 바알과 싸워서 이겼다.
물론 백퍼센트의 승률을 장담하진 못했지만, 지상에서는 무조건 이길 확률이 높았다.
“그리드에게 뻔히 맞아죽으려고 지상을 침공한답니까?”
“침공의 형태에 따라서 결과가 다를 수도 있지. 바알의 강점이 어디 무위뿐이던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비반에게 프론잘츠가 일침을 놓았다.
“바알이 체득하는 망자의 능력이라는 게 꼭 무력에 국한되진 않잖나. 어쩌면 우리도 상상할 수 없는 사술을 다양하게 부린다고 봐야 옳네.”
바알은 악룡 번헬리어를 자신의 입맛대로 조정했다.
무려 고룡을 기만한 놈이니만큼 어떤 패를 지녔을지 몰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지상에 잠입해서 뮐러를 저격하는 것도 놈에겐 쉬운 일일 수도 있지.”
“그럼 뭐... 어쩌자는 말씀이오?”
“우선 뮐러의 안전을 확보해야지. 예를 들면 바알이 찾을 수 없는 장소에 거처를 마련해 준다거나.”
“템빨계 말씀이오?”
“템빨계는 안 된다. 서서히 지상을 뒤덮어가는 중인 그곳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머니까.”
만약 바알에게 그리드의 기척을 속이고 템빨계에 잠입할 수단이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게 된다.
“템빨계가 아닌데도 안전하면서도 은밀하기까지 한 장소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이오?”
“...”
결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나 같이 비반을 가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무표정을 유지 중인 베티가 대답해주었다.
“여기. 탑.”
전대 전설들의 마법, 지식, 기술이 집대성된 건축물.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절대자의 심상을 덧씀으로서 완전해진 지혜의 탑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장소다.
하물며 이런 곳이 세상에 수십 개였다.
현재 머물고 있는 탑의 위치가 만에 하나라도 발각되는 즉시 피신할 수 있는.
드래곤의 표적이 되길 원치 않았던 하야테가 라드볼프 형제의 도움을 받아 완성시킨 최고의 은신처인 셈이다.
“뮐러를 영입하여 변수를 차단함과 동시에 탑의 전력 상승을 꾀하자는 게요.”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겠다.
하야테의 파격적인 선언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뮐러의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오히려 탑에서 정중히 모셔야할 입장이다.
뮐러가 부디 세계의 정세를 헤아리고 우리의 제안을 받아주길 바랄 뿐.
“앞으로 우리는...”
하야테가 이후의 방침을 설명했다.
뮐러의 등장에 흥미를 보일만한 드래곤을 선별하고 그들의 발을 묶을 작전을 짰다.
오랜 세월 동안 피해온 드래곤을 상대로 먼저 싸움을 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단 말이다.
그리드가 만든 광경이다.
그리드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하야테는 용살자가 되었다.
***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2개가 된다고 생각해보자.
나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인생을 살아온,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지구.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단연코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급기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진짜라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온갖 무섭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물며 지옥의 악마들은 인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패도적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자신을 마주하는 즉시 부정하고 물어뜯을 것이다.
“2개의 지옥은... 종국에 이르러 상쇄될 터.”
망령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았다.
수천 년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마모된 감정이 그녀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힘든 눈치였다.
말을 하면 할수록 들끓는 신성에 성대가 녹아내리기라도하는 걸까.
목소리가 점차 더 갈라진다 싶더니 어느 시점부터 뚝뚝 끊겼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리드 일행은 망령의 노림수를 파악했다.
템빨단엔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 많았기에.
“네가 지옥을 재현하면 바알까지 복사할 수 있는 건가?”
그리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반응했다.
망령의 계획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건지 흥미를 보였다.
망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만 의미가 있다...”
한울의 첫째 아들 대별왕.
그리고 야탄의 셋째 딸 베리아체.
무려 두 절대자의 시신을 현상의 재료로 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고, 사실 망령은 두 절대자의 ‘영혼’까지도 재료로 갈아 넣을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모든 불가능이 가능하게 될 테니까.
“흠...”
심검의 전개로 후로이를 살린 뮐러.
수백 년 만에 속세로 복귀하자마자 인명을 구한 영웅 중의 영웅은 침음하고 있었다.
망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신’의 모습을 보면서다.
“혹할 만한 이야기이긴 해. 하지만 상당히 공교롭군...”
뮐러는 그리드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 챘다.
아름다운 신성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다.
영웅왕의 투기를 토대로 그리드가 신이 되기 전부터 쌓아올린 업적들을 엿본 것이다.
아직 채 한 마디 인사조차 나누기 전이건만, 저절로 존경심을 품었다.
자신은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오른 후대의 위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여 최대한 존중하고 싶었지만, 망령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보고 상당히 큰 아쉬움을 느꼈다.
새로운 지옥을 만들어 기존의 지옥을 상쇄시키겠다는 망령의 계획.
꽤 그럴듯해 보이는 저 계획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지옥을 이곳 무후총에 세울 거라는 점이다.
물론 무후총은 지상과 분리 된 별도의 차원으로 진화한 상태였지만 그 규모가 지옥과 비교하면 한참 작았다.
무후총만으로 지옥을 재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망령의 주술은 아마 높은 확률로 지상을 침범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지상의 일부마저 지옥으로 변해버리면.
무후총, 지옥, 지상은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뒤얽히게 된다.
세 차원 모두 전쟁터가 될 거란 말이다.
이때 지상은 운 좋게 멸망을 피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폐허로 전락할 터였다.
죽음을 바란 끝에 지옥의 정화를 열망했던 뮐러가 망령의 계획에 동조하지 못했던 이유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한다는 것.
망령에겐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뮐러에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나는...”
검파에 걸친 뮐러의 커다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
지옥의 틈새에서 낭비했던 수백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는 굳은살이 증명한다.
적어도 검사로서, 검성으로서 지냈을 무렵의 뮐러는.
단 한 순간도 낭비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자네의 신을 벨 수도 있네...”
유일신 그리드와 망령의 협력.
그것은 지상을 파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자네와 저들을 모조리 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드와 망령, 크라우젤과 템빨단원들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선언하는 뮐러.
이 순간의 그는 막연한 공포를 극복하고 있었다.
끔찍한 최후를 각오했다.
과거에 한 번 버렸던 영웅의 의무를 짊어졌다.
흘러가는 상황이 강요했다.
순간.
“당신은... 의외로 바알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망령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힐끔, 뮐러에게 향하는 그의 눈빛이 무척 심유했다.
“바알이 둘이 된다고 해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들까? 내 생각엔 오히려 재미있다며 협력할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일시적인 협력일 뿐이다... 더 큰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서 머잖아 반드시 서로를 배신할 것이다.”
“그 일시적인 상황 동안 우리가 죄다 죽어버리면?”
“모든 발전과 진화는 위험을 감수했을 때 이뤄지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염려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 삶에는 무슨 가치가 있지?”
“지상의 멸망 또한 미래를 위해 감수해야할 일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우리가 모두 죽고 지상이 멸망할지언정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다. 지옥이 정화되고 나면 다음 세상의 지상은 반드시 안전해질 테니까. 다음 세상의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다...”
“실패.”
“...?”
“나를 설득하는 건 실패했다고.”
언젠가부터 그리드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그리고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다음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했다.
“내가 있는 한 멸망은 없다.”
[유일신 ‘그리드’가 24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지상을 수호하는 신의 의지에서 비롯합니다.]
“결국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진정으로 그대에게 승산이 있다고 믿는가?”
“승산? 적지만은 않은 듯한데.”
그리드가 수천 자루의 무구를 소환했다.
원덕구를 이용한 호출이었고, 부름에 응한 인물 중에는 드래곤 웨폰의 주인인 비반이 있었다.
“검성 뮐러.”
기적처럼 나타난 검의 행렬.
“마음껏 골라 쓰시오.”
그것은 역대 최강 검성의 온전한 무력이 되어주었다.